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수의 무용칼럼]예술로 풀어낸 과학, ‘해변의 아인슈타인-4막의 오페라’
[이근수의 무용칼럼]예술로 풀어낸 과학, ‘해변의 아인슈타인-4막의 오페라’
  • 이근수(무용평론가, 경희대명예교수)
  • 승인 2015.11.18 2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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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수 무용평론가/경희대 교수

1976년 아비뇽 페스티벌 초연이후 2012년의 재제작을 거쳐 미주와 유럽, 일본, 호주 등 온 세계를 순회한 ‘해변의 아인슈타인-4막의 오페라’가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의 개막공연으로 광주를 찾아왔다.

한시적 작품으로 제작된 것이기에 광주공연을 마지막으로 폐기된다고 한다.  뉴튼의 고전물리학과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을 넘어 양자역학의 불확정성원리가 일반화되어 있는 시대에 아인슈타인의 혁신성을 소재로 한 작품이 진부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무대에 등장한 증기기관차, 우주선을 탄 사람들, 원자폭탄 작동원리에 대한 설명 등이 그러한 느낌을 뒷받침해준다. 40년 전에 제작된 작품이니 그럴 만도 하지만 이 작품이 20세기 최고의 융합작품으로 평가받는다는 사실이나 지금도 충분히 즐길 만 하다는 사실엔 변함이 없다. 새벽 KTX를 타고 광주에 내려가 4시간 반(270분)의 공연을 보고 밤차로 돌아왔다. 나 같은 관객이 많은 모양이다. 국립아시아문화의전당 예술극장의 587개 좌석이 공연 내내 만석이 되었다고 한다.

‘해변의 아인슈타인-4막의 오페라’(10.23~25)는 시각이미지와 연극, 춤과 음악회에 덧붙여 아인슈타인의 사상까지가 한 무대에 응축된 거창한 공연이다. 연극은 출연자의 대사 없이 내레이션으로 진행되고 춤은 군무로만 추어진다. 음악회는 바이올린과 색소폰 독주, 독창과 합창이 골고루 섞이고 영상은 해변과 숲의 자연풍경과 도시 건축물 등을 그림처럼 보여준다.

남녀노소 피부색을 가리지 않는 40여명 출연자 들이 오케스트라 석과 무대, 공중을 이동하며 자기의 역할에 열중할 때 거대한 오케스트라가 완성된다. 음악과 시(lyric)는 필립 글라스(Philip Glass), 감독과 조명, 무대장치는 로버트 윌슨(Robert Wilson)이, 안무와 대사는 루신다 차일즈(Lucinda Childs)가 분담해서 맡았다. 하나같이 각 분야에서 당대 최고로 손꼽히는 전위적인 융합형 예술가들이다.

시작은 연극형식이다. 상수에 자리 잡은 남녀가 무언가를 토론하면서 막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무대 아래에 서있는 사람들은 돌림노래처럼 도레미파솔과 1,2,3,4,5를 반복하여 부르고 있다. 그믐달이 뜬 어두운 바닷가, 파도가 철썩이는 해변을 걷는 사람들의 그림자와 무대에 설치된 실물크기 증기기관차의 이미지가 어두웠던 산업시대를 떠올려준다.

재판관이 좌정한 법정에 사람들이 줄지어 앉아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는?...파리...’, ‘인간은 모두 평등하다(All men are equal). 그러면 여자는....?’, ‘땅이 움직이는가?’ 쉬지 않고 들려오는 나직한 대사들은 근대의 법정에서 다루어지던 고전적인 주제들을 떠올려준다. 무대장치들은 19세기말의 사회상을 보여주면서 인간과 과학에 대해 아인슈타인이 품었던 사상들을 대변할 것이다. 장면과 장면을 음악이 연결한다. 돌출된 무대 앞 쪽에 앉은 흰머리의 바이올리니스트는 아인슈타인의 외모를 닮았다. 

2부는 춤이다. 간편한 흰 옷의 무용수들이 자유롭게 등장하여 몸을 푸는 듯 가볍게 무대를 누빈다. 루신다 차일즈의 춤사위는 바흐의 푸가음악과 같이 단순하고 반복적이다. 팔과 다리를 번갈아 들어 올리며 앞으로 나아가다가 회전하는 기본적인 동작이 위주가 된다. 8명 무용수들이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고 동작은 한결같다. 자유롭고 경쾌한 춤사위가 거듭되는 동안 복잡하던 무대는 휴식을 찾은 듯 편안해진다. 다음엔 그림이다. 기차의 맨 뒤 칸 출입문밖에 한 쌍의 남녀가 말없이 서있다.

검은 연미복의 성악가와 정장한 귀부인이다. 광속으로 달리는 기차는 정지해 있는 듯하다. 푸른 달빛을 받으며 안개 속에 차갑게 드러나는 이미지는 한 폭의 신비한 풍경화다. 작품 속에서 아인슈타인의 시간은 거꾸로 흘러간다. 하늘에 뜬 그믐달이 하현달로, 하현달은 보름달로 되돌아가고 벽에 매달린 시계바늘은 거꾸로 돈다. 빛보다 빠른 속도라면 시간을 되돌릴 수 있을 것이다.

시간과 빛과 공간은 아인슈타인이 완성한 일반상대성원리의 핵심요소다. 빛기둥과 달, 음악의 박자는 시간의 흐름을 보여주고 기차와 법정, 우주선, 원자탄 등 오브제들은 빛의 작용을 보여준다. 바다와 숲, 도시는 이러한 오브제를 담고 있는 공간과 자연풍경이다.

과학과 숫자로만 설명될 수 있던 난해한 물리적 원리를 음악과 연기와 춤과 영상이란 예술적 수단을 총동원해 풀어낸 것이 놀랍다. 로버트 윌슨이 아니면 재현할 수 없는 이 작품의 탁월한 가치일 것이다.

그러나 더욱 가치 있는 것은 공원벤치에서 나누는 연인간의 마지막 대화, “How much do you love me?",”Kiss me John" 대답을 대신하는 깊은 입맞춤이 과학과 인류의 미래에 대한 낙관을 은유하는 명장면으로 기억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