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비평]임금 피크제, 만연한 형식주의 틀을 깰 수 있을까
[문화비평]임금 피크제, 만연한 형식주의 틀을 깰 수 있을까
  • 탁계석 예술비평가회장
  • 승인 2015.10.18 23:1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임금 피크제 예술 문화계에 적용은 어떻게 해야 하나
▲탁계석 예술비평가회장

군사 정권시절의 에피소드하나. 대통령이 군대 사열을 온다고 하니 논에 있는 벼를 파다가 끊어서 잔디처럼 심었다 한다. 순간을 위한 눈속임이다.

공직사회에 임금 피크제 도입이 임박하면서 갑론을박이다. 일 못하는 공무원에게는 업무평가를 해 불이익을 주는 것으로 오세훈 전 서울 시장 때부터 시행 해온 제도다.

우리사회에 정년보장, 철밥통, 복지부동, 무사안일 등 공직사회를 조롱하는 듯한 말이 최근엔 세월호, 메르스 사태를 거치며 관피아로 낙점을 찍었다. 공직사회에 만연한 방만한 구조를 혁신하지 않고서는 창조경제로 갈 수 없다는데 공감하지 않는 이가 있을까. 

그러나 개혁에 공감하지만 틀을 깨는 것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오죽하면 정부혁신처까지 만들었지만 성과를 피부로 느끼는 단계는 아닌 것 같다.

범위를 크게 좁혀 예술계, 문화계에 임금 피크제가 적용될 수 있을까. 성과 측정 자체가 모호한 예술의 특성상 능력과 비능력을 가름하는 것이 만만치 않은 일이다.

또 성과 보다 과정이 더 중요하고, 실패를 해도 가치가 있는 것들이 더 많기에 잘못 하면 경직되고 막느라 소통이 더 멀어질 수 있다. 효과에만 치중하면 본질을 훼손할 위험이 더 크다.

이중직 막고 현장 중심의 능력이 발휘되는 환경 조성해야
‘예술은 그저 가만히 내벼려 두는 것이 최상’이란 말이 그래서 나온다.  간섭할 수록 ‘관제품’이 나올 뿐  예술의 상황은 나아지지 않는다.

한번 단원이 되면 하자가 없는 한 평생 고용이 보장된 전국 국, 공립합창단과 오케스트라에 임금 피크제를 적용해도 마찬가지다.

세계 최고의 악단인 베를린필이나 빈필은  거의 단원 이동이 없다. 여러 명문 오케스트라의 사정도 다르지 않다. 움직임이 없는 악단이 일급 악단인데 의도적으로 잘라 가며 육성하는 것일까 하지만 우리는 업그레이드를 통해 성장해야 하는 때다.

공무원 시스템은 시끄러운 것을 가장 싫어하기에 모두가 무사안일에 빠지고 만다. 무용단의 경우 실버무용단이란 말이 나오고 합창단은 암기력과 춤, 연기를 못해 민간합창단의 열기에도 밀린다.

일자리 찾는 신진 음악가들은 높은 기량에도 ‘거리 음악회’이거나 ‘문화가 있는 날’ 콘서트에라도 적응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예술가는 준비가 되어 있는데 정책이 없어 높은 예술 가치를 구현할 수 없다면 명품이 주는 사회적 기능을 잃게 되는 것이니 안타까운 일이다. 

전문성, 창의성 잃은 문화융성은 포퓰리즘의 확대 일뿐
해법은 무엇인가. 첫째, 공공 오케스트라, 합창단, 오페라단이 실적을 위해 과다한 행사성 공연을 줄여 양보다 질적 수준을 높이는데 전력했으면 한다. 특히 새로운 창작을 만드는데 집중했으면 한다. 이로써 민간단체의 밥그릇 까지 뺏지 않아야 한다,

둘째, 교수의 과다한 현장 투입을 막아야 한다. 자기 자리를 비워 두고 현장 자리까지 넘보지 않아도 좋을 만큼 현장 예술이 더 확실하다. 지휘자의 이중직도 제한해야 한다.

셋째, 공공의 부설기관을 만들어 준 단원제 같은 형식으로 인력을 수용해 지역 순회 등에 활용하면 일자리를 늘릴 수 있다.

넷째, 정부 각종 기금 프로젝트에 공공 예술단체는 참여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다섯째, 현 정부 들어 뮤지컬과 대중음악 편중이 두드러진데 균형을 잡아 주어야 한다. 정부가 K-Pop을 해외 문화원을 중심으로 하면서 정작 K-Opera 등 고급문화에 대한 투자 계획을 볼 수가 없다.

여섯째, 각종 자문회의에 전문가를 푸대접하고 요식행위에 그치고 있다. 10만원 수준의 자문비로 전문가를 초청하는 것 자체가 사람을 존중하는 태도라 할 수 없다. 신문고나 국가인권위원회에 민원을 호소해도 다시 해당 부처로 이관되는  ‘도로묵 시스템’ 도 국가혁신처가 개선해야 할 부분이다.

우리 예술 한차원 높여 국제 경쟁력 확보해야 할 때 
예술가는 작업에 열중할 뿐 사회 제도를 바꾸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 그러는 사이 세계 음악계와 당당한 교류를 할 타이밍을 놓치고 있다.

자료용 사진만 확보해 서류의 문제만 없으면 되는 형식문화가 도처에 늘려 있지만 누구도 못을 빼려하지 않는다. 전문성과 창의성을 잃어버린 문화융성은 포퓰리즘 확대일 뿐 뿌리가 되는 성장의 문화는 아니다.

자율성 보다 더 큰 힘없어, 좋은 혁신 바이러스 개발해야
앞서의 예처럼 ‘벼를 잘라 잔디’를 만드는 군대식 발상이나 헬리콥터에서 전단 살포하듯이 하는 돈 뿌리는 문화로 갈팡질팡한다면 혼돈이 야기된다.

십 수 년 씩 유학을 하고 돌아와서 전공을 버리고 전업(轉業) 하는 안타까운 눈물을 닦아 주려면 무엇보다 공공의 겸손이 전제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 어떤 정책도 사람의 마음이 정직하지 않고서는, 그릇이 반듯하지 않고서는 담을 수가 없다. 제도가 제도를 낳고, 제도가 꼼수를 낳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것도 정직한 자세여야 가능하다.

자율의 힘이 가장 강한 힘임을 믿는 사회는 그래서 형식으로 포장된 것을 뛰어 넘는 눈을 가진 사람을 찾는 것에서부터 출발하지 않으면 안된다. 거대 공직사회를 혁신할 메르스보다 강력한 낡은 외투를 벗기는 ‘햇살 바이러스’를 찾아 나서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