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정의 발레인사이트]찰나적이며 잡을 수 없는 자유로운 존재-라 실피드(La sylphide)
[김순정의 발레인사이트]찰나적이며 잡을 수 없는 자유로운 존재-라 실피드(La sylphide)
  • 김순정 성신여대교수/한국예술교육학회장
  • 승인 2016.02.29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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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정 성신여대교수/한국예술교육학회장

실피드는 공기(air)의 정령이란 뜻이다. 19세기 초반 프랑스 낭만주의자들은 고딕예술의 비현실적, 초월적 신비에 끌렸는데 공기의 정이라 불리는 실피드가 덧없지만 자유롭고 독립적인 존재라는 환상을 보여준다고 생각했다.

또한 스코틀랜드 고지대의 킬트문화 전통도 그러하다고 봤다. 킬트란 남자들이 착용하는 전통의상으로 허리에서 무릎까지 내려오는 스커트 형태 이다. 잉글랜드에 끊임없이 대항했던 의지와 끈기를 지닌 스코틀랜드인의 기질 역시 프랑스에게 있어서는 호기심과 경외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이 요소들을 두루 엮어 만든 발레작품이 바로 1832년 파리에서 초연된 <라 실피드>이다.

<라 실피드>는 발레하면 떠오르는 이미지인 발끝으로 서서 추는 춤(point work)과 하늘을 날아다니게 해주는 와이어(wire)를 시작한 작품이기도 하다. 뽀앙트라는 획기적인 기법과 와이어를 통해 하늘에서 사뿐히 땅으로 내려오는 듯 천상의 이미지를 획득하여 발레사에 있어 그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성역과도 같은 자리를 차지한 발레리나는 마리 탈리오니(1804-1884)다.

안무가이자 부친인 필립포 탈리오니는 오랜 기간에 걸쳐 마리 탈리오니에게 하루 6시간의 강도 높은 연습을 시켰다. 오전 2시간, 오후 2시간, 자기 전 2시간으로 나누어 연습을 시킨 것을 보면 나름 과학적이고 강도 높은 훈련법을 적용한 듯하다. 그 결과 강인한 근력에서 나오는 가벼움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몸이 가볍다고 자유자재로 춤을 출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근력이 없으면 탄력과 역동성도 생겨날 수가 없다. 마리 탈리오니는 볼품 없이 마르고 등도 구부정해서 이전에는 별로 주목받지 못하는 무용수였지만 훈련에 의한 가벼움과 더불어 특유의 기품과 우아함을 지니게 되어 당시의 이상적 여성상으로 받아들여졌고 최고의 인기를 한 몸에 받는 행운을 누리게 되었다.

▲라실피드 -마리 탈리오니

남자 주인공 제임스는 눈앞에 나타났다가 어느 순간 사라지는 실피드를 영원히 곁에 머물게 하고 싶은 욕심에 마녀가 제안한 마법의 스카프를 사용해 그녀를 사로잡으려한다. 그러나 잡았다고 생각한 바로 그 순간 날개는 힘없이 떨어지고 실피드는 제임스의 눈앞에서 맥없이 숨을 거두고 만다. 지상을 떠나 가벼워지고 싶은 인간의 욕망은 날아다니는 실피드를 무대 위에 창조해냈다.

그러나 인간의 소유욕으로 인해 자유롭고 독립적인 실피드는 생명을 잃고 만다. 요즈음 사랑이란 이름 아래 벌어지는 억압과 폭력을 보면서 <라 실피드>의 결말을 떠 올렸다. 연인에서도 부모 자식 간에도 해당되는 일이다.

러시아 유학시절 레파토리 수업시간에 1980년대 볼쇼이발레단의 뮤즈였던 알라 미할첸코로부터 <라 실피드>에 나오는 주요 춤들을 배울 기회가 있었다. 미할첸코는 평소 도도하고 차갑게보이던 모습과 달리 하나하나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며 시범을 보여주었다. 그 중 깨끗한 샘물을 두 손에 담아 제임스에게 마시게 하는 장면이나, 잡으려하나 잡히지 않는 실피드와 제임스의 시계부품처럼 정교하면서도 사랑의 느낌을 잘 표현한 2인무 안무구성과 음악의 조화는 참으로 싱그러웠다.

작년 문화예술위원회가 지원하는 학교순회사업 신나는 예술여행에 선정되어 “김순정 발레 노마드”라는 프로그램으로 혜원여고를 비롯한 각 지역 초,중,고 9개 학교로 찾아갔다. 강당, 체육관, 음악당 등에서 공연 및 해설을 하면서 바로 <라실피드>의 2인무를 선보일 기회를 가졌다.

발레를 처음 접한 어린학생과 교직원들 모두 실피드와 제임스가 보여주는 사랑과 소유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가벼움에 놀라워하며 환호와 박수를 보냈다. 낭만주의 발레 <라실피드>는 지금도 여전히 진지하고 깊이 있는 체험을 만끽하게 해 주는 뛰어난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