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정의 발레인사이트]예술가의 덕목은 관점 혹은 태도로부터-노틀담의 꼽추
[김순정의 발레인사이트]예술가의 덕목은 관점 혹은 태도로부터-노틀담의 꼽추
  • 김순정(성신여대 무용예술학과교수)
  • 승인 2015.12.02 16:2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순정 성신여대  무용예술학과교수/발레리나

살다 보면, 생각이 변화하는 결정적인 순간을 만나게 된다. 국립발레단 25주년 기념공연 <노틀담의 꼽추>를 상연한 1987년, 일본의 이시다 다네오를 안무가로 초청했다. 그리고 <노틀담의 꼽추>의 주인공 에스메랄다를 맡은 나는 대혼란을 겪게 되었다.

게이오대학 미학과 출신인 이시다 다네오는 이제까지 보아온 무용인들과 분위기부터 사뭇 달랐다. 말이 별로 없었기에 그의 눈빛과 행동, 한마디 한마디에 더 집중하게 만들었다.

임성남 단장은 “관객에게 최고의 수준을 보여 줄 의무”가 있다며 5일간의 공연을 싱글캐스트로 결정했다. 모든 단원의 오전 연습은 10시에 시작되었다. 오후에는 꼬르드 발레(군무진)부터 연습을 시켜 일찍 보내고 다음에는 솔리스트, 마지막으로 주역만 남겨 밤늦게까지 리허설이 계속되었다.

이시다 다네오는 오랜 시간 리허설을 진행하면서도 전혀 피곤한 기색이나 흐트러짐이 없었다. 생전 처음해보는 곡예에 가까운 고도의 기교들은 내게 심각한 부상을 안겨주었고 침과 진통제로 버티며 연습과 리허설, 공연을 감내해야 했었다.

▲노틀담의 꼽추(1987) 에서주인공 에스메랄다 역을 맡은필자

그러나  <노틀담의 꼽추>를 통해, 나는 심각한 육체의 고통도 잊을 정도로 발레에 대한 새로운 비전을 갖게 되었다.

1997년 재공연시에는 트리플캐스트로 스투트가르트발레단의 강수진, 바가노바학교를 졸업하고 돌아 온 김지영, 국립발레단 주역 최경은이 에스메랄다 역을, 이원국, 김용걸, 강준하 등 당대 걸출한 3대 발레리노들이 콰지모도로 출연했다.

나는 에스메랄다의 어머니 아그네스역을 맡게 되어 감사하게도 이시다 다네오와 기쁜 10년 만의 해후를 하게 되었다.

에스메랄다는 갓난아기 때 유괴되어 집시로 키워진 여인이다. 사제인 프롤로가 그녀를 사랑하지만, 에스메랄다는 자신을 구출해 준 경비대장 페뷔스를 잊지 못한다. 꼽추 콰지모도는 생전 처음 자신을 따뜻하게 대해준 에스메랄다를 연모하게 된다.

위기의 순간 콰지모도가 에스메랄다의 목숨을 구해주지만, 페뷔스가 다른 여인과 약혼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녀는 살인미수라는 죄명을 그대로 인정하고 형장의 이슬이 되기를 원한다. 자신의 말을 들으면 살려주겠다는 프롤로의 제안도 거절한다.

1막의 마지막, 종의 추를 상징하는 긴 줄을 타고 무대 좌우를 오가며 절규하는 콰지모도의 모습은 잊혀지지 않는 명장면이다. 또한 에필로그에서 산자와 죽은 자들이 모두 오케스트라 피트부터 무대로 걸어 들어가며 서로 얽히다가 일제히 관객을 돌아다보는 강력한 무언의 메시지는 압권이었다.

장치와 조명 또한 기품있는 한 편의 그림을 보는 듯했으며 이 작품으로 발레가 인간에게 얼마나 깊은 울림을 줄 수 있는 예술인지 깨달았다.  

▲노틀담의 꼽추-브로셔 앞면과 뒷면(좌우).뒷면에 당시 안무를 맡은 이시다 다네오의 사인이 보인다.

오래 된 고전발레로 1844년 초연된 <에스메랄다>가 있다. 체자르 푸니의 음악, 쥴 페로의 안무였다. 지젤로 유명한 카를로타 그릿지가 에스메랄다, 쥴 페로가 시인 그렌과르, 코펠리아를 안무하기도 한 생 레옹이 페뷔스역을 맡았다.

모스크바 유학시절 전막 <에스메랄다>를 스타니슬라브스키극장에서 보게 되었다. 이시다 다네오가 늘 얘기했던 작품이다. “나라면 다르게 만들겠다”라며 젊은 안무가 이시다를 고취시킨  발레 <에스메랄다>는 고상하고 아름다웠으나 진부했다. 유명한 롤랑 프티의 <노틀담의 꼽추> 작품을 내가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 이유와도 비슷한 듯 하다.

연극성이 강하고 유미주의적 전통이 살아있는 원조 <에스메랄다>보다, 이시다 다네오의 창의적이며 생각할 여지를 던져주는 <노틀담의 꼽추>가 나에게는 더욱 감동적이었다. <노틀담의 꼽추>에는 기존 발레가 보여주지 못한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과 연민이 배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