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왕기철 명창] “시대 반영하는 소리 필요, 시대를 아우르는 소리 만들고파”
[인터뷰-왕기철 명창] “시대 반영하는 소리 필요, 시대를 아우르는 소리 만들고파”
  • 인터뷰·정리/이은영 편집국장·박정환 칼럼니스트
  • 승인 2015.11.04 0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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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님에 대한 회한 사무쳐, 내년엔 어머님의 사랑으로 무대 만들겠다

예술가는 무대, 또는 자신이 몸 담고 있는 세계의 중심의 중심이 되고자 끊임없이 힘을 쏟는다.
국악인 왕기철 명창은 여는 국악인들과는 조금 다른 길을 걸어왔다. 초등학교 시절 노래를 잘해서 담임선생님이 “너는 커서 가수가 되라”라는 권유를 받고 가슴이 떨렸다.

8남매나 되는 형제들을 건사하느라 고생하는 어머니를 위해  ‘돈을 많이 버는 공장장이 되겠다’는 꿈을 접고 16살에 소리를 위해 서울로 올라온다. 그 세월이 벌써 40년이다.

그는 한양대 국악과를 졸업한 첫 학사 소리꾼으로 13년간 서울국악예고 교사 생활을 했다. 그러나 타고난 소리꾼으로서 무대에 대한 갈망은 그를 정년까지 놔두지 않았다. 1999년 국립창극단에 입단 후 전주대사습에서 장원을 하면서 소리꾼으로서의 확실한 자리를 굳혔다.

이후 14년간 국립창극단에서 동생인 왕기석 명창과 주거니 받거니 많은 무대를 서왔던 그는 재 작년 다시 모교로 돌아가 후배들을 가르치고 있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텐데, 그는 나름의 의미를 되새겼다. 그가 오는 11월 13일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그의 40년 소리에 한 매듭을 짓는 ‘명창 왕기철의 소리인생’ 공연을 올린다. 이번 공연은 특별히 소외 계층과 다문화, 탈북자에게 우리 국악 판소리의 전통을 들려주고 싶은 바람을 담아 이들을 대거 초청했다.

우리 전통예술이 가장 빛을 발하는 대목은 '악가무'가 함께 어우러질 때다. 그의 40년 소리의 원숙한 무대는 소리와 장단, 춤의 향연으로 이어진다. 그야말로 악가무의 입체적인 무대로 이름을 걸고 관객과 만난다.

최근에 그를 후원하는 모임까지 생겼다하니 개인 왕기철을 떠나 국악계에 있어 참으로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다. 공연 준비에 한창인 그를 광화문 근처에서 만나 그의 소리인생 40년의 소회를 들어봤다.

 

► 국악인 왕기철 명창

전통문화에 더욱 많은 기여를 해야겠다는 책임감, 소외 계층과 다문화, 탈북자들에게 국악 판소리의 전통을 들려주고 파.
-국악인생 40주년을 맞아 큰 판을 펼치는데 소회가 많을 듯하다.

“40년이라는 국악 인생이 참으로 뜻 깊다. 고(故) 향사 박귀희 명창이 남자 제자를 구할 때였다. 당시 16살이었다. 시골에서 서울로 올라와 국악과 인연을 맺었다. 40년 국악 인생을 살펴보니 창극과 판소리라는 분야에 한 이력을 담당했는가를 되돌아보게 된다.전통문화에 더욱 많은 기여를 해야겠다는 책임감도 든다.

내 이름을 걸고 공연을 한다는 건 어릴 적부터 꿈꿔온 것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다. 소외 계층과 다문화, 탈북자에게 우리 국악 판소리의 전통을 들려주고 싶은 바람이 크다. 우리 문화를, 판소리를 통해 제대로 들려주면 그분들은 전통 음악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지고 우리 국민으로서의 자부심이 함양되리라고 생각한다.

-공연은 어떻게 구성됐는지 궁금하다.
"쑥대머리를 할 땐 살풀이하듯이 뒤에서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번 소리와 춤의 향연에서는 임방울 선생님의 오리지널 방식 쑥대머리를 창작 무용으로 선보일 예정이다. 쑥대머리가 끝난 후에는 춘향의 억울함을 살풀이로 표현한다. 남도 민요는 여자가 많이 부르지만 남자가 부른다는 것도 특징이다. 창극과 판소리, 무용이 한데 어울려 입체적으로 구성된 ‘입체창’이다.”

-국립극장이 한태숙 연출을 초빙해서 올린 공연 가운데 ‘장화 홍련’ 도창을 맡았다. 소리를 비트는 바람에 연주자들이 어려움이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새로운 장르에 대한 도전이기도 했을 텐데.
“국립창극단의 정체성은 전통적인 창극을 바탕으로 공연을 기획하는 것이다. 지금도 전통적인 바탕에 창작적인 요소를 가미하는 식으로 공연한다. ‘장화 홍련’뿐만 아니라 ‘김구’ 등 국립창극단의 창작물에 출연해왔다. ‘장화 홍련’에서 도창할 때에는 기존의 소리와는 전혀 다른 소리를 내야 했다. 목을 쓰는 방법과 표현하는 방법이 달랐다. 도창은 목소리를 눌러서 발성해야 한다. 목을 관리하는 것이 어렵다.원래 도창은 극과 극을 연결하는 역할이다. 한데 당시 ‘장화 홍련’ 도창은 기존의 도창과는 다른 새로운 시도였다. 극과 극을 연결하며 끌어오는 역할과 함께 개입해서 전체적으로 극을 조정해야 하는 역할까지 감당해야 하는 쉽지 않은 역할이었다. 목소리를 조절하는 게 어렵기는 했지만 당시 도창 역할이 기존의 고정관념을 깨는 역할이라 도전할 만하다고 생각했다.”

-향사 박귀희 선생을 비롯한 여러 스승에게 사사를 했다. 박동진 선생의 생전에 ‘예수가’를 창작판소리를 만들었다. 특이하게 왕 명창도 천주교 미사의식을 판소리에 실은 공연을 지난 2004년에 연 것이 눈에 띈다. 박동진 명창에게도 사사했나?
“박동진 선생께 사사하지는 않았는데, 우연히 그렇게 된 것 같다. 원래는 천주교의 본산인 바티칸에 가서 판소리를 하고 싶은 바람이 있었다. 미사를 하는 가운데서 판소리를 하면 좋겠다는 생각에 11년 전에 열었다. 미사를 드릴 때의 여러 상황이 판소리 중 심청가에서 곽씨부인이 죽었을 때의 느낌과 비슷하겠다는 느낌이 있었다. 미사 내용도 판소리와 가깝게 느껴졌기에 미사 판소리가 인상 깊었다. 당시 부른 판소리는 직접 만들었다. 미사를 판소리로 기획해서 천주교 신자로 생각하기 쉬운데 천주교 신자가 아니다. 지금도 종교가 없다. 명동성당에서 미사에 판소리를 결합한 공연을 열었는데 당시 평화방송으로 방영되기도 했다. 천주교인은 교리 등 일정 부분의 시험을 치뤄야 세례명을 받을 수 있다. 그런데 당시 세례명을 받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는데 받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니 세례명을 받지 않은 게 약간 후회되기는 하다.”

국립창극단에 십 년 이상 있으면서 쌓은 국악과 판소리의 노하우를 알리기 위해 고등학교 교

► 그는 지난 40년 간의 국악인생을 담은 공연을 오는 13일 국립극장 달오름 극장에서 펼친다

단으로 돌아가.

-원래 소리를 했지만 무대로 가기보다 교육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가 국립창극단에서 오래 몸담고, 다시 모교로 돌아갔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텐데.
“서울국악예술고등학교에 13년 2개월 동안 재직했다. 6~7년 전에 국립으로 전환돼 지금은 국립전통예술고등학교로 명칭이 바뀌었다. 99년에 국립극장으로 들어가서 14년 8개월을 재직했다. 그러다가 15년 만에 국립전통예술고등학교로 가서 현재 예술부장을 맡고 있다.

국립창극단에 십 년 이상 있으면서 쌓은 국악과 판소리의 노하우를 후배들에게 가르쳐 주고 싶은 바람이 생겨서 고등학교 교단으로 돌아간 거다. 대개는 국립 단체에 소속되어 있다가 교수로 가는 코스가 정석이다. 많은 이들이 ‘교수로 가면 모를까, 왜 교사의 길을 다시 걷나’ 하고 의아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더 늦기 전에 학교에 가서 후학들에게 희망을 주고 싶었다.

그동안 열심히 쌓아온 창극적인 무대, 소리의 깊이를 후배들에게 물려주고 싶었다. 아내와 자녀들은 다시 학교로 돌아간다고 했을 때 말렸다. 예술가가 가고자 하는 최종 목표 가운데 하나가 국립 단체에 소속되는 것이다. ‘아빠, 요즘 교사 힘들어, 뭐 하러 고생을 사서 해? 그냥 국립에 있어’ 하는 반응이었다."

-창극단에 몸담으면서 많은 작품들을 한 이후 다시 학교로 돌아갔는데, 학생들에게는 굉장한 행운일 듯도 하다.(웃음)
"국립전통예술고등학교에 2013년 9월 발령 받자마자 가장 먼저 한 것이 창극을 가르치는 일이었다. 부임하기 전에는 학생들이 창극할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았다. 부임한 이듬해 열린 예술제에 ‘심청전’을 올리고 올해는 서편제를 모티브로 한 ‘아리랑’을 올렸다. 학생들은 물론이고 학부모도 좋아했다.”

-작고한 형인 왕기창 명창을 비롯하여 삼형제(기창-기철-기석)가 모두 뛰어난 명창이다. 특히 동생인 왕기석 명창과는 창극단에서 같이 활동하며 선의의 경쟁을 많이 했다. 이에 대한 얘기를 들려 달라.
“8남매 중 아들 여섯 가운데서 기창 형님 덕분에 저랑 동생이 국악에 입문할 수 있었다. 형님은 꽃을 피우지 못하고 작고했다. 저랑 동생이 형님이 못다 이룬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전주대사습놀이에서 형제 명창은 우리가 유일하다. 저는 2001년, 동생은 2005년에 대통령상을 받았다. 전주 MBC가 주관한 판소리 명창 서바이벌 광대전에서 제가 2012년, 동생이 2013년에 연이어 우승했다. 형제들이 우리 소리를 통해 복을 많이 받았다고 생각한다.”

-국악은 형이 먼저 시작했지만 형이 교편을 잡는 동안 동생 왕기석 명창이 무대에 먼저 올랐다. 무대에서만큼은 형과 동생이 1번 주자와 2번 주자를 다툰다.
“무대에 오를 때에는 형과 동생의 구분이 무의미해진다. 선의의 경쟁자가 된다. 형은 형대로, 동생은 동생대로 최고의 예술을 무대에서 보여주려고 노력한다. 생각 외로 동생에게 배울 점이 많았다. 교사할 동안 연기를 배울 시간이 없었다. 내가 교사하는 동안에 동생은 무대에 많이 올라 경험이 풍부했다. 동생의 연기를 유심히 관찰하면서 동생이 하는 연기를 많이 따라했다. 하지만 동생의 연기를 무조건 카피캣 하지만은 않았다. 동생의 연기를 ‘제 것’으로 만드는 게 중요했으니까. 형제간의 선의의 경쟁은 무대 설 때마다 하는 것이고, 영원히 경쟁하는 거다. ‘형이니까 무대에서 조금 못할게’ 할 수 없는 것이 무대의 세계다. 그럼에도 ‘내가 형인데’ 하고 마음의 양보는 항상 갖는다. 제 딸과 동생 딸이 아버지의 대를 이어 소리의 길을 걷는데, 이 또한 행복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 왕기철 명창 (현 국립전통예술고등학교 예술부장)

-한 국악계 선생님은 전통예술이 벌어지는 판 중 특히 ‘소리판’은 민중의 소리를 담아내는 미래지향적 소통의 무대라 했다. 수많은 무대에 섰는데 관객과 나의 관계 설정은 어떻게 하나?
“관객과 함께 한다는 점에 있어서 판소리, 우리 공연은 최고의 공연이다. 공연하는 사람만 두각 되어서는 관객이 행복할 수 없다. 현장성이 강한 예술이 소리판이다. 관객에게 한 마디 던질 때마다 반응이 즉각 온다. 관객과 소리꾼은 나눠진 게 아니라 하나라는 심정으로 매번 공연하기에 제 공연을 찾은 관객이 유독 저를 기억해준다. 관객과 소통하는 무대의 장을 만들고 싶다.”

판소리는 어렵다는 선입견이 깨질 수 있는 공연, 그리고 대중적인 장르에 우리 것을 섞는 시도가 필요해.
-앞으로 국악계가 나아갈 방향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다.

“대중은 우리 것이 고리타분하다는 선입견을 갖는 게 안타깝다. 그렇다면 대중이 우리 것을 찾아와서 보게끔 만들어야 한다. 국악 판을 고리타분하게 생각하는 이라고 해도 한 번만 보면 우리 것이 이렇게나 좋구나 하는 새로움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판소리는 어렵다는 선입견이 깨질 수 있도록 공연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고, 대중적인 장르에 우리 것을 섞는 시도도 필요하다. 내년에 콘서트를 한다면 국악을 바탕으로 한 가요, 부모에 대한 감사한 마음을 표현하는 공연을 만들어보고 싶다. 인생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국악 공연도 중요하다. 남자들이 퇴직하면 갈 곳이 없다. 등산하기 바쁘다. 이런 분들에게 비전을 줄 수 있는, 시대에 필요한 창극을 하는 게 중요하다. 그래야 우리 소리가 생명력이 더해진다.아버지가 5살에 돌아가셔서 아버지 사랑을 받지 못했다. 어머니는 없는 살림에 8남매를 굶기지 않으려고 외상으로 쌀을 미리 가져다가 자식들에게 먹였다. 그리고는 남의 일을 해서 자식들을 먹여 살렸다. 어머니의 사랑이 하도 커서 어머니 이야기만 나오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그는 어머니 얘기가 나오자 눈시울이 금새 붉어져 금방이라도 또르르 눈물이 떨어질 것 같았다)

-어머님이 아들들이 국악계에서 성공한 것을 보고 가셨나.
"그러지 못해서 가슴이 너무 아프다. 그래서 호남 쪽에 갈 일이 있으면 꼭 어머니 산소에 들러서 ‘감사합니다’라는 인사를 드린다. 부모님에게 감사하다는 메시지를 공연 가운데서 전하고 싶은 바람이 있다. 이번에 공연할 때도 2부에 부모에 대한 감사를 표현하고 싶었는데 생각처럼 가사가 나오지 않아서 시도하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다.”

-앞으로의 계획이 있다면.
“매년 공연하고 싶고, 제 공연을 찾는 관객이 어려운 상황을 힐링할 수 있다면 더없는 영광일 것이다. 관객의 근심과 걱정, 스트레스를 후련하게 날릴 수 있는 공연을 지속적으로 선보이고 싶다.”


왕기철 명창

△1963년 전북 정읍 출생
△1985년 한양대 국악과 졸업
△1985∼1998년 서울국악예술학교 교사
△1991∼1999년 전남대, 전북대, 한양대, 한국예술종합학교 등 강사
△1999년∼2013.8 국립중앙극장 창극단원
△2003년∼2004년 중앙대 강사
△2004년 3월∼2006년 전주 MBC TV ‘얼쑤 우리가락’ MC
△2013.9~ 현재 국립전통예술고등학교 예술부장

△2001년 전주대사습놀이 판소리부 장원
△2002년 KBS 국악대상수상
△2012전주MBC주최 판소리명창 서바이벌 “광대전”우승
△2013 서울문화투데이 문화대상 최우수상 국악부문 수상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심청가’ 이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