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정의 발레인사이트] 몸짓의 언어만으로 승부를 걸 수 있는 용기 - 잠자는 미녀(Sleeping Beauty)
[김순정의 발레인사이트] 몸짓의 언어만으로 승부를 걸 수 있는 용기 - 잠자는 미녀(Sleeping Beauty)
  • 김순정(성신여대 무용예술학과교수)
  • 승인 2015.12.29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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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정 성신여대  무용예술학과교수/발레리나

<잠자는 미녀>의 오로라 공주는 물레 바늘에 찔려 100년간의 깊은 잠에 빠져버린다. 연말이 되어 더욱 분주해지는 요즘이면, 오로라처럼 포근하게 잠에 빠지는 것도 좋겠다는 실없는 상상을 하게 된다.

<잠자는 미녀>는 마녀가 오로라 공주를 잠재우고, 100년 뒤 라일락요정의 안내를 받은 데지레 (혹은 플로리문드) 왕자가 입맞춤으로 공주를 깨우고 성대한 결혼을 올린다는 지극히 단순한 이야기구조다.

그럼에도 쉽게 무대에 올리기 어려운 초대형 발레작품이다. 무용수만 100여명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마침 국립발레단이 2016년에 차이코프스키의 3대 발레 걸작 중 하나인 <잠자는 미녀>를 상연하기에 특히 기대가 된다.

연보라색 클래식 튀튀(tutu,망사로 만든 짧은 길이의 발레의상)를 입은 라일락요정은 국립발레단 신입단원 시절인 1983년 맡았던 솔로작품이었다. 라일락요정을 출 때면 정말 봄의 라일락 향기를 맡는 것 같은 설렘과 행복함을 느끼곤 했다.

당시 장충동 국립극장의 꼭대기에 위치한 발레연습실에는 봄의 남산을 휘감는 향기로운 바람이 창으로 들어오곤 했다. 아쉽게도 갈라(Gala) 공연이라 악의 요정 카라보스와 기를 겨루는 경험은 못했지만 위기마다 나타나 분위기를 화사하게 전환시켜주는 라일락요정은 거부할 수 없는 밝은 에너지를 주는 존재임을 확실하게 느꼈다.

▲<잠자는 미녀> 속 '오로라'를 러시아 키로프발레단 가브리엘라 꼼레바가 연기하는 모습을 담은 엽서

하지만 나는 기회가 된다면 <잠자는 미녀>의 카라보스 역을 하고 싶었다. 착오인지, 고의인지 카라보스는 공주의 탄생축하 파티 초대명단에 빠져있었다. 분노한 카라보스는 공주의 16세 생일 파티에 나타난다. 그리고는 무섭기도 하지만 익살스럽게도 오로라공주와 파티장의 모든 이들을 100년 동안 모조리 잠들어 버리게 한다.

고전발레의 우아미를 일거에 깨버리는 그(녀)의 등장은 뭔가 속 시원한 쾌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형식에 맞춘 춤 사이로 불협화음의 박자와 몸짓으로 평온했던 현재의 세계를 갑자기 뒤흔들어버리는 카라보스 역은 의외로 고전발레의 심볼이라 할 수 있는 영국 로열발레단의 안소니 도웰이 멋지게 소화해내었다.

원작자인 샤를 페로는 선과 악을 가진 두 요정을 통해 우리 안의 두 가지 면을 바라볼 수 있게 해 준다. 우리 안에는 늘 둘이 공존하기 때문이다. 오로라공주를 살리고 죽이는 것이 결국 두 요정의 화합과 대립의 결과라는 것이 핵심이 아닐까.

데지레 왕자의 등장은 2막에 들어가서다. 환영 속의 오로라를 본 왕자는 그 뒤를 쫓아 잠들었던 그녀를 깨워낸다. 그리고는 대단원의 3막 결혼식을 위한 디베르티스망(내용보다는 춤을 더 많이 보여주기 위해 넣은 구성)이 벌어진다.

1890년 3월 1일 뻬쩨르부르크의 마린스키극장에서 마리우스 프티파 안무로 초연된 <잠자는 미녀>에서 이탈리아인 엔리코 체케티는 3막의 파랑새 역을 맡아 추었으며 제2 발레마스터로 일하게 되었다. 2년 뒤부터는 부속 발레학교의 교사로서 바가노바, 프레오브라젠스카야, 크셰신스카야, 안나 파블로바, 미하일 포킨, 니진스키 등 발레역사상 뛰어난 무용가들을 대거 배출해낸다. <잠자는 미녀>의 3막에 나오는 왕자와 공주의 그랑 파드뒤(남녀 주인공들이 함께 추는 아다지오, 각 각의 솔로, 함께 추는 코다로 구성되는 2인무)는 안무가인 마리우스 프티파가 말년에 추구했던 완전한 형식미를 갖춘 순수한 무용 쪽에 가깝다.

<잠자는 미녀>에서도 보이듯, 발레는 순수한 무용과 극 사이를 오가며 발전해왔다. 로즈 아다지오, 보석들의 춤, 파랑새 2인무 등 몸짓의 언어가 주는 힘을 믿으며 정직하게 승부를 걸었던 위대한 발레예술가들에게 경의를 표하며 올 겨울이 가기 전에 무르만스크 항으로 가서 내 눈으로 직접 오로라의 황홀을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