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현구의 음악칼럼]베토벤, 자유 그리고 왜곡된 진실
[정현구의 음악칼럼]베토벤, 자유 그리고 왜곡된 진실
  • 정현구 국제문화개발연구원 부원장/ 코리아 네오 심포
  • 승인 2015.12.29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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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현구 국제문화개발연구원 부원장/ 코리아 네오 심포니오케스트라 음악감독

해마다 연말이 되면 여기저기에서 베토벤의 교향곡 제9번 “환희의 송가”가 연주된다. 이 곡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일까? 베토벤 그 사람은……

편협하고 자기중심적이고 극단적이며 괴팍한 인물의 대명사처럼 사람들의 머릿속을 장악하고 있는 그 사람 베토벤이 들려주는 환희의 송가에 사람들은 박수를 보낸다.

이것은 무엇인가 논리에 맞지 않는 상황이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라는 정의를 내려 이에 수긍하는 그 사람들이 자기중심적인 사람이 들려주는 음악에 보내는 박수라니……

루트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은 1770년 본(Bonn)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거기에서 막시밀리안(Maximilian)선제후 성당에서 테너로 일하였다. 막시밀리안은 그의 형, 오스트리아의 전제군주이자 볼테르와 백과사전파의 생각을 따르던 개혁적인 요제프 2세를 닮아 진보적인 생각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루트비히는 훨씬 넓어진 지적 자유와 생가의 교류, 진보적 독서 클럽으로 이루어진 문화적 환경에서 성장해 갔다. 그가 속해있던 독서 클럽은 궁정이 후원하는 것이었는데 극단적인 사고를 가진 포럼이 되었고, 베토벤이 다닌 대학은 칸트의 철학을 가르치는 곳이었다. 베토벤은 모차르트와 같은 비범한 천재는 아니었지만, 그 재능이 일찍부터 발현되어 14세에 궁정 오르가니스트가 되었다. 3년 후 그는 궁정 오케스트라에서 비올라 파트를 맡았고 모차르트의 오페라들을 연주하였다. 이러한 오케스트라의 경험이 베토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전기 자료들이 밝혀주는 바에 의하면 베토벤은 사람들과 잘 지냈고 궁정 음악가 외의 사람들과도 친구로 지냈다고 한다. 특히 대학과 독서 클럽에 친구들이 있었다. 음악적인 면으로 보자면 그가 작곡하였던 것 중에 특별히 극단적인 것은 없었다. 그저 장난기가 있어 놀래키는 것을 좋아하는 성향이 있었을 뿐이다. 심하게 부딪히는 불협화음, 예상치 못하였던 리듬 등은 하이든의 질풍노도시기를 닮았다.

그러나 1793년 빈으로 이주하면서 정치적 조건들이 달라졌다. 요제프 2세의 후계자 프란츠(Franz는 민주라는 단여에 대하여 병적인 공포를 가지고 있었고 요제프 시대의 선정은 압제로 돌아섰다. 정치범으로 생을 마치는 사람들에 대한 공감의 깊이가 공공연히 <피델리오>에서 표현되어 있다. 수감자들의 함창, 귀족 포로, 반동적인 관료들은 모두 1790년대의 탄압에서부터 소재를 가져온 것이다.

정치적 탄압의 시대상과 더불어 찾아 온 귀의 이상, 작곡가와 피아니스트로 동시에 성공적인 길을 걷고 있다는 인정을 받는 것이 20세 남짓 밖에 되지 않은 남자에게 흔한 일이 아니니, 망연자실함과 성격의 변화는 당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과연 어떤 음악가가 귀가 안 들리기 시작하는데 겁을 먹지 않을 수 있으며, 성격에 변화를 가져오지 않을 수 있을까? 슈만과 스메타나는 정신병원에서 최후를 맞았다.

베토벤은 그의 중요한 후기 작품들에서 몇 번씩이나 본에서 작곡한 성악 작품들의 재료를 사용하였다. 그 이유는 그저 좋은 모티브를 버리기가 아까워서가 아니라 그 주제들이 가지고 있는 것이 그가 본의 인텔리겐치아들과 학교를 다니던 시절에 생각하던 사상들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그 시기에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다.

괴테의 <자유인(Der Freie Mann)>에 붙인 당시의 곡의 첫 몇 마디는 교향곡 제5번의 마지막 악장 시작부분이 되었으며, 이는 피아노 협주곡 제5번의 시작부분에서 또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요제프 황제의 장례식을 위한 칸타타>에 나오는 재료는 피델리오에서 다시 사용되는데 원래 가사는 ‘그렇다면 모든 인류는 일어나 빛을 향하여 가자’라고 돼있다.

서로의 사랑을 노래한 뷔르거(Bürger)의 시는 <코랄 판타지>의 주제가 되었는데 쿠프너(Kufner)의 그저 그런, 음악과 음악의 힘에 대한 찬양의 시가 되었다. 다시 이 주제는 교향곡 제9번의 주제가 되었고, 거기에서는 쉴러의 <환희의 송가>가 되는 것이다. 사실 쉴러는 원래의 제목을 ‘자유의 송가’라고 붙였었다. 그런데 ‘환희의 송가’로 제목을 바꾼 것은 검열 때문에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최소한 검열이 음악은 관여하지 못하리.’ - 시인 그릴파르처(Grillparzer)가 옮긴 베토벤의 노트에 쓰여 있었던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