[인터뷰/이수호 전태일재단 이사장]“내 마음 속 전태일은 늘 있고, 평생 빚이다”
[인터뷰/이수호 전태일재단 이사장]“내 마음 속 전태일은 늘 있고, 평생 빚이다”
  • 인터뷰·정리/이은영 편집국장 ,박정환 칼럼니스트
  • 승인 2015.09.30 0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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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 45주기 맞아 전시회, 공연 등 다양한 문화활동 펼쳐져

▲이수호 전태일재단 이사장,시인(현)/민노당 최고위원/ 민주노총위원장/전교조 위원장/선린인터넷고교 교사/신일중고교 교사/울진제동중학 교사

*저서 ‘일어서는 교실’, 사랑의 교육 희망의 교육‘, 동화집 ’까치가족‘과 시집 ’나의 배후는 너다‘ 등이 있다.

여기 사람이 있다
소리치며 불탈 때
나에게는 그 외침이  왜
여기 사랑이 있다
라고 들렸을까?

이수호 시집 <사람이 사랑이다>
 -'여기 사랑이 있다' 중에서 -

몇 해 전 '사람이 사랑이다'라는 시집(2009년/도서출판 알다 刊)을 펴낸 이수호 전태일재단 이사장. 용산참사 투쟁현장에서  망루에 공권력이 투입,고 화염병이 투척되자 "여기 사람이 있다"라고 누군가 외친 말이 "여기 사랑이 있다"라고 들렸다고 한다.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순간의 '아름다움'인가.

이 시집을 통해 이 이사장은 권력과 맞서 싸우는 시위현장에서, 또 수배를 피해 도망다니며 느낀 인간적인 고뇌와 연민, 분노와 좌절 속에서 외로움을 꽃으로, 들풀로, 나무로 담담하게 풀어냈다.

송경동 시인은 이 이사장의 <사람이 사랑이다> 시집 해설을 통해 그를 가르켜 사르트르가 ‘금세기의 가장 완벽한 인간’이라 칭했던 위대한 혁명가인 체 게바라에 빗댔다. ‘이수호를 읽으며 체 게바라를 떠올리는 기쁨’이라 했다.

송 시인은 “체 게바라는 의사의 길을 포기하고 사회악의 종양인 자본주의와 제국주의를 대수술하는 혁명가의 길을 택했다. 시인 이수호 역시 허위를 가르치는 교사의 길을 포기하고 ‘수십년간 목도 없이 아스팔트 위로 뛰어다니며 지금까지 싸우고 있(‘아찔한 희망’ 중에서)다“라고 했다. 또 이수호이사장이 평택 쌍용자동차 파업현장에서 어제의 동료가 오늘의 ‘구사대가 된 모습을 보며 슬퍼한 것처럼 체 게바라가 변절해 가는 동지들을 보며 슬퍼한 것을 떠올렸다.

쿠바 혁명의 성공 후 탄탄대로의 편안한 삶을 살 수 있었던 체 게바라는 또 모든 자리를 버리고 다시 볼리비아로 떠나 결국 볼리비아군에 잡혀 죽임을 당하지만 당시 그가 가지고 있던 '홀쭉한 배낭' 속에는 끝까지 그가 가슴에 품었던 자신의 일기를 적은 '녹색노트'.그 노트속에 빼곡히 적혀 있던 것들은 파블로 네루다, 세사르 바예흐 등의 시였다.

1970년 '근로기준법' 준수를 외치며 자신의 한 몸을 기꺼이 바친 전태일. 그로 인해 당시 한국사회는 크나큰 변혁을 가져온다. 암울한 시대에 그는 스스로를 희생시켜 많은 이 땅의 노동자들에게 희망의 꽃을 피우게 했다. 이후에 대한민국 노동계는 전태일에 대한 부채의식을 지울래야 지울 수가 없다. 그가 끼친 영향이 얼마나 순수하고 위대했는지. 그런 전태일도 글쓰기를 즐겨해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들을 꼼꼼히 수기형태로 기록하고, 자신의 삶을 3인칭 시점으로 소설을 구성해 놓기도 했다.

체 게바라, 전태일, 이수호 이들 세사람의 공통점은 문학에 맞춰져있다. 그래서 문학의 힘, 문화의 힘이 위대한 것을 새삼 깨닫는다. 체 게바라의 유명한 일화 중 하나는 담배를 달라고 하는 병사에게 담배라는 글을 배우면 주었다 한다. 그가 집요하게 고집한 '문자를 알아야 한다'는 것, 더 나아가 글쓰기는 생각을 하게하고 행동하게 하는 중요한 도구라는 신념이 뒷받침된다.

대한민국에서 70년대에 전태일에 이어 90년대 전국교직원노조(이하 전교조)는 우리나라 교육에 혁명과 변혁을 가져왔다. 그 중심에 섰던 이수호 전 전교조위원장은 지금 전태일재단의 이사장을 맡고 있다. 이 둘은 공교롭게도 나이도 동갑이다. 아마 전태일이 살아있다면 두 사람은 좋은 친구로 동지로 사회를 변화시키는데 더 많은 일들을 했을지 모르겠다.

올해가 전태일 작고 45주년이다. 더불어 전태일에게 육신과 올바른 정신을 물려주고 또 그 정신을 되돌려 받은 전태일 계승자인 이소선 여사의 추모4주기이기도 하다.

이수호 이사장은 전태일 정신의 2대 계승자인 셈이다. 그동안 전태일재단의 전신이라 할 전태일기념사업회를 맡아 왔던 이들이 여럿되지만 노동현장의 바닥에서부터 투쟁을 이어온 이는 이소선 여사 다음에 이 이사장이 유일하다. 그래서 기자는 이 이사장을 전태일 정신의 '적자'로서 그를 2대 계승자라 인식한다.

그와  고 이소선 여사의 생전의 관계도 살뜰하다. 살아생전에 아들처럼 이소선 여사를 어머니로 받들었고 이 여사 또한 그러했다. 그래서 이 이사장에게 이소선 여사는 더 각별한 '이소선 어머니'다.(노동계를 비롯 민주화투쟁 전선의 사람들은 고 이소선 여사를 '이소선 어머니'라고 부른다. 그들 모두에게 이소선여사는 각별한 어른이다.)

전태일재단은 지난 8일 포럼을 시작으로 오는 30일 ‘시대정신, 전태일과 만나다’전(인사동 아라아트센터)을 비롯 11월 13일까지 다양한 추모 문화행사를 계획하고 있다. 추석 연휴가 시작되기 하루 전날 종로구 창신동에 위치한 전태일 재단에서 이수호 이사장을 만났다.

▲이수호 전태일재단 이사장, 시인(현)/전 민노당 최고위원/민주노총 위원장/전교조 위원장/선린인터넷고교 교사/신일중고교 교사/울진제동중학 교사

*저서 ‘일어서는 교실’, 사랑의 교육 희망의 교육‘, 동화집 ’까치가족‘과 시집 ’나의 배후는 너다‘ 등이 있다.

나눔을 실천하기 위해 전시회에 참여한 화가들의 마음이 전태일의 마음

올해 3월에 이사장을 맡았는데 마침 올해가 전태일 추모 45주기을 맞는 해다. 이달 30일 인사동 아라아트에서 ‘시대정신, 전태일과 만나다’ 전시를 열어 수익금은 네팔학교 돕기에 쓰인다는데, 자세한 내용이 듣고 싶다.
“이주노동자를 도와주는 이주노동희망센터의 업무를 전태일재단이 겸하고 있다. 네팔이나 방글라데시를 방문해보니 이들 나라의 국민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힘들게 살고 있었다. 우리나라만 해도 외국에 나가서 힘들게 돈을 벌어오던 시절이 반세기도 되지 않는다. 우리가 도움을 받던 것처럼 이제는 우리가 도와주어야 할 차례다.

이주노동자를 도와주고자 하는 전태일재단의 생각에 동의하는 화가들이 많으니까 전시회를 열어서 네팔에 학교를 지으면 어떻겠느냐는 의견이 나왔다. 전태일재단이 이 사업을 추진하면 전태일재단의 이념 정신을 살릴 수 있고, 이 시대에 맞는 전태일 정신을 추구할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추진하게 됐다.

무언가를 도와주고 싶어 하고, 나누고 싶어 하는 전시회에 참여한 화가들의 마음이 전태일의 마음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의미 있는 건 이번 사업에 민미협(민족미술작가협회)과 미협(한국미술협회)의 구분이 없어졌다. 처음에는 30명의 작가가 참여하리라고 생각했는데 참여하는 작가가 가면 갈수록 늘어났다. 마지막에는 100여 명의 작가가 전시에 참여하게 됐다.

아라아트 전시관이 적지 않은 규모인데 100명이 넘는 작가가 참여하다 보니 전관을 모두 사용한다. 네팔 학교를 돕는다는 좋은 취지로 기획된 전시라 좋은 작품이 많다. 신학철, 안창홍, 김재학, 이철수 선생 등의 작품과 오윤 선생과 같은 고인의 유작 등 원로 및 중견 작가의 작품이 전시된다.”

전태일을 통한 문화 활동도 활발하다. 전태일 문학상도 올해로 23회째고, 청소년문학상도 10회를 맞았다. 전태일이 하나의 문화아이콘으로도 자리잡아 뮤지컬 판소리, 만화, 영화 등이 만들어졌다. 전태일 기일을 전후해 다양한 문화행사를 펼치고 있는데 올해는 어떻게 진행되는지.
“전태일은 역사적 사실이면서 노동 운동의 상징이다. 다양한 작품의 소재가 되면서도 영감을 제공한다. 올해가 전태일이 작고한 45주년이 되는 해다. 45주년을 맞이해서 무얼 해야 할까를 고민해보다 노동계나 문화계에서 전태일을 가지고 스스로 무엇인가를 만든 것을 찾아보자 했다. 전태일을 소재로 연극과 뮤지컬, 판소리가 이미 상연되고 있었다. 문화적이고 예술적인 소재로 전태일이라는 인물을 조명한다는 점에 대해 고맙게 생각한다. 영화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로 만들어졌다. 이소선 합창단도 만들어졌고, 현재 명필름에서 애니메이션을 추진 중이기도 하다.

9월 3일이 이소선 어머님의 기일이고 11월 13일이 전태일의 기일이다. 그 두 달 동안 문화주간으로 역량을 모아 행사를 추진하고 싶은 바람이 있다. 올해는 자발적으로 꾸려가는 팀들을 후원하는 정도이지만 재미있을 것 같다. 내년에는 재단에서 처음부터 기획에 참여해서 다양한 문화예술을 통한 행사를 진행하고자 한다. 역시 참여하는 것은 문화행사를 통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고 파급효과도 높다. 또 문화예술계 분들이 투쟁할 때 보면 제일 열성적으로 참여하더라.(웃음)”

청계천 전태일 분신지를 서울시가 미래유산으로 지정했다.
전태일 열사 분신자리, 평화시장 등이 미래문화유산으로 됐는데, 걸 계기로 다리라든가 과거 바보회 삼동회 조직할 때 드나들었던 다방(아직도 있다), 노조사무실 등을 묶어서 전태일센터를 만들 계획을 하고 있다. 아직은 미확정이지만 이제는 전태일을 기념하는 것도 좋지만 자라는 아이들이 참여하는 교육의 장으로 만드는 것이 더 의미있는 일이다.

▲이수호 전태일재단 이사장 ,시인(현)/민노당 최고위원/민주노총위원장/ 전교조 위원장/선린인터넷고교 교사/신일중고교 교사/울진제동중학 교사

*저서 ‘일어서는 교실’, 사랑의 교육 희망의 교육‘, 동화집 ’까치가족‘과 시집 ’나의 배후는 너다‘ 등이 있다.

이소선 여사의 정신, 전태일에게 영향을 끼친 다음 다시 이소선 여사에게 되돌아온 것

전태일은 우리나라 노동운동의 상징이다. 그는 분신으로 생을 마감했는데 조영래 변호사가 생전에 전태일 책을 썼을 때(1983년)에는 군사정권 당시라 저자 이름을 밝히지도 못했다. 이후 저자를 밝힐 수 있었지만 책 내용에 ‘분신’이라는 단어가 300번 이상 들어가서 그 것 때문에 노동계에서 분신 자살이 나오는 것이 아닌가 하고 많이 괴로워했다 들었다.
“조영래 변호사는 전태일의 수기와 일기, 각종 메모와 소설을 참고해서 평전을 썼다. 전태일이 대단한 건 초등학교도 제대로 나오지 못했는데 소설을 썼다는 점이다. 전태일의 묘비가 ‘기독청년 전태일’로 되어 있다. 그 정도로 전태일은 종교적인 요소와 밀접한 인물이지만 평전에는 기독교적인 색채가 드러나지 않는다. 노동운동적인 관점에서 읽기 쉽게 평전을 기술했다.

사람이 자기 목숨을 스스로 끊는 걸 거룩하고 본받아야 할 행동으로 평전을 읽는 독자에게 비쳐진다면 문제가 되는 거다. 그렇다고 평전에서 분신이 강조되지는 않았다. 조영래 변호사의 철학적인 고민이 십분 이해된다. 전태일 평전은 판을 거듭하면서 만화로도 만들어질 만큼 다양한 형식으로 재생산되고 있다”

- 전태일을 얘기할 때 어미니인 이소선 여사를 빼놓을 수 없다. 전태일 정신을 계승해서 어려운 이들을 위한 많은 활동을 하신 그 분의 정신은 또 다른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좋은 지적이다. 평전에는 이소선 어머니가 강조돼 묘사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전태일의 동생이나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소선 어머니의 카리스마는 대단했다고 한다. 이소선 어머니가 가진, 어떻게 삶을 살아야 하는가 하는 태도가 전태일에게까지 영향을 끼친 거다. 전태일은 어머니에게 받은 정신적인 영향력을 공장에서 구체적으로 행동한 거라고 본다. 이소선 어머니의 정신적인 유산은 전태일에게 영향을 끼쳤다가 다시 이소선 어머니에게 되돌아온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어머니의 뜻에 따라 살다 간 전태일은 마지막 순간에 ‘나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아 달라’는 당부를 남겼다고 한다. 이소선 어머니가 전태일의 유지를 받아들이면서 이소선 어머니는 새로운 삶을 살아간다. 청계피복노조를 만들면서 전태일의 친구들과 더불어 투쟁한다.
사람은 나이가 들면 편안하게 살고 싶은 욕구가 생긴다. 하지만 이소선 어머니는 고령의 나이에도 아들의 유지를 이어 끝까지 투쟁 현장을 떠나지 않았다.“

-이후에 이소선 여사는 그렇게 가난하게 살지 않아도 됐을 것 같은데.
이소선 어머니는 평생을 가난하게 살았다. 많은 후원이 있었음에도 ‘자발적 가난’을 택한 분이 이소선 어머니다. 전태일재단 건물도 이소선 어머니가 생전에 남긴 유산이다. 독립영화 ‘어머니’를 보면 어머니의 인간적인 면이 너무나 잘 묘사돼 있다
이소선 어머니는 생전에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노동자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는 견해를 갖고 있었다. 노동이 얼마나 소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가를 중요시한 거다. 이소선 어머니는 우리나라 노동계가 갈라져서 내부 균열을 일으키는 걸 안타까워했다. 노동계에 대해서는 ‘하나로 단결하라’는 평생의 화두를 갖고 계셨다.”

전태일, 타인에 대한 자비와 연민, 공감능력 갖춘 한계와 금기 뛰어넘는 '아름다운 청년'-차비 털어 배고픈 여공에게 풀빵 사먹이고는 두 시간 걸어 귀가

 

이사장님이 보는 전태일은 어떤 사람인가.
“전태일을 이야기할 때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이라는 표현을 한다. 전태일이라는 인명 앞에는 ‘아름다운’과 ‘청년’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23살이라는 생물학적 나이도 있지만 청년의 기백이 드러나는 수식어다.

사람은 추진하던 일이 한계에 봉착하면 포기한다. 그런데 전태일은 한계를 뛰어넘었다는 데에 의의가 있다. 정의롭지 못한 일이라든가, 원칙에 어긋나는 일은 전태일이 두 눈 뜨고 보지 못한다. ‘한계와 금기를 뛰어넘는 청년’으로 전태일을 바라보고 싶다.

불교식으로 보면 자비로운 마음, 연민의 마음을 가진 청년이자 공감력이 뛰어난 인물이기도 하다. 평전에도 묘사되지만 전태일은 다른 사람이 힘들어하는 걸 보질 못하는 스타일이다. 힘든 상황을 보면 도움을 주기 위한 일을 하거나, 사주는 인물이다.

전태일이 일하던 당시에는 근로한 만큼의 대가가 돌아오지 않던 때였다. 저녁에 버스 타고 귀가할 차비밖에 없던 전태일이지만, 저녁을 굶을 처지에 놓인 여공을 위해 귀가할 차비를 모두 털어서 풀빵을 사서 ‘오빠는 괜찮아’ 하고 달래며 먹이고는 두 시간을 걸어서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여공들이 자신들의 건강을 돌보지도 못하고 노동착취를 당하는 것을 자신의 일보다 더 아파하고 이들 구해야겠다는 일념으로 본격적인 노동운동에 뛰어들게 된다. 그가 죽음과 맞바꾸고자한 것이 노동에 대한 정당한 보상,‘근로기준법 준수’다“

-전태일의 나이가 이사장님과 동갑이다. 가정이지만 만일 전태일이 살아있다면 지금 쯤 어떤 일을 하고 있을까.(웃음)
“그가 남긴 글이나 주변 사람들의 얘기를 통해 본 전태일은 문학에도 소질이 있고, 노래도 잘하고, 공감능력이 뛰어나다. 활달하고 모든 일에 적극적이고 좌중을 잘 이끌어가는 재능이 많은 사람이다. 특히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고, 옳다하면 바로 실천에 옮기는 사람이다. 이렇게 다양한 에너지가 결국 제대로 잘 분출되고 자신이 가진 가치 실현을 위해서 정치인이 됐을 가능성이 높다. 상당한 정치적인 입지를 구축해 지금쯤 대통령의 자리에 오를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가정도 해본다.(웃음)”

전태일 친구, 1억 원이라는 거금 기부하기도

▲이수호 전태일재단 이사장,시인(현)/ 민노당 최고위원/ 민주노총위원장/ 전교조 위원장/선린인터넷고교 교사/신일중고교 교사/울진제동중학 교사.

*저서 ‘일어서는 교실’, 사랑의 교육 희망의 교육‘, 동화집 ’까치가족‘과 시집 ’나의 배후는 너다‘ 등이 있다.

전태일이 죽음과 맞바꾸려한 것이 노동에 대한 정당한 보상,‘근로기준법 준수’“

- 이사장님은 전교조 창설에 앞장서고 위원장을 맡으며 많은 정치적 고초도 겪었다. 울진에서 교사를 하다가 전교조 운동에 투신했다는데 어떤 자극이나 계기가 있었나?
“집안 형편이 어려워 대학에 갈 처지가 못 되었다. 직장에 다니면서 야간 대학을 다녔다. 교사를 하며 교육 현장에서 느끼는 불합리와 정치적인 모순에 힘들어하던 차에 광주민주화운동이 벌어졌다. 당시 사회적인 분위기에 자극을 받아 노동 현장에 투신했다.
전교조 초기에는 사무처장을 맡았다. 민주노총에 와서는 전교조와 마찬가지로 사무처장을 역임하고 진보정치를 구현하기 위해 민주노동당 최고위원을 맡았다. 우리나라 진보 노동운동의 주류로 활동한 셈이다.

-비록 낙선했지만 2012년도에 서울시 교육감 보궐선거에 출마했다.
민노당 활동을 접고 선린인터넷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자그마한 소망이 있었다. 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정년퇴직하는 것이었는데 민노당이 분열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진보의 기치를 지키기 위해 사표를 내고 다시 정치판으로 불려 나왔다.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은 다 했다고 생각하지만 주변에서는 국회위원과 같은 구체적인 정치를 해야 하는 게 아니냐는 권유를 했다. 하지만 아무리 선하고 좋은 의도라고 해도 구체적인 정치 세계로 들어가면 권력욕, 혹은 자리 욕심으로 비칠 우려가 있다.

뒤에서 도와주는 걸로 만족하고 있던 차에 곽노현 교육감이 어려움을 당하는 위기가 닥쳤다. 만약 곽 교육감이 잘못되면 서울교육이 잘못되겠다는 위기의식과, 이것은 평생의 교사로서 안 되겠다 생각했다. 보궐선거에 뛰어들어 나름 최선을 다했지만 여러 정치적 상황으로 고배를 마셨다. 이제는 개운하다. 현재 대표를 맡고 있는 단체가 네 개다. 이주노동희망센터와 손잡고(노동자손배가압류소송단체), 갈등해결센터와 전태일재단이다. 이것을 전태일 재단으로 모아서 같이 역량을 결집시키고 싶다.

-전태일 기념사업회에서 몇 년 전 전태일 재단으로 법인화됐다. 재정 상태는 어떤지?
전태일 재단은 고 ‘이소선어머니’께서 이 건물을 마련해 주셔서 독립자산이 있다. 이것이 큰 힘이다. 그리고 매월 만원 정도 내는 후원회원도 500~600명이 있어 어렵지만 꾸려가고 있다.

전태일이라는 이름이 아름답고 크다는 걸 느끼는 게, 이름도 밝히지 않고 몰래 후원하는 분들이 꽤 된다. 이번에도 전태일 친구라고 밝힌 분이 1억 원이라는 거금을 쾌척(快擲)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기부라고 하면서 10년동안 1억 원의 적금을 모아서 기부한 것이다.
그분의 자식이 취직을 하지 못해 쓸 돈도 많은 상황임에도, 자칫 주저하다가는 1억 원이 부스러질 것 같아서 얼른 가져왔다고 밝혔다. 자신도 그렇고 전태일도 그렇기에, 배움에 한이 된 사람들을 위한 장학 사업으로 써달라는 구체적읜 의사를 밝혔다.
그리고는 기부한 다음 날부터 1억원을 다시 모으기 위해 10년 동안 꼬박 모으겠다는 계획도 밝혔다. 1억 원을 10년 동안 모으려면 금리가 낮아서 한 달에 86만원씩 부어야 한다고 한다.

-전태일 재단의 앞으로 계획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
이 동네를 오면서 봤겠지만 아주 복잡하고 열악한 동네다. 이 동네에 재중동포를 비롯해 네팔 등 동남아 이주노동자가 많다. 우리사회에서 가장 험한 일을 하는 가난한 사람들이다. 전태일재단에 기금이 조금만 더 조성되면 건물 1층에 (이주)노동자를 위한 천 원짜리 음식점이나 카페를 운영하고 싶은 바람이 있다. 이주노동자끼리 모임 할 장소도 마땅치 않다. 그들끼리 이야기도 할 수 있고 저렴하게 식사도 할 수 있는 공간이 구성되면 좋을 것 같다. 이런 것이 다 전태일 정신이 아니겠나.”

-개인적인 꿈은 무엇인가?
내 삶과 관련해서 전태일 재단을 맡아 일하는 것이 내 생의 마지막일이다. 공공연하게 얘기하지만 앞으로 50주기까지만 최선을 다해 일하겠다. 시대의 어려움,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을 위해 일을 하자는 것이다.

민주노총위원장, 민주노동당 최고위원 등 어려운 자리를 맡아 수배와 수감 등 여러 고초를 겪었지만 이 이사장은 참으로 온건하다. 기자가 전교조 태동시부터 그의 이름을 기사에 올리며 봐왔던 그의 평상시 말투나 표정, 걸음걸이, 손동작 등에서 느껴지는 품격은 투쟁현장의 '날선 것'과는 거리가 있는 비투쟁적인 모습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여전히 용산참사현장을 비롯 ‘쌍용차’ 등 ‘동지’들의 힘든 투쟁 현장에서 늘 앞장서며 현장을 지켜온 사람이다.

고 이소선 여사가 남긴 글 한 토막에서 이수호 이사장의 인간적인 면모를 여실히 엿볼 수 있다.

“이수호는 칭찬을 한다고 해서 오만하지 않고 비판을 한다고 해서 도망가지 않는 사람이다. 자리를 차지하려고 바둥거리지 않고, 낮고 궃은 자리라 해서 피하지 않는 사람이다. 사람이 있는 곳에 사랑의 마음을 갖고 찾아가고......<사람을 사랑하는 한결같은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