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채현국 효암학원 이사장 ] 이 시대 참 어르신 채현국에게 길을 묻다. ②
[인터뷰/채현국 효암학원 이사장 ] 이 시대 참 어르신 채현국에게 길을 묻다. ②
  • 이은영 편집국장
  • 승인 2016.01.22 14: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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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 같이 함께 살 궁리해야 함께하는 삶을 '도탑게' 한다. 예술에 있어 자기검열 가장 경계해야, 비폭력 저항으로 끝까지 메시지 전달해야

[1편에 이어]http://www.sc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22135

자기검열 제일 무서워, 비폭력 저항 방법 찾아야 

▲ 채현국 학교법인효암학원 이사장

그때도 검열이 심했는데 요사이 우리 문화계에서도 다시금 검열이 이슈가 되고 있습니다. 

지금의 검열은 자기검열이 제일 무섭습니다. 자기검열을 통해 용기를 저하시키고 정직함을 아첨의 능력으로 바꾸고 용기가 비굴함으로 바뀌는 게 자기검열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 검열 중에 제일 두려운 것은 탄압받는 검열보다 자기검열이 더 무서운 겁니다. 많은 문화적인 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예언자가 못되는 것도 자기검열 때문이라고 봅니다. 이놈의 검열이라는 것이 잠재의식 속에서 맥을 못 추게 의식으로 못 오게, 더구나 훼방을 놓는 것이지요.

이 세속에 맞추려면 검열 안 하기가 쉽지 않다는, 꾀를 가지고 있거든요. 자기 검열만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 그것이 벌써 이미 비굴을 이루고 이미 아첨이지요. 정직하면 아첨이 이웃일 수가 없는데, 어느 틈에 정직이 아첨이 되고, 용기와 비굴은 원수지간인데, 바로 용기가 비굴이 됩디다. 이것이 모두 자기 검열을 통해서지요. 용기는 바로 죽음이라는 것을 느끼니까요. 용기가 비굴로 싹 바뀌죠. 정직 또한 죽음이니까 얼른 아첨으로 바꾸죠. 이것이 자기검열이라는 것이 자기 합리화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어떻든 자기 검열을 하지 않고 그렇게 당당하게 한 사람들은 탄압을 받고 있다는 얘기지요? 우리 문화예술계에서 작품도 못 걸고 지원금 끊어지고 이런 상황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눈에도 안 보입니다. 이미 탄압받아서 근처에도 못 갑니다. 일개 배우조차도 쫓겨나는 걸 뻔히 아는데 어떻게 비굴 안 합니까, 어떻게 아첨 안 합니까? 그 탤런트 하나를 용납 못하니. 이런 이상한 권력이 어디서 난데없이 나타나서, 그런 애들한테 권력을 지켜주겠지 하고, 날조했든 말았든 간에, 날조해도 될 만큼 찍었다는 뜻이거든요. 우리 이웃에 한 놈도 찍은 놈이 없는데 어느 틈에 찍었어, 조금만 날조하면 될 만큼. 이게 실제의 일인가. 자기 검열 안 해서 얻어터지는 쪽으로 가야지 자기 검열하면 끝도 없습니다.

그런 힘에 붙어가지고 사는, 그 떼거리들을 한 번 상상 해 보세요. 어디서 나타났겠나? 자기검열을 열심히 한 떼거리들이 그렇게 됩니다. 지금처럼 나쁜 놈 편에 뛰어든 사람들이 많은 경우에는 피해 안 당하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무심코 피해당하다 보면 가해자가 될 위기 때문에도 피해를 안 받을 줄 알아야 합니다. 피해를 쉽게 안 받는 것이 바로 비폭력 저항입니다. 

예술에 검열에 있어서 비폭력 저항을 적용 한다면요. 

끊임없이 써놓고 끊임없이 검열 앞에까지 안가면서 어떻게 공연할 수 있는 방법,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을 또 찾아야합니다. 폭력이 쉽게 작동하게끔 할 이유가 없습니다. 지금 제가 이런 대담에 응하는 것도 폭력을 피하는 방법 중에 하납니다. 싣겠으면 싣고, 말겠으면 말고. (하하하) 

이런 문제가 불거진 것은 지원금 안주고 무대를 없애는 등 경제적인 부분과 맞닿아있는데요 

무수히 많은 배우들이 끼니도 이어가기 어렵고, 연극 제작자들은 자기 식구들한테까지 증오를 당하면서까지 연극 제작하고 있고, 그런 것이 끈덕지게 전개되고 있습니다. 우리 연극의 역사에서 한 두 사람의 주목받는 성공인들이 있었지만, 많은 이들이 이름 없이 가난하게 살고 심지어 늘 남한테 비웃음까지 당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계속 되는 원동력은 사람의 꿈 일거고 사람의 힘일 것입니다. 아무리 비굴하게 자기 검열하는 것 같아도 끈덕지게 이어지는 것은 전 세계 어느 곳에서나 일어납니다. 나는 그런 것이 기적 같습니다. 쉽게 그냥 끊어지지 않는 것, 중세의 질곡 속에서 대 르네상스가 준비된 것 같은 것 말입니다. 

우리가 '현실'이라 하는 것은 현실이 아닌 '시속', 시속은 온통 거짓말로 흘러가

선생님은 일찍이 시속을 버리신 실천적인 삶을 살아오 셨는데요.(선생은 우리가 말하는 현실은 현실과 다른 ‘ 시속’이라 규정해 말했다)

나도 시속을 끊임없이 따라갔지요, 그리고 그걸 어느 순간에 버린 것이 아니라 따라가면서도 늘 그건 의식하고 있었습니다. 안 따라가면 나만 망하니까 따라 가면서도 알면서 따라갔지 모르고 따라간 적 없습니다. 해방 바람에 얼마나 주장하고 우레처럼 울리는 소리도 거짓말인 거를 전 세계가 거짓말 속에 흘러간다는 것도, 해방이라는 이 대변혁 때문에 가려진 것이지요. 사실은 해방이 아닙니다. 패전일 뿐입니다. 이긴 자들은 그럼 악당이 아닌가. 이긴 자들도 또한 똑같은 놈들입니다. 그러나 일본의 패망 속에서 아, 이게 온통 거짓말로 흘러가는구나. 시속과 세속은 온통 이기는 놈이 이기는 거지.

▲ 여러 곳에 초청받아 강의를 하고 있는 채현국 선생 (동영상 캡쳐 = 뉴스타파)

진실이나 현실과는 아무 상관없는 말을 현실인양 할 뿐이라는 걸 깨닫는 거지요. 하도 우리 모두가 절여져 있으니까요. 시속이 바로 세속이고, 시속이 바로 현실이라는 말로 끊임없이 쓰이고 있으니까요. 학교에서 조차 신문, 잡지, 시인의 글에서 조차도 시속과 세속이 현실인양, 말이 엉망으로 돼 있는 사람들이 이기고 있는 겁니다. 모든 말이 사실에 적혀 있기 보다는 자기들이 필요한데로 써먹기 위해서지요. 

그렇다면 정확히 현실이라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정말 우리가 사람이 사람답게 살고 있는 것을 현실이라 해야 할 것인데, 사람이 사람답게 살지 못하는 모든 위기나 날조나, 흔들리는 것은 전부 조작이고 강압 이고 위협이고 위세라고 해야 할 텐데 누가 요즘 그렇게 말합니까. 그 전부가 현실이라고, 그 위협에 압도돼 있는 시속을 현실이라고 표현합니다. 현상이라는 것은 나타난다는 건데, 그 나타남이라는 것은 본질이 나타난다는 거지요. 위압이 나타나는 걸 나타난다고 하지 않거든요. 가해진다고 해야지요. 하도 오랫동안 그렇게 써먹혀 왔기 때문에 이 말이 낯선 겁니다. 

작은 씨앗에서 시작하는 것이 잠재의식 

그런데 그 말씀을 하시니까 생각나는 것이 선생님이 다른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질문다운 질문을 하지 않는다. 말씀하셨는데요. 질문을 하려면 치열하게 파고들어야 한다고…. 

끈덕지게 늘 정곡을 찌르고, 그 너머를 늘 쳐다보려 하고 혜안을 가지려고 끊임없이 신나게 노력해야지요. 꿈에서도 노력해야합니다. 사실은 잠재의식에서부터 해야 합니다. 늘, 아마 우리가 지혜라고 하는 전부는 의식이 아닌 잠재의식에서 일어나야 할 것입니다. 

의식이 쌓여서 잠재의식이 되는 것 아닌가요? 

아닙니다. 의식은 정말 맥 못씁니다. 너무 의식에 포로가 안 되도록 할 줄부터 알아야 잠재의식이 활발해 질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늘 이성이라고 하는 데에 너 무 매달리는 것부터만 해도 문제가 많습니다. 감성이 훨씬 넓은 것입니다. 감성이 따로 있지 않습니다. 사실은 잠재의식입니다. 모든 이성 따위는 먼지만한 것에 지나지 않고 의식도 마찬가집니다.

잠재의식 속에서 준비되고, 싹이 트려고 꿈틀거림이 땅속에서 일어나지요. 그 큰 굵은 나무가, 그 끔찍하게 굵은 나무가 조그마한 씨앗에서 시작하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의 잠재의식의 세계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자그마한 씨앗이지만 그것이 아니라 전체 생명이 우리에게 그렇게 보이는 것입니다. 잠재의식이라는 것은 의식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전혀 우리는 의식을 못하는 겁니다. 우리는 모두 의식 못하는 그것에 대한 기대와 그것에 대한 준비, 열망, 이런 것을 늘 우리가 행동 속에서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왜 의식으로 하는 것이 맥을 못 추는 건가가 분명해질 것입니다. 

꺼꾸러지지 않는 바보, 나이 먹은 이들 강의장서 보면 반가워 

▲ 채현국 학교법인 효암학원 이사장

지금 강의를 많이 다니시잖아요. 왜 지금 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선생님을 찾을까요? 왜 선생님을 좋아한다고 생각하세요?(웃음) 

허허허...나이 먹은 사람이 할 말도 별로 없는데. 조금은 바보스러운데도 그냥 꺼꾸러지지 않은 바보니까. 확실히 바보는 바본데 거꾸러지지는 않았거든요. 그렇기에 사람들이 재밌어 하는 것 아닐까요? 더구나 젊었을 때부터 남한테 존중, 존경 이 따위 말만 나오면 원수계약서 쓰라고 하는 사람인데, 80넘어서까지 사람들한테 귀여움을 받으니까. 그게 재밌어 가지고 전혀 무명하게 그냥 산 것 같은데, 주변 친구들에게 늘 귀여움 받고 살았습니다. 늘 과분하게 귀염 받았지요. 이것이 민중적인 대중적인 귀여움으로 바뀌는 거 보니까 그게 재밌었겠죠. 나도 그것이 고마워서 웬만히 고단해도 그냥 같이 가서 서로 함께하는 재미로 가는 거지, 나한테 들을 말은 없습니다. 다 본인들이 속에서 느끼고 있는 것들이니까요. 하나의 표현정도라 그럴까, 점 찍힌 보물 같은 그런 역할이라 하려나, 살짝 점이 있는 보물 같은 귀여움 같은 것….(하하하) 

강의장에서 사람들 만나 보시니까 어떠세요? 주로 젊 은 층이 많은데, 그 사이에서도 나이든 분들도 더러 보이시더라고요. 

정말 나는 즐겁습니다. 젊은 층도 있지만 나이 많은 사람들도 있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지 모릅니다. 그 사람들 속에, 꽤나 나이 많은 먹은 사람들도 그 안에 있다는 것이. 그 사람들 속에서 나 혼자일리가 없다는 것이 확실하니까요. 분명히 있습니다. 이런 의식을 잠재의식을 깨우는 것이, 나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요. 그 젊은이들 틈에 노인들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신나는지 모릅니다. 몇 사람 안 되지만 보입니다. 놀랍습니다. 우리가 괜히 외로움을 타고, 괜히 우리가 조급증을 내는 겁니다. 외롭다고 느끼는 분들 그냥 외롭지 않습니다. 과연 안 외로운데 우리가 뜨거운 마음이 생길까요. 외로우니까 생기지. 조급증만 안 내면 됩니다. (웃음) 참 재밌습니다. 그 젊은이 틈에 내 몰골만큼이나 시시하게 생긴 노인들이 한 두 사람 있는 것이 그렇게 참 희한합니다. 노인 없는 적이 별로 없습니다. 꼭 있습니다. 

신경숙, 세상과 함께 나누지 않은 것, 실수 

▲ 채현국 학교법인 효암학원 이사장

얼마 전 '신경숙 표절사건'으로 「창작과 비평」 백낙청 씨가 많은 비판을 받았습니다. 창작과 비평은 선생님이 많은 후원도 하셨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 비판의 전제에 「창작과 비평」이 얼마나 신뢰를 쌓아오고, 그동안에 많은 민중적인 지지 속에 있었다는 것이지요. 그 영광을 시샘하는 시각이 마침 기회를 얻었다는 측면도 있다고 보입니다. 그 시샘하는 시각보다는 그 영광이 지속되기를 우리는 바라야 됩니다. 신경숙이라는, 학교도, 책도 마음 놓고 못 읽었던 한 어린 처녀가 여러 가지 불리한 조건 속을 뚫고 나와 그만큼 아름답고 좋은 소설을 썼습니다.

그런 사람이 태어나도록 받침 노력을 한 것 때문에 바로 「창비」도 그런 영광과 지지를 받은 것 아닌가요? 신경숙이란 불리한 조건의 작가를 발굴 했고 실어도 주고 격려도 하고 해서 정말 함께 이룩해낸 영광입니다. 그래서 그 약한 여류 작가가 사회적 배경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학벌의 패거리가 있는 것도 아닌, 그래서 백낙청을 비롯해서 「창비」의 현재를 움직이는 책임있는 사람들이 무조건 그 시새움의 시각에 맞서려고 아마 표현들을 조금 실수를 한 것 같습니다.

또 이번 표절사건 전에 신경숙이란 작가가 세상에서 번 돈을 세상에 함께 누리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나는 그걸 몰랐습니다. 그런 돈이 된 줄도 몰랐고 신경숙이란 작가가 그렇게 잘 사는 줄을 미처 몰랐습니다. 그 때 벌써 권유를 했어야 하는데, 작가가 작품만이 아니라 삶조차도 민중과 함께 할 줄 알아야 된다는 말을요. 꼭 기부를 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대중한테서 받은 그 물질적 유복함을 함께 나눌 줄 모른 것은 아주 실수라는 겁니다. 

문학권력이 됐습니다.

그랬다는 것을 남들은 다 알고 있는데 나는 몰랐습니다. 그 표절이 나무람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가방끈 짧은 사람 입장에서는 자기가 골똘하게 읽은 책을 자기 생각이라 착각할 수 있습니다. 조두남이란 친일기자가 쓴 그 선구자는 우리 민중들한테는 우리의 독립운동가 선구자로 바뀝니다. 친일 선구자가. 그 노래는 박태준선생의 작곡입니다. 단 한 번 발표됐기 때문에 조두남이는 자기의 착상이라는 것으로 착각한 것 입니다. 그걸 박태준선생이 고발하러 갔다가 그가 아픈 것을 보고 놔둬라 착각할 수 있다, 한 번 밖에 발표 안 된 것이라 그럴 수 있다, 오히려 포기했어요. 분명히 박태준선생 작품이고, 조두남의 그 시 선구자는 일 제 만주 개척자의 선구자지 조선독립의 선구자가 아닙니다. 그래서 조두남 선생은 한 번도 그것을 누리려고 나선 적이 없습니다. 

우리문화에 표절이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자본주의 개념입니다. 돈이 되고 인기가 되고 힘이 되니까 생긴 새로운 개념입니다. 우리는 누구껄 배워서 번안해 먹거나 한 것은 자랑이었습니다. 우리 임꺽정은 분명히 수호지의 번안이지만 더 훌륭한 번안이기에 자랑스러운 작품이지, 절대로 번안이거나 표절이라 말을 안 합니다. 만약 벽초 선생이 그 돈으로 떼부자로 살았다면 욕 얻어먹었겠지요. 마찬가지로 신경숙의 표절은 표절이지만 이런 비난의 밑바닥에는 시새움과 그가 대중으로부터 받은 물질적 풍요를 함께 대중과 나누지 않았다는 것에 있는 거지 백낙청이나 「창비」를 나무라는 것은 어리석은 소리입니다. 

새해가 얼마 남지 않았는데, 끝으로 신년 덕담 한 말씀 해주세요. 

정말 우리는 서로 돌보고 서로 함께할 때 행복해진 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입니까? 남하고 함께 하는 게 행복인 것을, 그 쉬운 것을 남하고 경쟁하라고만 학교는, 사회는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제는 이 관념에서 벗어나야 하지 않을까요? 함께해서 즐거운 것을 느끼고, 함께 행복해지는 해가 됐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