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박래경 한국큐레이터협회회장] 한국적 정체성과 미의식을 전시로 드러내기 위해 노력한 선구자
[인터뷰/박래경 한국큐레이터협회회장] 한국적 정체성과 미의식을 전시로 드러내기 위해 노력한 선구자
  • 인터뷰-이은영 편집국장/정리-김승용 인턴기자
  • 승인 2016.01.22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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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레이터는 미술 영역 넘어 인간과 세상 문제 모든 것 연결지어 자기사유 심화 확장하는 과정 필요

한국큐레이터 역사의 산증인

‘큐레이터’라는 직업에 조금이라도 관심 있는 이들이라면 알 수밖에 없는 이가 있다. 바로 ‘한국의 1세대큐레이터’ 이자 큐레이터계의 대모라 불리는 박래경이다. 그녀는 일제 강점기와 해방 시기를 거쳐 민주화와 문화다양성으로 이어지는 현재를 살아온 미술평론가이다. 역사를 관통하며 그가 느껴온 성찰들을 그가 기획한 전시에게 엿볼 수 있다.

큐레이터인 그가 학부 때부터 미술을 전공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지만, 그는 서울대 사학과 출신이다. 오히려 역사를 전공했기에 시대를 관통하는 그녀의 통찰력이 돋보이는 것일지 모른다. 서울대 사학과 졸업 후 서독정부학술교류처 장학생으로 독일 뮌헨대에서 미술사 수학 후 한양대에서 응용미술학과 박사를 받았다. 독일 유학경험을 통해 그녀는 독일과 관련된 많은 전시들을 기획하기도 했다. 그녀는 ‘문화 교류’와 ‘한국적 미의식’을 주제로 <독일현대조각전>(1987), <바우하우스전>(1989), <한국 해학의 현대적 변용>(1998), <태극-순환 반전의 고리>(2010) 등의 전시들을 기획했다.

박래경은 독일 유학후 세종대 교수를 거쳐 과천국립현대미술관 개관과 함께 학예연구관(4급상당)으로 초빙됐다. 이후 학예실장을 거치면서 국립현대미술관의 기틀을 닦는데 헌신했다.
현재 미술평론가로서 한국큐레이터협회 명예회장,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후원회 회장, 이인성아트센터 이사장, 한국문화교류연구회 대표를 맡아서 연구자와 실무자들의 교류에도 힘쓰고 있다.

▲ 큐레이터 역사의 산증인 박래경 한국큐레이터협회 명예회장

성숙한 태도 가지고 성실하고 꾸준하게 일해야

‘Ende gut, Alles gut'
그녀가 학생들에게 자주 하는 말이다. 끝이 좋으면 모두 좋다는 뜻의 독일어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처음 일을 시작할 때 들떠서 하지만 금방 식어버리곤 한다. 좋은 끝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성실함과 꾸준함이 필수라고 할 수 있다. 삶의 성찰을 통해 성숙한 태도를 익힌 이들만이 좋은 끝을 볼 수 있다. 박래경은 깊은 성찰이 담긴 자신의 전시를 통해 ‘Ende gut, Alles gut'
의 자세를 보여주고 있다.

박래경 회장에게 지난 해는 특별했다.

정부가 문화예술 발전에 이바지한 이들에게 주는 문화훈장을 받았고, 8월에는 후배들이 뜻을 모아 팔순기념논문 봉정과 팔순 기념 학술세미나를 열어 그가 우리나라 큐레이터계를 위해 노력한 데 대한 화답을 했다.

4개의 기조 발제로 구성된 학술세미나에서는, ‘박래경의 큐레이터 정신’, ‘한국 큐레이터의 어머니’ 등의 주제로 구성됐다. 앞선 주제들을 통해 박래경이라는 원로가 후학을 챙기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후배 큐레이터들과 정신적인 연대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지난해 국립현대미술관장 선임 을 둘러싼 미술계의 문제와 박래경의 삶에 대해 듣는 시간을 가졌다.

-지난 해 정부로부터 보관문화훈장을 받았다. 축하드린다. 문화예술 발전에 이바지한 문화예술인들에게 정부가 수여하는 상인데 좀 늦은 감도 있다.
무대 위에서 특강이나 연설을 할 때는 있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다. 여러 해 집행했다지만, 난 사실 이런 훈장이 있는지도 몰랐다. 어떤 분이 나를 추천하면서 ‘선생님, 늦었지만 이제라도 추천할 수 있어서 마음이 놓입니다’라고 말했다.

-우리나라 큐레이터 1세대라고 할 수 있는데, 당시는 지금보다 더 고착화된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여러 힘든 일이 많았던 걸로 알고 있다. 훈장이 힘들었던 지난 세월에 대한 보상 같은 느낌이 들었을 것 같다.
힘든 순간들을 생각해본다면, 그런 순간들이 날 키워준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순간들을 슬프고 고통스럽다고, 있는 그대로만 보지 않는다. 사실 슬픔 같은 감정은 감당하기도 어렵고 그 자체로 뭔가 해결되지 않는다. 그래서 그런 순간이 오면 그 자체로 보기보다 다른 각도로 바꿔서 본다. 이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 하고 싶은 것들에 대해 생각한다. 이렇게 생각하다 보면 마냥 슬프기만 했던 순간에서 새로운 지점이 보인다.

미술에서도 마찬가지다. 어떤 현상에 대해 있는 그대로 보기보다 다른 각도에서 보다 보면 새로운 지점이 발견되고, 전혀 달라 보이는 것들이 연결되곤 한다. 그렇게 신나는 일거리를 찾곤 한다.

-의식한다고 되는 일은 아니지 않나.
어느새 습관화됐다. 자기 몰입으로부터 나온다. 자기 속에서 자기를 찾아내려는 몰입이 필요하다. 이러한 태도가 결국 미술로 이어진다. 직접 하는 작업이 아니어도, 이런 생각에 대해 후배들에게 말해주곤 한다.

이런 태도가 익숙해지면 세상 어디를 가나 보이는 것들이 모두 재료가 된다. 젊은 큐레이터들이 내 말을 듣고 눈에 뭔가 보이기 시작하고 발견하는 게 있으면 성공이라고 생각한다.

어릴적부터 잦았던 환경변화, 세상과의 소통에 큰 갈망

▲ 작년 문화예술발전유공자 시상식에서 훈장을 받은 박래경 한국큐레이터협회 명예회장

-지난해는 특별한 한 해였을 것 같다. 훈장뿐 아니라 팔순 기념세미나와 논총 봉정식도 있었다. 당시 참여했던 많은 후배가 뭉클함과 찡함을 느꼈다고 한다. 미술인이기 이전에 개인으로의 박래경은 어떤 사람인가.
항상 사람들의 생각이 궁금하다. 사람들과 소통할 장이 별로 없는 세상이라 항상 안타깝게 생각한다.

어릴 적부터 사람들과 안정적 소통을 하기 힘들었다. 초등학교를 네 군데 다니고, 중학교를 두 군데 다니는 등 환경변화가 잦았다. 늘 낯설고 새롭게 출발해야만 했다.

그런 환경 속에서도 미술을 좋아했다. 당연히 미대에 진학하기를 바랐지만, 아버지는 내가 역사를 전공하길 바라셨다. 나는 얌전하게 말을 듣는 아이였기에, 아버지의 말을 따라 역사를 전공하게 됐다.

이러한 배경들이 미술에도 영향을 줬다. 전시를 생각할 때도 항상 변형과 변화 쪽에 관심이 간다. 안정된 어떤가에 대해 설명할 때보다 변화에 대해 설명하려 힘썼다. 변화란 이전의 역사로 알아야 하고, 앞으로 닥칠 미래로 예측해야하는 복잡한 세계이다. 변화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익숙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변화의 세계에 관심이 갔던 것 같다.

-국립현대미술관장을 공모했고, 두 명으로 압축했다. 하지만 후보자들의 자격 미달을 이유로 몇 해 동안 비워두다 스페인 출신 바르토메우 마리가 임명됐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누가 되느냐에 앞서서 가장 큰 문제는 국립현대미술관장 권한의 축소이다. 관장에게 굉장히 중요하고 힘든 일을 준다. 일에 대한 책임은 여전히 큰데, 운신의 폭을 줄여놓는다면 누가 제대로 일을 할 수 있겠는가. 관장의 권한이 컸을 당시에 전횡을 일삼는 이들이 논란이 됐는데, 지금은 관장 권한 축소에 대한 우려를 보인다.

물론 과거처럼 지나친 전횡도 당연히 문제다. 기본적으로 관장에게 주어진 일을 실행하기 위한 권한이 있다. 그런데 권한을 축소하면 기본적인 일조차 해내기 힘들다. 축소하는 이유조차 알 수 없다. 그 이유 중 하나를 법인화라고 말한다. 시스템상으로 보면 이사회 위주로 돌아가고 있고, 장관과 미술관장이 직결돼 있다. 이들은 이사를 선임할 권리를 가지게 되니, 자기 사람들로 이사회를 채울 수도 있다.

누가 관장이 되느냐에 앞서서 시스템상의 문제를 생각해야 한다. 관장에겐 2, 3년가량의 임기가 있다. 축소된 권한으로는 이 임기 내에 무엇인가를 하기 힘들어진다. 그렇게 되면 진취적으로 무엇인가를 하기가 힘들어진다. 단기적으로 뭔가를 바꾸기에는 현실적 어려움이 크다.

국립현대미술관의 깊은 역사가 있다. 그것을 뿌리내려 정착하기보다 잦은 제도 변경을 하고 있다. 법인화가 되면 안정적으로 바뀔 것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서양의 국공립 미술관들의 법인화를 예로 들지만, 우리와는 차이가 있다. 법인화를 운영하는 체제와 기술 자체가 아예 다르다.

▲ 팔순 기념세미나 당시의 박래경 한국큐레이터협회 명예회장

현상에 대한 깊은 통찰, 넓은 시야가 좋은 큐레이터의 덕목

-한국큐레이터협회 명예회장이기도 하고, 큐레이터라는 직업에 대한 애착이 클 것 같다. 큐레이터는 어떤 직업인가.
일단 표면적으로 보이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다. 큐레이터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쫓느라 시간을 뺏기고 자기를 연소시키는 직업이다. 허드렛일을 외에도 하는 일이 많고 복잡하다. 일 자체가 작품을 많이 보고 여러 경험을 통한 깊은 사유를 요구한다. 끈질긴 인내와 고집이 아니면 버티기 힘들다.

다만, 몰입하면 벗어날 수 없는 매력적인 세계가 바로 큐레이터이다. 철학부터 시작해서 많은 분야에 대한 공부가 필요하다. 인간의 삶은 알아서 흘러가는 것 같지만, 모든 것은 시시각각 수많은 변수로 인해 변하고 있다. 당연히 인간이 만든 문화도 변화를 기반으로 발전해나간다. 변화 속에서도 지속적인 의미를 가질 수 있는 내용에 대해 생각하고, 어떤 형식과 무대를 통해 공유할지 고민하는 것이 큐레이터의 역할이다.

단순히 배운 지식으로만 전시한다면 빤한 전시가 된다. 시대를 배격하거나 시대보다 앞장서는 자기해석이들어간 순간, 전시는 새로운 가치를 공유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연결 지어서 생각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미술 내에서뿐만 아니라 다른 분야까지도 연결해 생각해야 한다. 미술의 영역을 넘어서 인간 문제, 세상 문제까지 모든 것을 연결지어 생각하고, 자기사유를 심화시키고 확장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박래경처럼 되길 꿈꾸는 이들이 많다. 그런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나.
특강을 해달라는 후배들이 있다. 그때마다 느끼지만, 나의 다음 세대들이 덜 고생했으면 좋겠다. 진짜 고생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일에 집중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내가 아끼는 이들이기에 그들을 보면 항상 한 마디라도 더 해주고 싶고, 마음이 간다.

팔순기념봉정세미나에서 양정애 발제자의 발표에 따르면, 박래경은 다양한 해외교류전을 펼친 큐레이터이다. 전시전을 기획하면서 박래경은 중요한 원칙을 고수한다. 첫째는 작가와 작품에 대한 철저한 검증이다. 박래경은 현지에서 작품을 직접 보고 선별하고 작가의 아틀리에를 방문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둘째는 학술적인 근거를 바탕으로 균형적인 시각을 유지하는 것으로, 전시의 시각적인 면을 부각하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전시마다 학술행사를 함께 기획해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과 다학제간 연결을 끊임없이 모색했다.

셋째는 전시를 통해 확고한 역사의식과 한국적인 미의 의식을 표출했다는 점이다.

여전히 왕성한 호기심과 상상력, 후배들에게 언제나 귀감이 되는 큐레이터

박래경은 우리나라의 미술사 연구가 일본을 통해 들어왔기 때문에 역사적 고찰이 약하다는 점과, 식민지시대와 전쟁을 겪으며 정착한 큐레이터 제도가 한국적인 문화 안에서 개념을 확립할 시간을 놓쳤다는 점에 대한 문제의식을 놓치지 않고 있었다. 때문에 박래경에 게 있어 과거를 재해석하고 과거의 가치를 다시 발견해 거기에 새로운 생명을 연결하는 일은 큐레이터로서 가장 중요한 과업이었다.

총체적으로 보았을 때 박래경의 전시에는 인류학적이며 민속학적이고 역사학적인 관점을 기반으로 미술사를 바라보는 시각이 담겨 있었다. 더불어 한국적인 정체성과 미의식을 전시로 드러내기 위해 노력한 큐레이터라고 평가할 수 있다. 2003년 더블린에서 확인한 켈트족의 문양을 2010년 태극으로 연결하는 학문적인 호기심과 상상력은 박래경이 25년 동안 큐레이팅 인생을 이끌어오게 만든 원동력이다.

그 시절 그들이 했던 일이 실질적으로 세계화의 한부분이었음을 반문하며, 후학들이 계속해야 하는 중요한 연구라고 당부한다.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고 문화상대적인 관점에서 해석을 시도하고 연구하는 실천적인 모습은 당대의 큐레이터에게 요구되는 중요한 자세이자 본받아야 할 미덕임이 틀림없다.

박래경

1953년 대구 태생, 서울대 사학과 졸업. 서독정부학술교류처 장학생으로 독일 뮌헨대에서 미술사 수학 후 한양대에서 응용미술학과 박사를 받았다. 세종대(전 수도여자사범대)에서 교수로 13년간을 재직하고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학예사와 학예실장으로 10년을 재직했다. 또한, 외교통상부 미술자문위원, 동국대 문화예술대학원 겸임교수를 역임했다.

‘문화 교류’와 ‘한국적 미의식’을 주제로 <독일현대조각전>(1987), <바우하우스전>(1989), <한국 해학의 현대적 변용>(1998), <태극-순환 반전의 고리>(2010) 등의 전시들을 기획했다.

연구자와 실무자들의 교류에도 힘써왔다. 현재 한국큐레이터협회 명예회장,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후원회 회장, 이인성아트센터 회장, 한국문화교류연구회 대표를 맡고 있다. 일제강점기와 해방공간 시기, 민주화와 문화다양성으로 이어지는 현재를 살아온 미술평론가로 ‘한국의 1세대 큐레이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