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경의 일본속에서]日『베를린의 기적』에 그려진 한일 축구의 영웅들①
[이수경의 일본속에서]日『베를린의 기적』에 그려진 한일 축구의 영웅들①
  • 이수경 도쿄가쿠게이대학 교수
  • 승인 2016.02.22 1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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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경 도쿄가쿠게이대학 교수

1. 다케노우치 코스케 (竹之内響介)씨가 보내 온『베를린의 기적』

나의 한자 이름은 ‘李修京’이다. 서울(京)서 수행을 하라고 지었는데 교토(京都)로 튄 셈이지만 도쿄(東京)에서 수행 중이니 부모님 바램을 전혀 무시한 삶은 아니다.그런데 며칠 전에 ‘季寿卿’이란 이름의 우편물이 연구실로 배달되었다.

한자음으로는 ‘계수경’이지만 계절의 ‘季’는 지금도 일본인들이 ‘李’와 헷갈리거나 혹은 한국에 그런 성이 있는 줄 알고 간혹 사용하는 사람이 있다(물론 무관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학교에 그런 이름의 한국인 전임 교수는 나 밖에 없기에 배달이 잘못 된 것도 아니리라.해서 택배 봉투를 열어봤더니 일본 축구사의 전설로 유명한 [베를린의 기적]이란 제목의 책 한권이 들어있었다. 그 안에는 yahoo의 번역 사이트를 사용한 한국말(?) 번역 편지가 들어있었다.

필자가 적었던 베를린 올림픽 일본 축구대표팀의 김용식 선수에 대한 컬럼을 보고,자신의 책『베를린의 기적(ベルリンの奇跡―日本サッカー煌きの一瞬)』(東京新聞)을 출판 전에 만나지 못했던 것이 매우 아쉽다고 저자 다케노우치 코스케씨(竹之内響介)로부터 연락이 온 것이었다.

축구 애호가라면 잘 알다시피 일제 강점기의 1930년대 당시 조선 축구는 아시아의 최강호였고, 식민지 선수들이 가졌던 정신력은 물론,기술력도 압도적으로 갖추고 있었다. 예를 들면 일본 올림픽 대표팀에 발탁되었던 김영근 선수가 당시 영국의 함대 축구팀과 치룬 친선 경기에서 일본 올림픽 대표팀이 지고 있었던 시합을 총 6골을 뽑아 내며6-3의 역전승을 거둔 것만으로도 충분히 당시의 실력을 알 수 있을 것이다(@김현회 기사 참조). 물론 김영근(金永根)선수는 당시 아시아의 축구 신동으로 불렸던 실력자였다.

하지만 그러한 실력보다 제10회 극동선수권대회에서 관서출신 선수들의 문란한 태도로 인해 참패를 당했던 당시 감독이 올림픽 대표팀의 다케노고시 코치(竹腰重丸)였기에 그는 팀의 결속력 및 전술 이행을 중시하였고,그런 그의 지시를 무시하고 개인기를 발휘하는데 힘을 썼던 김영근에게 득점보다 전술 지시를 어겼음을 책망하였다.

김영근은 결국 결과보다 과정에 연연하며 자신을 꾸짖는 코치의 태도에 반발하고 올림픽 대표팀에서 빠져버린다. 그 결과,1936년 8월의 베를린올림픽 일본 축구팀에는 보성전문학교의 김용식(金容植)만 조선인 선수로 참가하였다. 세계적인 기량을 발휘하며 축구의 역사를 견인할 기회를 차버린 축구 천재 김영근의 삶은 그 뒤, 일본의 이어지는 전쟁 공간 속에서 점차 빛을 잃었고,해방 후 방황 속에 살다 1972년 12월 서울 태능 판자촌에서 고독사로 발견된다(@김현회 기사 참조).

한편,김용식은 유일한 조선인 참가선수라는 무거운 짐과 인고의 시간 속에서 나라 잃은 민족의 대표이자 올림픽 대표라는 자긍심, 축구 선수로서의 실력을 발휘하며 무명의 최약체 일본팀을 강호 스웨덴팀한테 이기는데 커다란 공헌을 한다.

▲필자 앞으로 온 [베를린의 기적]책과 저자의 편지

그의 아버지 김익두 목사는 신사참배 강요에 반대하다 심한 고문과 반복적인 투옥을 당했고, 1926년 경신중학교에 입학하여 축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1929년광주 항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김용식은 김영근,채금석,임창수,김성태 등의 축구부원들과 항일운동에 참가하게 된다. 경찰의 지명수배를 받은 그를 비롯한 10명의  축구부원이 퇴학 처분을 받고,조선 최강팀인 축구부도 해체에 이른다.

김용식,김성태(동심초 작곡가 요석) 등의 경신중학교 축구부원을 비롯하여 소설가 안수길 등 조선의 광주 항일학생운동 참가 퇴학생들 약 100명은 당시 학교 설립 직후 학생 모집을 하고 있던 교토 료우요우(両洋)중학교로 건너갔고, 축구의 미련을 떨치지 못한 김용식은 김영근과 더불어 평양 숭실중학교 축구부에서 활약하며 전국을 석권하는 실력을 보였다.

그 뒤, 1930년에 육상경기에서 우승하고, 1932년에 보성전문학교로 진학한 김용식은 1935년에 全京城축구단에 뽑혔다. 제15회 全日本종합축구선수권 대회에서 우승을, 같은 해에 스피드 스케이트 2종목에서도 우승을한다.

이러한 실력을 인정받아 27세의 김용식은 베를린 올림픽 일본 대표선수로 발탁되었고,일본 대표팀을 놓고 우여곡절은 있었으나 조선의 축구를 알리는 좋은 기회라는 긍정적 자세로 그는 세계 무대를 선택하게 된다.

그리고 1936년 8월,시베리아철도를 이용한 13000킬로의 여정 속에 일본 올림픽 대표팀은 아시아 첫 올림픽국(중국과)으로 출전을 하고,강호 스웨덴팀에 승리하며 구미 중심의 기존 축구의 이미지에 일본이란 존재를 남기는 축구사의 기적을 일으키는 것이다.일본이 베를린에서 보여 준 기적의 축구사를 오랫동안 취재한 증언과 자료 수집으로 기록한 내용을 2015년 11월27일자로 도쿄신문사에서 출판한 책이 다케노우치 코스케씨의『베를린의 기적(ベルリンの奇跡―日本サッカー煌きの一瞬)』이었다.

2. 책 속에서 보는 베를린올림픽 선수들 상황

이 책의 첫머리는 충격적인 사실 부터 기록하고 있다.
각 대학에서 발탁된 선수들을 포함한 일본 첫 올림픽 대표 선수들은 무명의 일본을 국제사회에 알리는데 혼신을 다 해 싸웠고, 세계 무대에서 자신감을 얻은 그들은 설전의 꿈을 꾸며 4년 뒤에 있을 도쿄올림픽을 기다렸던 것이다. 그러나1937년 중일전쟁과 함께 일본은 점차 총력전으로 돌입했고,그들도 예외 없이 전쟁터로 불려나가야 했다. 일본 올림픽 축구대표팀의 다케우치 데이죠(竹内悌三)주장을 비롯한 축구선수 4명과 승마,수영선수,육상 메달리스트 등의 올림픽 선수들이 전사했고, 1940년에 치뤘을 도쿄올림픽은 결국 전쟁으로 무산이 되었다.

다케우치 주장은 시베리아 수용소에서 병사했으나 그의 딸 이시이 모토코(石井幹子)는 세계적인 조명 디자이너로 활약하며 베를린의 벽을 비롯한 각지의 유명 시설에 평화의 빛을 발신하고 있다. 또한 경제적 어려움에 처한 축구 선수들에게 장학기금을 설립하여 그들의 꿈을 지원하고 있다.

이 책을 집필한 다케노우치씨는 시나리오 작가이자 각종 영화제 등에 입상한 CM 감독이다. 그는 단순한 축구 미담을 적기 보다 베를린의 기적을 통해 역사와 관계자들의 행보를 기록하며 사회와 그 시대의 동향을 비추려는 역사사회학적 접근 방법으로 집필하고 있다. 그의 책 첫머리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이 책은 전쟁 전의 일본 축구의 역사와 ‘베를린의 기적’의 진실,그 뒤의 선수들의 죽음,한 사람의 여성이 아버지의 행적을 좇으며 어떻게 살아왔고,어떻게 세계를 향해평화의 메시지를 발신하게 되었는지를 다큐멘터로 구성한 것이다

▲베를린 올림픽 일본대표 선수단. 뒷줄 오른쪽 선수가 김용식.<사진=『베를린의 기적(ベルリンの奇跡―日本サッカー煌きの一瞬의 저자, 다케노우치 코스케씨 제공>

그렇기에 이 책은 축구전문가가 적은 축구기록이 아니라 올림픽대표팀 구성 전후의 각종 에피소드, 각 선수 및 관계자들이 놓였던 상황 등을 일본인 첫 FIFA회장상을 수상한 최고령 축구저널리스트 가가와 히로시(賀川浩, 만91세)씨의 인터뷰와 협력,당시 참가자 및 관계자들의 기록과 자서전,일기,유족들 증언 등으로 상세하게 엮은 역사기록이라 볼 수 있다.시나리오 작가다운 예리함은 물론,상당한 시간과 노력을 들여서 발로 뛰며 얻은 정보나 자료등을 풍부하게 활용하고 있어서 읽기도 보기도 쉬운 책이다. 예를 들면 전쟁 전의 축구선수들 축구화에는 비교적 값싸고 품질좋은 조선의 가죽이 사용되었다는 등의 에피소드도 읽을 수 있다.

이 책에서 인상적인 것은 시대가 시대인 만큼 당시의 축구 선수들이 상당히 엄한 규율속에서 자신들을 절제하는 강한 정신력의 지주였음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간단히 소개하자면,

1) 일본의 축구 시작은 1873년 도쿄에 왔던 영국해군중좌(중령)가 여가로 시합을 보인 것이 그 효시라는 설이 유력하다(한국은 1882년,제물포항에 영국군함이 와서 여가를 즐긴데서 비롯).그 뒤 고베 등의 무역항에 온 외국인들을 통해 학교 교사가 될 고등사범학교(교원양성대) 학생들 사이에서 축구부 탄생이 이어져 새로운 축구 문화가 전파되었다.

2) 영국 통치하의 버마(현 미얀마)출신 ‘우 쵸딘’이란 유학생이 도쿄고등공업학교에 유학을 하던 중,우연히 와세다대학 축구팀의 열악한 기술을 보고 나중에 베를린 올림픽 대표 감독을 맡는 스즈키를 비롯한 와세다 선수들에게 축구의 테크닉을 가르치게 되면서 일본 축구는 기술적으로 극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일본 축구의 대부라고도 불리는 이 쵸딘이란 인물은 1924년에 귀국 후,미얀마 근대공업 기술의 개척자로 불릴만큼 사회적 공헌을 하지만,어느날 갑자기 그 종적을 감추고 말았다고 한다.일본 축구협회가 축구의 전당에 모실 계획으로 미얀마 방송 및 언론에 호소를 했으나 그 유족은 물론 당사자의 행보를 알 길이 없어서 미얀마축구협회 회장이 현재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3) 서구 스포츠 문화인 축구용어 및 해설,기술 전수 등의 일정 지식습득과 여가 공간 시설이 필요하였기에 당시는 학교 시설을 이용한 중고등학교,대학교팀이 즐기는 스포츠로 확대되었다. 그렇기에 베를린 올림픽 대표 선수들도 와세다대학이 10명,게이오대학 1명,도쿄제국대 2명,도쿄문리과대 1명,보성전문학교 1명이었고,감독은 와세다 출신의 스즈키,코치는 제국대의 다케노고시와 와세다대학의 구도(工藤)라는 구성원에서 알 수 있듯이 전원이 대학생 및 대학출신자로 구성된 것이었다.

4) 당시 올림픽 대표 축구 선수들은 운동은 물론,자기 전공과목 및 영어, 외국어 습득 등,학교 공부도 열심히 하는 문무겸비의 엘리트 지식인층이었다.

5) 엄격한 규율 속에 자제력을 요구받는 선수 생활로 타의 모범을 보였다.

일본의 지배를 받던 당시의 한반도 상황보다는 일본이 절대적 여유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다수의 사람들이 경제적 궁핍에 시달릴 때였고(열악한 노동환경과 빈곤실태를  고발한 고바야시 다키지의 『게공선』이 발표된 것이 1929년),대학이란 일부 여유있는 집안 자제들이 향유할 수 있는 특별한 공간이었음을 감안할 때 축구는 공 하나 만으로 아무나 할 수 있는 지구촌 스포츠화 된 지금과는 다른 특별한 스포츠 였음은 분명하다.그렇기에 축구 선수들도 문무를 겸비한 재원으로서의 품행이 바른 태도를 의식적으로 갖추려했음을 알 수 있다. [2편에서 계속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