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수의 미술시장 이야기] 예술가_감정을 만드는 사람들
[박정수의 미술시장 이야기] 예술가_감정을 만드는 사람들
  • 박정수 미술평론가/정수화랑 대표
  • 승인 2015.11.06 00:5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박정수 미술평론가/정수화랑 대표

인간의 역사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혹은 볼 수 있다고, 보고 있다고 믿거나 증명하거나 설득하면서 진화해 왔다. 단순히 집단 간의 규합인 사회성만으로 발전해 온 것만은 아니다.

종교 시대에는 특정한 이들만 신들을 볼 수 있었고, 그들을 통해야만 신과의 대화가 가능하였다. 특정한 이들이 아닌 보통사람이 신의 목소리를 듣거나 신을 보게 되면 마녀라 칭하면서 처형하기도 하였다. 

밤하늘의 별을 보고 길흉화복(吉凶禍福)을 점치기도 했다.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별빛의 별은 지구에서 수백광년 떨어진 곳에 존재한다.

우리는 말 그대로 수백 년 전의 빛을 보고 있다. 지금 지구에 도달한 빛의 그별이 십수 년 전에 폭발한 위성일 수 있다는 가설이 가능해진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밤하늘의 별은 이미 사라진 별의 빛을 보고 있는 존재하지 않는 별의 빛일 수 있다. 존재하지도 않는 별을 보고 미래를 점치기도 한다는 의미가 된다.

이것은 ‘가설을 믿지 않겠다’던 뉴튼의 실험과학과 상통한다. 물체와 물체사이에 어떤 매개체 없이 상호 인력이 작용한다는 당시의 주장은 종교의 역사와 인간의 역사를 다시 쓰게 만들었다. 데카르트의 인식론은 계몽주의에서 힘을 발하고 인간 스스로의 감정을 인정하는 시대로의 전환을 맞는다.

인상주의자들에 의해 신의 영역이 인간의 영역으로 전이되었다. 인장주의자들이 그리고자 했던 빛은 태초의 하나님의 영역이었음은 두말한 나위 없다. 자신의 귀를 자른 고흐는 힘들게 사는 자신의 감정을 표현함으로서 인간의 감정을 드러내기 시작한 시조가 되었다.  

인류의 역사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함으로서 진화와 발전을 거듭한다. 지극히 추상적 개념인 시간을 시계를 통해 정리하였지만 시간이라는 개념은 여전히 모호하고 추상적이다. 군대간 남자친구를 기다리는 여성의 시간과 군 생활 하는 이의 시간 속도는 현격히 다름을 이해하고 있다. 여기에서 예술은 인간의 다양한 감정과 사회의 각층이 지니고 있는 생각과 이념을 시각적으로 보여주기 시작한다. 그러다 보니 예술가는 결국 감정을 만드는 사람들의 영역에 속할 수밖에 없다.

작품활동을 하는 젊은 예술인들에게 작은 감정조차 놓치지 말라고 권한다. 본인은 잘 그러하지도 못하면서 일상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감정들을 그림으로 기록하라 말한다. 첫 키스의 감정과 헤어진 이성친구와 술기운에 행하는 키스의 감정은 다르다. 모양도 다르고 색도 다르다. 보통사람은 감정을 통합하며 살아가지만 예술가는 감정을 세분화 하면서 살아간다. 그래서 예술가의 삶을 고통이며 힘듦의 연속이다. 

에스키스(esquisse)는 보이지 않는 감정이나 어떤 상태를 밑그림으로 삼는 것이고, 크로키(croquis)는 어떤 물건이나 움직임 있는 사물을 빠르게 그리는 일이다. 미술을 하는 이라면 끊임없는 에스키스와 크로키가 있어야 함은 당연하다. 쉽게 스쳐 지나가는 감정들을 그때그때 기록해 두어야 한다.

예술가들의 삶이 고난하고, 이성과 가정에 대한 관점이 다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싫고 좋음의 문제가 아니가 그것을 이해하고 작품으로 재현해야 하는 사회적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사막에 홀로 버려진 경험이 없어도 다른 영역을 통해 인지하게 하는 것이 곧 예술의 기초영역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새로운 감정에서 출발한다.

다 알고 있는 것을 작품으로 재작하면 재현이라고 말한다. 보통사람들 대화에서도 감정없는 호응과 대답이 있듯이 미술작품에서도 감정 없는 재현이 많다. 사람들이 체념자와 달관자를 구별하지 못하듯 새로운 감정이 있는 작품과 영혼 없는 재현 작품을 잘 구별하지 못한다. 그러나 미래와 역사는 알고 있다. 예술작품은 이미 사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