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 문화대상 수상자 인터뷰/정명숙 한국무용가] "나는 춤밖에 모르는 바보입니다. 그래서 행복합니다“
[본지 문화대상 수상자 인터뷰/정명숙 한국무용가] "나는 춤밖에 모르는 바보입니다. 그래서 행복합니다“
  • 인터뷰· 글/이은영 편집국장,김승용 인턴기자
  • 승인 2016.02.04 1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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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풀이를 통해 삶의 깊이를 배웠고, '춤이 삶이자 삶의 의미'인 이시대의 진정한 춤꾼

제7회 본지 <서울문화투데이>문화대상 전통대상 수상자 수상 정명숙

 "전통 춤은 우리 민족의 혼이다. 대한민국의 대표브랜드가 바로 우리 춤"

최근 영화 ‘귀향’의 개봉 확정이 화제가 되고 있다. 위안부 할머니들의 사연을 알리기 위해 출발한 영화이고, 몇 년의 고생 끝에 개봉을 확정 지었다.

이 영화가 개봉 확정되기 전에도 몇 몇 감독들이 작품화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제작비 문제로 끝내 상영되지 못한 사례들도 있다. 그 중 한 작품을 준비하는 과정에 수당 정명숙 명인(중요무형문화재 97호 이매방살풀이춤 보유자 후보/정명숙전통춤예술단 예술감독)은 작품 시작을 위한 위안부 할머니들께 올리는 위령제에 기꺼이 달려가 그들의 넋을 위로하는 춤을 추었다.

▲ 정명숙 명인은 남들이 보기에는 바보 같을 만큼 춤 밖에 모르는, 그래서 행복한 사람이라고 자신을 표현했다

당시 정 명인을 초청하기 위해 얼마가 필요하냐는 주최 측에, 정 명인은 오히려 이런 기회를 줘서 고맙다며 자신이 비용을 들여 제자들과 단숨에 현장으로 달려가 진심어린 춤을 추었다. 그는 살풀이춤을 추는 내내 눈물을 흘렸다. 먼 이국땅에서 통한의 가슴을 안고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한, 돌아왔더라도 일평생 깊은 상처로 살아간, 살아가고 있는 '일본군 성노예 소녀'들의 혼과 한이 실린 그녀의 춤사위는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렸다.

여든의 나이에도 여전히 단아한 모습에 곱디고운 붉은저고리에 남색 옷고름과 치마가 잘 어울리는 정 명인은 천상 춤꾼이다. 기자는 돌아가신 고 우봉 이매방선생의 전성기 때의 춤사위를 가장 흡사하게 구현해 내는 사람이 정 명인이 아닌가 생각한다. 지난해 여름 문화재전수회관에서 정 명인의 살풀이춤을 보면서 90년 대 중반, 처음으로 고 이매방 선생의 춤을 가까이에서 봤을 때 느꼈던 감동을 정 명인의 춤사위에서 고스란히 느껴졌기 때문이다.

대구 경북여고 재학 시절 무용을 시작해 국립무용단 1기생으로 입단한 후 평생을 결혼도 하지 않고 전통춤과 결혼한 정 명인은, 춤을 출 때 가장 행복하다고 말한다. 그는 춤에 관해 이야기할 때, 춤을 처음 시작했던 소녀 시절의 수줍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인터뷰 중간중간 춤과 관련해서 작은 동작을 보일 때 그의 손이 보여주는 선은 전통미를 그대로 담아냈다.

지난 1월 본지 <서울문화투데이> 제7회 문화대상 전통부문 수상을 계기로 정 명인과 안국역 근처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우리춤, 전통춤에 대한 관심과 지원이 점점 사라져가는 것을 무척안타까워하는 정명숙 명인의 우리 전통춤에 대한 열정과 헌신은 바로 '그의 삶 그 자체'였다.

- 사실 늦은 감이 있어 좀 죄송했는데, 지난 1월 본지 <서울문화투데이> 제7회 문화대상 전통대상을 수상했다. 다시 한 번 소감을 부탁드린다.
서울문화투데이는 국내 유일의 문화신문이다. 그런 권위 있고 특별한 매체에서 상을 줬다는 사실에 굉장히 기뻤다. 주변에서도 많은 축하를 해줬다. 나만큼이나 좋아해 주는 주변 사람들을 보면서 나 또한 큰 행복을 느꼈다. 내가 전공하는 것이 무형(無形)인데, 그런 부분에 대해 인정해주고 상을 주니 무척이나 큰 보람을 느낀다.

일생을 전통춤을 춰왔다. 사람들이 잘 몰라주고 가시밭길이나 다름없는 고난의 길이었다. 본인이 즐겁지 않으면 걸을 수 없는 길이다. 그럼에도 스스로 즐겁기에 걸어왔고, 이렇게 누군가 알아주는 순간에 기쁨을 느낀다. 다른 기술이 있는 것도 아니라, 나를 끌어당긴 춤을 계속 춰왔는데 이렇게 큰 상을 줘서 진심으로 기분이 좋다.

.▲정명숙 명인은 인터뷰 도중 춤에 대해 설명하며 손을 들어 보여주는 짧은 춤사위에서조차 단아함과 우아함이 드러났다.

- 현재 살풀이춤에 대해서는 절대적인 위치에 있는 분이 정 명인이다. 오래전 보유자 후보에 지정된 것으로 아는데, 전수조교, 보유자후보 등 요사이 쓰이는 명칭이 여러가지라 그 단계가 어떤 것인지 좀 헛갈리기도 한다. 정확히 어떤 명칭으로 부르는 것이 맞는가.
정식명칭은 ‘보유자후보’다. 93년도 문화재관리국 시절에 보유자후보증을 받았다. 전수조교라는 말은 몇 년 전부터 쓰고 있지만, 그와 관련해서 따로 증서를 받거나 한 것은 없다. 내가 받은 것은 보유자후보증 뿐이다.

- 평생을 살풀이춤과 함께해왔다. 살풀이춤이란 어떤 것인가.
살풀이춤은 우리 조상들의 혼과 얼이 춤이다. 남도 굿에서 파생된, 한을 안고 추는 춤이다. 슬픔만 안고 추는 게 아니라, 슬픔을 넘어 환희의 세계로 승화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인간의 희로애락이 모두 담겨있다. 희로애락을 전통춤으로 표현하기에 예술적 가치가 높은 것이다. 아주 심오한 감정들이 살풀이춤 속에 모두 담겨있다. 추는 내내 내 가슴에 와 닿는 것이 있기에 나도 한 평생 살풀이춤을 춘 것이다. 또한, 춤 한 동작 한 동작에 다 의미가 있다. 이매방 선생님의 172 장단의 춤을 보면, 한 장단씩 다 나눠서 설명할 수 있다. 선, 감정, 호흡 등에 따라 모든 동작이 다 구분된다. 예전에 이매방 선생님께서 내게 춤을 가르쳐주실 때 호흡, 치마 잡는 법, 강약 조절, 감정 등 많은 것을 알려주셨다.

움직이지 않으면서 움직이고, 움직이면서 움직이지 않는, '정중동, 동중정'의 응축된 감정의 표현이 중요하다. 턱을 내릴 때도 각도가 모자라지도 넘어가지도 않게 맞추는 것이 중요하다. 절제의 미학이 있는 춤이다. 치솟는 동시에 절제하는, 설명하기 어려운 순간들이 존재한다. 고도의 기술이 필요한, 까다로운 춤이다. 

- 이매방 선생께서 지난 해 돌아가셨다. 좋은 스승과 제자 관계인 동시에, 문제가 있던 시절도 있었다. 이매방 선생님은 어떤 분이셨나.
이매방 선생님께서 젊었던 시절에는 주변에서 선생님 춤에 대해 제대로 대우를 안 해줬다. 그래도 나는 선생님의 춤이 좋았다. 여러 선생님께 배우면서도 이매방 선생님의 춤에 더 집중했다. 그 춤이 너무 좋았기 때문에 그랬다. 선생님께 정말 많은 사랑을 받았다. 지나간 이야기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 많은 사랑을 받았다. 나에게 스승이란 하늘이다. 존경스러웠고 부모님처럼 모셨다. 선생님과 헤어지기 전까지 좋았던 것뿐이었고 추억도 많았다.

선생님께서 저를 데리고 공연도 많이 다니셨다. 내가 이수 1호고 제일 맏언니나 마찬가지이기에 더 챙겨주셨다. 항상 춤도 잘 춘다고 격려와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60년도 중반쯤 처음 이매방 선생님과 인연 맺은 이후 계속해서 함께했다. 학원 운영할 당시에 선생님께서 오셔서 레슨도 해주시며 도와주시기도 했다. 개인 발표회를 하면서도 계속해서 선생님과 교류했다. 젊었던 시절의 이매방 선생님의 춤을 배웠기에, 이매방 선생님의 어린 제자들과 나의 춤은 좀 다를지도 모른다. 이매방 선생님이 춤을 정리해서 문화재가 되기도 전에 배웠기 때문에 차이가 있을 것이다.

▲1970년대후반  우봉 이매방선생과 월정사에서 승무춤을 선보이고 있는 정명숙 명인. 젊은시절의 풋풋함이 묻어난다.

- 문화재 인정 관련해서 제도를 보완해야 한다는 말도 나오고, 기준에 대한 이야기도 나오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참 예민한 부분이다. 평생 춤을 췄는데 인정받지 못한 동료들을 보면 마음이 아프다. 문화재청에 계신 분들이 공직자로서 공정하게 잘 처리해줄 것이라고 믿고 있다.

사실 문화재라는 건 학교에서 배운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연습만으로도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무엇인가가 필요하다. 하늘이 주신 선물이라고 생각한다. 문화재가 되기 위해 혈안이 되는 게 아니라, 최대한 많은 이들에게 이것을 전승하기 위해 노력해서 많은 이들에게 춤을 알리는 것이 맞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전승이 중요하기에 춤에 대해 잘 아는 것은 기본이라고 생각한다. 춤으로써 춤에 대해 모든 것을 설명하고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자기 자신이 무대에서 춤을 추면서 몸으로 말하고 관객에게 감흥을 줘야 하는 것이다. 이론이 아니라 무대에서 모든 것을 보여야 한다.

- 많은 개인발표회를 해왔다. 정부의 지원 등은 거의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경제적 어려움이 크지 않았나.
예술인이라면 개인발표회를 많이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누가 하라고 하지 않아도, 내가 갈고 닦고 노력한 것을 발표하고 싶은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전통춤에 대한 관심이 큰 것도 아니고, 정부에서 따로 지원이 나오거나 하지도 않는다. 협찬도 받아본 적 없다.

나는 부모님께 물려받은 재산을 춤 배우고 개인발표회 하는 데 모두 썼다. 그렇지만 즐거웠다. 나는 춤밖에 모르는 바보다. 춤을 위해 돈 쓰는 것을 보며 누군가는 바보라고 할지도 모르지만, 난 그 순간이 너무 행복하고 즐거웠다.

오히려 가족들에게 인색한 적이 있어 미안했지만, 춤을 위해서는 내 모든 것을 바쳤다. 춤을 위해 개인발표회 준비하고, 레슨받는 시간과 돈이 전혀 아깝지 않았다. 춤만 배운 것이 아니라 춤을 위해 음악 전반을 배웠다. 가야금을 배운 덕분에 춤을 추기 위한 장단이 더 잘 보인다.

가야금 외에도 당대의 명인들을 찾아다니며 북, 장구 등 많은 것들을 배웠다. 춤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것도 아끼지 않았다. 그 덕분에 춤에 대해서는 남에게 가르칠 수 있을 만큼 많이 배웠다고 자부한다. 어깨너머로 배운 것도 아니라 일대일로 확실하게 배웠기 때문이다. 내 별명이 바보다. 춤 밖에 모르는 바보. 그렇지만 난 그런 나 자신의 선택에 만족한다. 춤밖에 모르는 바보로 살 수 있다면 아주 행복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춤을 통해 삶의 자세도 배웠다. 절제와 인내가 있어야만 춤을 출 수 있다. 억울한 일을 당해도 인내하고 참을 수 있었다. 춤에서 절제와 인내를 배운 덕분이다. 오뚝이 같은 사람이 됐다. 춤을 통해서 쓰러지지 않는 법을 배웠다.

▲정명숙 명인은 몇 해 전 일본군 위안부(일본군 성노예 소녀)들의 원혼을 위로하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사비를 털어 제자들과 함께 강원도까지 가서 춤을 추면서 많은 눈물을 흘렸다. 그들의 넋을 위로하는데 조금이라도 마음을 보태고 싶었다고 했다.

- 몇 년 전에 위안부 영화 촬영 관련해서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해 주최측의 사례도 마다하고 강원도 평창까지 기꺼이 자신의 사비를 털어서 달려가 춤을 춘 것을 기억한다. 당시 기자도 현장에 있었던 터라 그 때의 기억이 생생한데, 그때 춤을 추면서 많은 눈물을 흘렸었다. 당시 심정이 어땠나.
그분들이 내 언니뻘 되는 분들이라고 할 수 있다. 어린 시절에 끌려가서 모진 고통을 받았다. 집에서 가장 사랑받을 나이에 끌려가 그렇게 큰 고생을 한 것이다. 지금 생각해도 너무 가슴이 아프다. 주최측에서 영화 시작전 돌아가신 위안부들을 위한 위령제를 지내는데 춤을 추어달라는 초청이 왔기에 무조건 하겠다고 했다. 사례 문제가 아니라 무조건 가야겠다고 느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다. 너무 가슴이 뛰었다. 그분들에게 위로가 되길 바라며 춤을 춘 것이다.

그 당시 춤을 추면서 많이 울었다. 진심으로 뜨거운 눈물이 나오는 것을 느꼈다. 그 전에 서대문형무소에서 춤을 출 때 울었었다. 제자들과 봉사활동으로 가서 춤을 추면서 펑펑 울었었다.  그분들의 마음이 느껴져서 서럽고 분해서 몸을 가누기가 힘들 정도였다. 그렇게 춤을 췄다. 내 춤이 그분들의 한을 풀 수 있게 도움이 되기를 바랐다.

- 평생 춤을 추면서 힘들었던 순간이 많았을 것 같다. 어떤 순간에 가장 힘들었나.
일단 전통춤을 알아주는 이들이 많지 않아서 힘들었다. 공연 초청을 해도, 오라고 사정해도 잘 오지 않는다. 그나마 나같은 경우 공연한다고 하면 많이 와주시는 편이다. 하지만 이제 막 전통춤을 시작하는 이들 입장에서는 얼마나 힘이 빠질 일인가. 우리의 역사와 얼이 담긴 춤인데 우리나라 사람들이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것이 참 서럽고 마음 아픈 일이다. 우리나라의 영혼이라고 할 수 있는 춤인데 관심이 많지 않아서 매우 큰 아쉬움이 든다. 그래서 더 열심히 했다. 의상도 더 화려하고 예쁘게 했다. 젊은 시절에는 의상에 굉장히 신경 많이 썼는데, 이제 나이 먹고 나니 춤보다도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심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많이든다. 내가 무엇을 입었느냐보다도 어떤 마음이냐가 더 중요함을 느낀다.

-오래전 카네기홀에서 공연을 했을 때 많은 어려움 속에서 올려진 공연이었지만 당시 굉장한 호응을 받았다고 들었다.

92년도에 카네기홀에서 발표를 했었다. 그곳에서 발표하려면 1년을 점검한다. 악사분들도 다 모시고 가야 한다. 여러 선생님을 모시고 갔다. 비행기표부터 시작해서 모든 것을 내가 부담했다. 열흘 가까이 체류하는데, 정말 집 몇 채 비용이 들었던 것 같다. 마이크를 무대에 올려놓는 게 300불이고, 다시 갖다놓는 게 또 300불이다. 모든 것이 돈이었다. 같이 간 분들 숙식비 등, 경제적으로나 심적으로나 아주 힘들었다. 공연 날 아침에 날씨도 안 좋아서 공연 시작 5분 전까지도 사람이 거의 없었다. 다행히 공연이 시작됐을 때 객석을 꽉 채울 정도로 많은 관객이 와 있었고, 엄청나게 큰 호응을 해줬다. 안 좋은 날씨에 공연을 해도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와주고 호응을 해줬는데 정작 국내 언론에서는 이에 대해 다뤄주지 않고, 전통춤 공연에 대해 별 호응이 없었다. 이런 부분에서 섭섭한 것이 사실이다. 여전히 사람들의 관심이 많지 않지만 춤이 좋기에 힘들어도 지금까지 계속해서 춤을 추고 있다.

▲1992년 뉴욕 카네기홀에서 열은 정명숙 명인 개인발표회.

- 오랜 세월 춤을 춰왔다. 정명숙만의 춤 세계를 따로 정립하고 싶지는 않은가.
정립이라기에는 너무 복잡하고 환경도 열악하다. 그저 사람들이 전통춤에 좀 더 관심을 가져서 전통춤 세계가 좀 더 활성화되기를 희망하고 있다. 정부에서도 우리 전통춤에 대해서 좀 더 많은 지원을 해줬으면 좋겠다. 전통춤 관련해서 주변 환경이 좀 더 개선되길 바라고 있다.

- 전통춤 관련해서 환경 개선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
우리나라의 전통춤을 우리나라에서 알아줘야 세계적인 브랜드가 될 수 있지 않겠는가. 국내에서도 전통춤에 별 관심 없으면서 해외에서 알아주기를 바란다면 그것은 어불성설일 것이다. 전통 춤은 우리 민족의 혼이다. 대한민국의 대표브랜드가 바로 우리 춤인 것이다. 전통춤에 대한 관심도 이렇게 없는 상태에서 문화재가 무슨 소용이겠는가. 또한, 춤을 추는 이들도 춤꾼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 문화재에 상응하는 품격을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인간성과 춤사위 모두를 갖춘 사람들이 문화재가 돼야한다.

▲ 정명숙 명인은 우리 전통춤에 대한 관심과 지원이 점점 더 사라져가는 것에 안타까움을 표했다. 그럼에도 자신은 바보 같을 만큼 춤 밖에 모르는, 그래서 행복한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 올해 계획은 어떻게 되는가.
찾아가는 공연을 기획하고 있다. 아마 전후반기에 하게 될 것 같다. 개인발표회도 준비하고 있다. 공연뿐 아니라 여전히 자 양성에도 힘쓰면서 한 해를 보낼 계획이다. 그동안 무료강습도 많이 해오고 어려운 제자들은 무료로 많이 가르쳤다. 이는 우리 전통춤을 좋아하는 그들의 열정을 함께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계속 우리 전통춤을 좋아하는 많은 이들과 만나고 싶다.

수당 정명숙

<프로필 >
중요무형문화재 제 97호 살풀이춤 보유자 후보
정명숙전통춤예술단 예술감독
사)한국전통예술진흥회 부이사장
사)판소리 고법보존회 부이사장
사)전주대사습놀이보존회 이사
미국 뉴욕 카네기홀 개인발표회 등 총 35회 개인발표회
키르키즈스탄 비비사라 베쉴라라바 국립예술대학 명예예술학박사 취득
국립무용단 1기생
한국무용협회 창단위원 및 이사 역임
전)강원대, 명지대, 성신여대 출강
전주대사습놀이보존회 전국대회 등 다수 심사

<수상>
제7회 서울문화투데이 전통문화대상 수상
사)한국문화예술총연합회 문화예술대상 수상
문화재전승자 과정 표창장 수상
서울문화재단 재능나눔봉사단 표창장 수상

<사사>
중요무형문화재 제27,97호 승무 살풀이춤 명예보유자 이매방
중요무형문화재 제92호 태평무명예보유자 강선영
故 김진걸, 故 김숙자, 故 박금슬, 故 배명균, 故 황재기, 故 박성옥, 故 박명천, 故 한영숙 故 최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