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계석의 예술비평] 비상착륙에 성공한 서울시향 최수열 지휘자에게 객석은 기립 박수
[탁계석의 예술비평] 비상착륙에 성공한 서울시향 최수열 지휘자에게 객석은 기립 박수
  • 탁계석 예술비평가회장
  • 승인 2016.01.18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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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석은 모두가 심사위원이 된 듯 몰입했다

▲ 탁계석 예술비평가회장

갑작스럽게 1등 조종사가 운행(運行)을 못하게 된 상황에서 수습 기장(機長)이 천둥 비바람을 뚫고 비상착륙에 성공했을 때의 기분이랄까. 객석은 뜨겁게 환호했고 기립 박수로 험준산령의 말러를 넘어 온 최수열 지휘자에게 격려를 보냈다.

정명훈 지휘자의 사퇴로 마치 정전(停電)사태가 온 것 같았던 서울시향이 1차 마감 을 에센바흐가 하고 2차 비상사태에 전격 최지휘자를 투입한 16일 저녁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은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래서인지 합창석까지 가득 메운 청중이 예사롭지 않았다. 그것은 어느 방송사의 복면가왕을 옮겨 놓은 듯 객석 곳곳에서 메모를 하는 심사위원의 모습이었다.

연주전 인터뷰를 통해 ‘불안하다’고 했던 최지휘자는 단원들과 혼연일체가 되어 거의 암보 수준에서 깊고 변화무쌍한 말러 교향곡 제 6번 ‘비극적’ 협곡의 세부와 현란한 작품 기법들에 때론 날카롭게, 때론 당당하게 사인을 날렸다.

한국 오케스트라에 민주화의 봄이 올 것이란 희망
더 이상 절대 카리스마가 아니었다. 단원과 눈으로, 단원과 의기투합한 동심일체의 민주화였다. 그것은 오케스트라에 새 봄이 올 것이란 예감이기도 했다.

피겨의 김연아가 유망주 유영을 보고 “내가 했을 때 보다 더 잘하네요” 인사를 건내듯...  골프 박세리가 나오자 LPGA가 코리아 필드가 된 것처럼, 박찬호 등판 이후가 또 어떠했는가....  순전히 우리 DNA가 갖고 있던 잠재력의 분출이다.

이미 클래식 분야에서도 메트로폴리탄, 빈슈타츠오퍼의 극장 주역 오페라시대가 열렸고, 엊그제 쇼팽 콩쿠르 피아노 조성진, 심지어 작곡에서까지 퀸에리자베드 콩쿨을 연속으로 획득하는 쾌거의 흐름에 있기 때문이다

Ⅲ사실 지휘가 좀 늦었다. 유독 지휘에서 늦게 터진 것이다. 이걸 10년 전에 시도했더라면...., 지금쯤 어땠을까.  필자는 기회 있을 때 마다 ‘새로운 리더십의 지휘자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당장을 기준하지 말고 미래 잠재력에 투자를 해야 할 때라고 말해왔다. 

이제는 ‘세계적’ 이란 환상을 버리고, 그보다는 시스템을 만들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 중에 중요한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현실에 적용시켜야 한다. 합리적인 오케스트라 문법(文法)이 없어 지금도 전국의 공공 오케스트라들은 노조에 발이 묶이고, 행정에 억압받고, 지휘권을 잃은 리더십으로 앓고 있지 않은가. 

서구화 꽁무니만 쫒는 세계화가 아니라 우리 문화의 정체성과 자존심을 만들어가는 것이 중요하다. 물론 ‘세계적’ 목표는 학습 단계에서 절대 필요하지만 실제 유럽 악단 그 누구도 자기들 작품을 어느 수준에서 하느냐?가  관심일 순 없다. 그 보다는 우리 작품을 만들어 세계 음악사에 어떻게 편입(編入)시킬 것인가가 더 주목을 받을 것이다. 우리 것을 만들어 수출하는 패러다임의 변화가 이미 한류를 통해 왔기 때문이다.

▲최수열 서울시향 부지휘자 (사진제공 = 서울시향)

오케스트라 시스템 구축과 한국형 두다멜 만들기 병행해야 
그럼에도 정명훈의 서울시향 10년은 한 단계 도약한 사운드를 구축했다. 무엇보다 시민의 관심과 귀 밝은 젊은 엘리트 청중들을 기른 것은 높이 평가된다. 반면교사로 엄청난 희생을 치루며 존경받는 훌륭한 예술가의 삶과 예술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지의 교훈도 얻었다.

이제부턴 시스템 구축이다.  누가 와도 지휘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예술은 예술 논리로 풀 수 있도록 정치가 개입하거나 행정우월주의가 아니라 오케스트라 예술을  존경하는, 애호가의 시민이 만들어간다는  ‘필하모니(Philharmonie)’의 원형(原形)을 찾아 새로운 출발을 해야 한다. 관주도가 아니라 시민 문화주권이어야 한다.

또 하나,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단원의 자긍심과 단원의 행복이다. 표정이 살아야 시민에게 사랑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느 칼럼에 ‘한국의 두다멜은 어디에 있는가?’ 를 읽었다. 전적으로 공감한 내용으로 시간을 주고 기다리면 우리에게 두다멜은 많이 있을 것이고 정지휘자도 “내가 처음 했을 때 보다 더 잘하네요”라고 말하는 순간이 올 것이다.

지금 클래식에 위가가 왔다고, 문화에 보릿고개가 왔다고 우울해 하는 예술가들이 많다. 어려울 땐 초심으로 돌아가야 하고  그래도 왜, 고통속에서 예술이 존재하는가, 일상(日常)에서 말할 수 없는 기쁨인지를 답해야 한다.

피아니스트 김다솔이 모차르트를 연주하는데 하프가 놓인 무대 끝자락 좌석에 앉아 이를 지켜보는 최수열 지휘자를 보면서 “저기 아침을 몰고 오는 어린 분이 계시다”는 싯귀가 떠올랐다. 우린 큰 것을 잃었지만 그래서 또 큰 것을 얻을 것이란 희망을 본 감동의 콘서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