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적 권리’와 역사교과서
‘문화적 권리’와 역사교과서
  • ▲이지원(대림대학교 교수,역사학)
  • 승인 2015.11.05 23:0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지원(대림대학교 교수,역사학)

  이 가을, 역사교과서가 교실 밖으로 나와 사상 초유의 주목을 받고 있다. 주목의 화살은 정부와 여당에서 쏘아 올렸다.

그 내용은 7개의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를 ‘좌편향’이라 이념의 잣대로 ‘단죄’하고, 중학교 《역사》와 고등학교의 《한국사》 과목의 교과서를 정부가 만드는 하나의 국정교과서로 하겠다는 것이다.

그것도 보통 3~4년 걸리는 교과서 집필 제작과정보다 훨씬 짧은 1년 만에 만들어 2017년부터 학교 교실에서 사용하겠다고 한다.

 정부와 여당이 ‘좌편향’이라고 말하는 검정 교과서들은 불법적으로 만들어진 교과서들이 아니다. 교육부가 정한 세밀한 <집필기준>에 따라 집필, 수정하여 검정을 통과한 교과서들이다.

검정 기준을 통과한 역사교과서들이 ‘좌편향’이라고 한다면, 정부의 <집필기준>도 좌편향이었고, 또 교과서 검정 업무를 맡았던 교육부는 좌편향의 직무유기를 한 것이 된다. 그러나 정부와 집권여당은 마치 교육부 없이 역사교과서가 불법으로 만들어진 것처럼 코스프레하며, 잘못을 바로잡아 ‘올바른 교과서’를 만들겠다고 한다.

그리고 본디 학문적 엄정성으로 자기검열이 심한 역사학계를 90%가 좌파라고 매도하고, ’국정 찬성=우파, 국정 반대=좌파’ 라는 이념프레임으로 국민을 편 가르고 있다. 그것도 미래 세대들의 교육을 볼모삼아서.

 역사를 배운다는 것은 단순한 사실(facts) 암기가 아니라 인과관계를 생각하여 인간 삶의 이치와 가치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history의 어원이 된 ‘historia’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그리스의 역사학자 Herodotus는 역사를 ‘탐구에서 얻어진 진리’라고 하였다.

그리고 공자는 《춘추》라는 책에서 일 년을 춘하추동으로 나누어 역사를 기록하여 시간과 함께 벌어지는 인간의 삶을 생각하고 평가하게 하였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동서양 모두 역사라는 말이 생긴 이래 지난 2,500여년 동안 역사학의 유용성이 인정되었던 것이고, 근대 국가 성립 이후에는 시민을 위한 교육에서 역사과목이 중요하게 취급되어 온 것이다. 역사학은 인간의 사고력, 인간다움을 위한 문화적 자산이며, 역사교육을 받는 것은 국민 권리의 핵심인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유엔에서는 역사교육과 역사교과서를 세계 각국 시민들의 ‘문화적 권리’ 차원에서 정의하고, 문화의 다양성, 창의성을 위하여 각 국가에 ‘하나의 역사교과서’는 사용하지 말라고 권고하였다.

2013년 10월 제 68차 유엔총회에서 채택한  <역사교과서와 역사교육>에 대한 유엔인권위원회 문화적 권리분야 특별보고서에 의하면, 분열되거나 갈등을 겪은 사회에서 역사교육은 화해, 평화, 인권 신장의 중요한 축이라는 것, 역사교육은 교육 받을 권리의 중심에 있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이 보고서는 역사학과 역사교육이 비판적 사고를 촉진하고, 다양한 관점과 해석을 수용할 것과 민주주의와 인권의 관점에서 학생들에게 다양한 사료와 다양한 방법론, 그리고 비판적 사고와 역사해석의 다양성 등을 제공할 것을 제시하고 있다.

또한 이 보고서는 국가가 학교에서 단일한 역사교육과 역사교과서를 강요하는 것은 국제인권규약과 유엔 아동권리협약의 ‘문화적 유산에 접근할 권리’ ‘교육받을 권리’ ‘표현의 자유에 근거해 정보와 지식에 접근하고 이를 전달할 수 있는 권리’ 그리고 ‘과학의 진보 및 응용으로부터 이익을 향유할 권리’를 침해함으로써 인권의 관점에서 문제가 있고, 의사표현과 학문의 자유를 제약함으로써 민주주의를 손상시킨다는 것을 명시하고 있다.

 한국 정부는 기회 있을 때마다 세계화와 ‘글로벌 스탠다드’를 외치지만, 역사 교과서 편찬제도 만은 국제적 기준에 역행하고 있고, 국제적 논의 수준에도 한참 모자란다. 국가가 정하는 하나의 역사교과서 제도는 분명 국제적 기준에도 맞지 않고, 시대 역행적이며 학생들의 문화적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다.

광복 70년, 한국은 어려움 속에서도 산업화와 민주화에 성공하였고, 한국의 문화적 역동성은 지구촌 사람들에게 감동을 안겨주어 한류를 탄생시킨 국격(國格)을 자랑하고 있다. 그 영광에 걸맞게 어떻게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것이 국제적 기준을 따르고, 다양성과 창의성이 꽃피는 문화강국, 대한민국이 되는 길인지 답은 이미 나와 있다.

그 답을 외면하고 정부와 여당은 역사교과서를 거리로 내몰고, 역사의 시계를 돌려 ’문화적 권리’ 후진국의 길을 가려하고 있다. 안타깝고 서글픈 분노에 이 가을 유독 마음이 아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