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수의 무용평론]정영두의 푸가-음악과 춤의 변증법
[이근수의 무용평론]정영두의 푸가-음악과 춤의 변증법
  • 이근수 무용평론가/경희대 명예교수
  • 승인 2015.10.20 2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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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수 무용평론가/경희대 명예교수

형체를 얻은 시가 그림이라면 춤은 몸으로 표현되는 음악이라 할 수 있다. 음향효과만을 사용하는 춤이 간혹 있긴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음악 없는 춤을 상상하긴 어렵다.

춤이 주가 되어 음악이 단순히 춤의 배경이 될 수도 있고 음악 위주로 춤이 배경으로만 사용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푸가’(10.9~11, LG아트센터)를 안무하면서 정영두는 춤과 음악 사이에 어떠한 관계를 염두에 두었을까. 양자 간에 주종관계를 설정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푸가의 기법(the Art of Fugue)’을 틀어놓고 박자와 음정과 음률에 맞는 동작을 찾아내려고 고심했다면 음악이 주는 영감을 바탕으로 새로운 형식의 춤이 창조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음악이 춤의 정신이 되고 춤이 음악의 몸체가 되어 음악과 춤이 동등한 위치에서 서로를 느끼며 서로를 즐길 때 관객과 청중의 즐거움도 극대화된다. 객석에 앉아 무용수들의 춤을 보면서 추리해낸 음악은 과연 푸가의 기법을 재생할 수 있었을까.

‘푸가’는 11개 단락으로 구성되어 있다. 짧게는 3분 길게는 15분까지로 짜인 각 단락은 독립적이면서도 서로가 연결되어 70분의 대작을 완성해낸다. 이들은 각각 솔로와 듀오, 3인무, 5인무, 7인 군무까지 다양한 춤들로 구성되어 있다. 푸가음악의 형식이 1개의 악기로부터 7종 혹은 그 이상의 악기에 이르는 다양한 편성이 가능하다는 의미를 보여주는 듯하다.

잠자듯이 느린 춤으로부터 부드럽고 서정적인 춤을 거쳐 말달리듯 빠른 동작까지 무용수들의 춤은 변화무쌍하다. 자장가처럼 낮은 선율은 물론 아다지오음악과 알레그로까지를 포함할 수 있는 푸가음악의 폭넓은 표현력을 시사한다고 할 수 있겠다. 춤을 출 때는 군무진의 어느 누구도 튀어나지 않는다.

주역과 조역의 구분 없이 모든 출연자들이 동등하게 자기의 춤을 추도록 한 안무에서 푸가음악의 작곡형식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춤사위는 발레동작을 기본으로 시작되면서도 반복과 변형을 되풀이하며 현대무용의 자유로운 표현의지를 살려낸다. 이러한 방법 역시 대위법을 기본으로 변주된 반복을 되풀이하는 푸가음악의 특징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무대 뒷벽에 기하학적무늬의 장방형 장식이 나란히 내려져 있다. 악보 혹은 건반을 상징하는 듯하다. 검은 머리에 검정색 의상이 산뜻한 무용수들은 악보에 그려지는 검정색 음표 혹은 서로 다른 소리를 내는 악기다. 부분 조명이 악보 앞에서 춤추는 무용수들을 따라 이동해갈 때 오르간 건반 위에서 손가락이 움직이듯 음악소리가 들려온다.

침묵으로 시작되어 소리를 불러내는 가운데 보여지는 춤사위가 청결하고 섬세하다. 한 개의 동작이 하나의 소리를 표현하듯 빠르고 경쾌한 몸놀림 속에 절제가 있고 클래식의 형식성과 컨템퍼러리의 자유성을 융합하고자 한 정교한 안무가 돋보인다.

일곱 출연자 중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인 김지영은 명실 공히 한국을 대표하는 발레리나고 엄재용은 유니버설발레단 수석무용수다. 동아무용콩쿠르 출신의 윤전일은 국립발레단 주역 및 솔리스트로 활동하던 발레리노다. 이들과 호흡을 맞추는 김지혜와 최용승은 각각 프랑스 리옹국립무용원과 벨기에의 안느 테레사 무용학교(PARTS)에서 현대무용을 익힌 유망주들이고 도황주와 하미라는 한예종 졸업 후 국내외 무대에서 활발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신세대 춤꾼들이다.

이들 기라성같은 무용수들을 조합하여 ‘푸가의 기법’을 시각화한 정영두(1974~ )는 국내보다 해외에서 잘 알려진 안무가다. 한예종 창작과를 졸업하고 LG 아트센터 상주단체인 '두 현대무용단'의 예술 감독과 일본 릿교대학 특임교수를 겸하고 있다. 전작인 ‘제7의 인간’(2010), ‘먼저 생각하는 자-프로메테우스의 불’(2012)을 잇는 신작 ‘푸가’로 예리한 무용의식과 세밀한 안무력을 확인시켜준 것이 반갑다.

‘푸가’는 컨템퍼러리란 미명아래 춤이 사라진 무대에서 퍼포먼스에 열중하고 있는 요즈음의 현대무용풍토에 선명한 충격을 던져준 춤 위주의 공연이었다. 바흐 탄생 250주년 기념작으로 만들어져 브누아 드 라당스 최고안무상을 수상한 나초 두아토의 ‘멀티플리시티(Multiplicity, 2014.4, LG 아트센터)’와도 비교되는 작품이다. 무용수들이 각각 음표가 되어 오선지를 장식하던 피날레장면이 정영두의 작품과 오버랩 되어 떠오른다.

그러나 나초 두아토가 ‘푸가의 기법 BWV 1080’을 포함한 다양한 음악을 가지고 바흐의 일생을 조명함에 그쳤던 것에 비해 정영두는 바흐로 대표되는 푸가음악의 직접적인 시각화에 성공했다는 면에서 작품의 완성도와 깊이를 평가할 수 있다. 두 편의 작품 중 나는 음악과 춤의 변증법을 풀어낸 ‘푸가’에 방점을 찍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