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종이 이야기
[특별기고] 종이 이야기
  • 심우성 전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민속사학자
  • 승인 2015.12.28 14:4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심우성 전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민속사학자

우리나라에서 만든 종이를 지금은 한지(韓紙)라 하는데, ‘해방(1954)’ 전까지는 「조선종이」라 했었다.

한지(韓紙)란 개항 이후 서양에서 도입 된 ‘서양종이’ 즉 양지(洋紙)와 대비되는 개년으로서, ‘담나무 껍질’로 만든 우리나라 종이의 근년 호칭이라 하겠다.

한지(韓紙)는 중국의 화지(華紙)와 일본의 왜지(倭紙)와는 달리, 닥나무 껍질을 주로 사용하는 데에 그 특징이 있다.

종이라는 말은 바로 ‘닥나무 껍질’인 저피(楮皮)에 어원을 두고 저피→조희→종이로 변화했다는 지적은 닥나무 껍질을 주재료로 하는 ‘한지’의 특성을 가장 적절하게 대변해 주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종이가 발명되기 까지는 크게 두 가지 계기에서 비롯된다.

먼저 인류는 언어를 표시하기 위한 도구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꼈고, 다음으로는 종이 이전에 이미 죽간(竹簡)과 목독(木牘)이라는 기록의 전달매체를 갖고 있었는데, 이들 ‘죽간’과 ‘목간’은 사용의 불편함이 항상 수반되고 있었다. 결국 이러한 절실한 필요성과 불편함이 종이를 만들게 된 주된 요인으로 작용한 것이겠다.

중국 후한시대(AD105년) 채윤은 종이제조방법을 혁신 하였다.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언제부터 종이를 만들어 사용하였는지 지금까지는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몇가지 주변기록들을 통하여 우리나라 ‘한지’의 역사를 추정해 볼 수 있겠다.

백제 근초고왕(346~375) 때, 논어 10권과 천자문 1권을 가지고, 일본에 건너가 일본왕의 태자 ‘토도치랑자’의 스승이 되고, 왕의 요청에 의해 군신들에게 경·사(經·史)를 가르쳤다는 ‘완인박사’에 관한 일본서기(日本書紀)와 고사기(古事紀)의 기록은 주목되는 자료들이다.

또한 근초고왕 30년(서기 374) “고기(古記)에 이르기를 백제는 개국 이래, 아직 문자로 사실을 기록함이 없더니 이에 이르러 박사 고흥(高興)을 얻어 비로서 서기(書記)를 갖게 되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 역시 종이와 관련지어 생각해 볼 수 있는 내용이라 하겠다.

이들 기록은 물론 종이를 직접 만들었었다는 내용은 아니지만 경사서(經史書)의 일본전파와 서기(書記)의 존재는 종이의 내용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이보다 시기적으로 늦지만 「일본서기」에 고구려 승 ‘담징’이 610년(고구려 영양왕 21)에 백제를 거쳐 일본에 건너가 채색과 종이·먹·연자방아 등의 제작방법을 전했다는 기록에서 우리나라 한지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즉 일본에 제지술을 전하였다는 사실은 국내 제지술의 수준을 말해주는 것이다.

사실 한지에 관한 기록은 ‘고대 사료’에서는 전무한 실정이고, 또한 현존하는 실물도 극히 제한되어 있어 한지의 역사를 제대로 엮어 낼 수가 없다. 지금까지 밝혀진 자료 가운데, 가장 오래된 실물자료는 불국사 석가탑에서 발견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이다.

이 경문의 조성연대에 대하여 몇몇 이론이 있으니(706년, 751년설) 불국사의 대규모 중창연대와 관련하여 751년설을 따른다 하더라도 지구상에 현존하는 최고의 목판인쇄물이고, 우리나라에서는 최고의 지류 문화재이다.

경문은 폭 6.5~6.7com, 각행의 글자 수를 7-9자로 새긴 닥종이 12장을 이어붙인 두루마리이며, 총 길이 620cm에 달하는 소형목판권자본(小形木板卷子本)이다.

한편 ‘무구정광대다라니경’과 함께 제지사에 한 획을 긋는 새로운 자료는 신화 경덕왕(742-765) 13년인 서기 755년에 제작된 백지묵서화엄경(白紙墨書華嚴經)이다. 이 사경(寫經)은 백지 30매를 연결한 길이 14m, 폭 29cm의 두루마리이다.

경문은 붓으로 직접 쓴 것으로 제작 년대, 발원자, 사경수축, 의식, 지작과정과 사경의 분업 등을 발문(跋文)에 밝히고 있어 당시 신라문화를 이해하는데 귀중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특히 종이를 만든 사람과 지역을 명시하고 있는 점은 이례적인 일로서 제지사 연구에 더 없이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결국 위의 두 사례는 한지가 얼마나 오랫동안 보존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내구력의 한계를 확인시켜 주었다. 신라시대에 들어와서 더욱 일상화된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고려시대는 특히 전시대와 달리 수공업의 진전이 이루어진 시기이다.

「고려사」 식화지(食貨志)에 의하면 고려시대에는 10개의 수공업관청에 61개의 업종이 각기 분산되어 있었다. 그 가운데 지장(紙匠)은 중상서에 소속되어 있었다.

한편 지방관청에 지전(紙田)이라는 공해전을 설치하여 거기에서 들어오는 수입으로 종이·먹·붓 등을 구입하여 쓰도록 했었는데 이러한 사실은 수공업의 세분화와 상품생산을 전제로 한 민간수공업의 광범위한 확산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특히‘문종’연간에는 양반관료들을 대상으로 도서의 출판과 판매를 취급하는 관영서점을 설치하였는데 이는 인쇄물과 제지술의 향상된 기술을 토대로 가능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인쇄술과 제지술의 발달은 곧바로 많은 양의 종이를 필요로 하게 된다. 그래서 인종 23년(1145)에는 전국적으로 닥나무 재배를 권장하고 제지업을 민간에 적극 권장하기도 하였다.

인쇄술은 종이·활자주조·조각 등 인접분야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대규모로 발달하기 시작한 목판인쇄술과 고려의 금속활자는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인쇄술의 그늘에 가려 이제까지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했던 한지도 고려시대에 이르러 비로소 인정을 받게 된다.

송나라 사신으로 고려를 다녀간 ‘서긍’은 송도에 1개월 남짓 체류하는 동안 주변지역에서 보고 느낀 바를 언급하면서 “종이는 전혀 닥나무만을 써서 만들지 않고 등나무를 간간이 섞어 만들되, 다듬이질을 하여 매끈하며 좋고 낮은 것의 등급이 있다”고 하였다.

비록 후대의 기록이긴 하지만 명나라 도융(屠隆)은 고려지에 대해서 “견면(견면)으로 만들었으며, 빛은 희고 비단 같다. 단단하고 질기기가 비단과 같으며, 여기에 글씨를 쓰면 먹빛이 아름다운데 이것은 중국에서 나지 않기 때문에 진기한 물품이다”라고 극찬하고 있다.

고려시대에 한지의 수요가 양적으로 증가하게 된 것은 국가에서 주도한 대대적인 불경의 간행 사업 때문이다. 국초부터 거란·여진·몽고 등 북방민족의 잦은 외침은 국가의 가장 큰 과제였다. 현종 10년(1014)부터 선종 4년(1087)까지 근 60년 동안 대장경 6000권을 주조하여 현화사에 봉안하는 불경간행사업이 이루어 진 것은 대표적인 예이다.

뿐만 아니라 대장경의 보완사업이라 할 수 있는 ‘의천’의 속장경 간행과 강도(江都)에서의 최 씨 정권의 ‘대장경조판’ 사업도 그간에 축척된 제지술과 인쇄술의 발전을 토대로 가능할 수 있었다.

제지수공업은 조선시대 각종 수공업 가운데 가장 발달된 부문의 하나였다. 국가기관에서는 중앙에 ‘관영조지서’를 설치하였다. 조지서는 처음 서울 창의문(彰義門) 밖 장의사동(현재의 세검정)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설치의 직접적인 동기는 폐지되었던 저화법의 부활에 따른 양질의 저화지(櫡貨紙)와 외교문서 용지인 표전자문지(表箋咨文紙)의 생산을 위해서였다. 조지서(造紙署)는 태종 15년(1415)에 처음 조지소(造紙所)로 출발하여 세조 11년(1465)에 조지서로 개칭되었다. 

 이미 고려시대에 그 질적인 우수성을 인정받은 한지는 조선시대에 이르러 더욱 양적인 팽창을 가져오게 된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함경도를 제외한 전국에서 닥나무가 생산되고 있었다. 닥나무의 생산이 곧바로 종이의 생산과 연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한지의 생산지역 역시 전국에 걸쳐 있고, 경공장과 외공장에 소속된 지장인이 다른 수공업종에 비하여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어 제지업의 중요성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제지업은 분업화가 잘 이루어진 분야이기도 하다. 오늘날까지 한지 생산으로 유명한 전주와 남원 등지에는 최고 23명, 밀양에는 17명, 광주에는 19명의 지장을 배치한 사실은 한지생산이 분업으로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한지의 수요가 조선시대에 이르러 급격한 성장을 보게 된 데에는 세종의 문화정책에 따른 서적의 간행에 힙입은 바 크다. 실록의 편찬·지지류의 집성 및 법정과 농서·의학서의 간행사업은 조선 전시기를 통해 세종때 가장 활발하였다.

이와 같이 활발한 서적간행 사업은 다량의 제지원료를 필요로 하였고, 또 외국의 기술을 습득하는 일에도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부족한 닥나무를 보충하기 위하여 종자를 개량하고 짚·보리집·죽피(竹皮)·겨릅 등 대체지료를 개발하려는 노력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 시기에 나타난 것이 이른바 잡초지이다. 그러나 잡초지는 인쇄용으로는 사용되지 못하고 상용지(常用紙)로서 일반에 널리 사용되었다. 또 종이의 종류와 품질에 따라 용도가 엄격히 구별되어 있었는데 특히 표지(表紙)와 후지(厚紙)는 민간에서 함부로 사용하지 못하게 하였다. 

조선후기는 전기에 비해 한지 생산이 침체의 국면을 맞게 된다. 그것은 양란으로 인한 제지시설의 파손과 지장들의 분산이 제지생산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것이다. 가장 시급한 것은 국가에서 사용하는 종이와 청나라 측의 요구에 따른 외교용 조공품의 조달이 우선과제였다.

이와 같이 부족한 지물은 당시 주요 산지였던 하삼도(下三道)에 분점하여 해결하였고, 외교용 ‘표전자문지’는 별공(別貢)으로 대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수요에 따른 생산량이 뒷받침되지 못하자 사찰에 역을 부과하거나 저가를 매매하여 부족한 물량을 충당하게 되었는데 종래 자급자족에 그치던 사찰은 이제 국가의 중요 생산지가 된 것이다. 사찰에 대한 지나친 지역(紙役)과 저가매매는 사재(寺財)의 저하를 가져오게 하였다.

조선후기 실학자들도 우리나라 종이에 대해서 질기다는 데에는 이론이 없지만 생산자와 생산지역에 따라 크기가 제각기 달라 책을 만들 때 불필요하게 소비되는 부분이 많았고, 또한 섬세하지 못하고 무거우며 털이 많이 일어난다는 단점을 지적하기도 하였다.

조선 태종 15년(1415)에 관설 제지소로 출발한 조지서는 형식적이나마 조선후기 탕진시키고, 승려의 도망을 야기했다. 특히 조선 후기에 들어서 지물의 과부족사태는 ‘대동법’의 시행으로 인해 저전(楮田)이 곡식을 심는 땅으로 전환되어 지료(紙料) 생산이 어렵게 된데 그 원인이 있었다.

조선후기의 제지 수공업은 ‘조지서’와 사찰에서 그 맥락을 유지하여 왔지만 지나친 조공지의 보충과 과도한 지역은 지장의 생산의욕을 침체시켜 한지의 질까지 그 맥을 이어 오다가 고종 19년(1882)에 폐지되었다. 

삼국시대 이래 약 1천년 이상 지속되어 왔던 한지는 국가의 중요 수공업으로서의 위치를 차지하면서 매 시기마다 발전과 우여곡절을 거듭해 왔다.

그러다 1884년 서양식 종이와 근대화된 인쇄술이 도입됨에 따라 전통 ‘한지’는 점차 설자리를 잃게 되었다. 현재까지 명맥은 유지되고 있지만 수요층이 제한되어 ‘한지’의 장래는 불투명한 실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