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대한민국 1호 복원전문가 강정식 선생]“우리는 문화유산 최종 상속자 아닌 관리자”
[인터뷰-대한민국 1호 복원전문가 강정식 선생]“우리는 문화유산 최종 상속자 아닌 관리자”
  • 인터뷰·정리/이은영 편집국장,강지원 기자
  • 승인 2016.03.03 03:26
  • 댓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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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품 실태에 관심 가져 1호 복원 전문가 돼, 힘들고 까다로운 복원 작업, 복원 이전 미술품 관리 제대로 돼야
▲대한민국1호 복원전문가 강정식 선생.

고희동, 이종우, 나혜석 … 한국 근대 미술하면 떠오르는 이름들이 있다. 근대 미술의 주역들의 빛나는 작품들 그 작품들은 홀로 빛나질 않았다. 창고 속에서 방치 되어, 곰팡이가 슬고 빛을 잃어버린 작품들…

이들을 찾아내고 되 살려 내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우리는 그 놀라운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다. 우리는 화가의 이름들은 기억하지만 이들의 이름을 잘 모를 것이다. 작품이 세상에 나오기 전 세월에 흔적을 지우고 작품에 다시 생기를 주는 이들을 복원전문가라고 한다.

국내 1호 복원 전문가 강정식 씨는 국립현대미술관이 개관할 무렵 들어와 훼손된 작품들을 보며 복원전문가의 필요성을 깨닫고 일본으로까지 가서 공부해 복원 기술들을 익혔다.

미술품에 대한 욕심이 없다고 말하지만, 우리의 작품들을 지키는 데에는 강한 욕심과 책임감이 있다고 했다. 예술을 사랑한다면 그것을 위한 환경을 만드는 일을 먼저 지켜줘야 한다. 복원보다 중요한 것은 미술품에 대한 애정과 관리고 우리의 역할은 작품을 잘 보존해서 다음 세대에게 넘겨주는 것이라고 그는 단호히 말한다. 그 말을 통해 우리는 누구보다도 예술을 사랑하는 한 사람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한국 미술 보존 상황 열악해, 일본에서보존 복원 기술 배워

한국 최초의 복원 전문가다. 어떤 계기로 복원 일을 하게 된 건가?
<근대 미술 60년 전>이라고 이 전람회를 기획하는 것을 시작으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소장품을 모으기 시작했다. 원래는 미술관의 설립 구성이라는 게 소장품이 있어야 되고, 전문가가 있어야 되고, 건물이 있어야 됐는데, 국립현대미술관은 1969년 개관될 무렵 소장품이 전무 했다. 근데 이때까지만 해도 근대 미술에 대한 인식이 아주 전무한 그런 상황이었고, 특히 유화
쪽이 그러했다. 이경성 선생님이 쓴 도록을 보면 우리나라 근대 미술은 실종됐다라고 했었다.
우리나라 유화 시초는 일본으로부터 공부하고 들어온 1910년대 고희동, 김관호, 김찬영 그분들인데, 귀국해서 한10여 년 동안 유화를 하다가 사회적으로 적응이 안 돼 전통회화를 하시는 분도 있었다. 고희동도 1960년대 중반인가 돌아가실 때 전통회화로 다시 돌아서서, 그 분 작품도 과천에 있는 자화상 2점 일본 동경예술대학에 있는 자화상 한점까지 그 3점만 남고 지금은 하나도 없다. 선전 때 출품했던 도록에는 몇 점이 기록에는 있는데 작품으로는 안 남아있다.

김관호도 국내에는 한 점도 없고 지금 동경예술대학에 한두 점 있다. 이렇듯 남아있는 유화작품들은 찾기 힘들었다. 당시 새로운 것 이질적인 것은 받아들이지 않는 분위기였고 또 거기다가 남아있는 작품들도 일제 거치고 6.25 거치고 하면서 많이 없어졌다. 남아있는 작품들조
차 원형을 찾아보기 힘든 그런 상황들이었다. 그래서 <근대미술60년전>을 준비하면서 안타까움을 느꼈다. 예를 들어 고희동이 1915년에 동경예술대학 졸업하던 그 해에 제작됐던 작품인데 (자료사진을 보여주며) 이렇게 많이 훼손됐다. 이 작품도 작가가 돌아갈 무렵까지도 어디 있는지 조차도 관심이 없었으니….

이 전람회를 위해 작품을 발굴하는 과정에서 고희동 유족들을 탐문했는데, 유족들도 이런 작품들 어디에 있는지 몰랐다. 그래서 짐을 정리하고 벽장을 정리하다 보니 한쪽 구석에서 발견됐는데, 작품의 가치가 이해가 됐더라면 그렇게 묻혀 있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당시 전람회 때는 기술이 없어 어쩔 수 없이 훼손된 작품들을 그대로 전시 할 수밖에 없었다.

▲대한민국1호 복원전문가 강정식 선생.

전람회를 계기로 복원에 관심을 가진 건데, 그 당시 어떻게 국립현대미술관에 들어가게 됐는지?
국립현대미술관에 처음에 보존전문가로 들어간 게 아니고 관리직 공무원이었다. 그러다가 전람회를 계기로 작품의 훼손 문제 같은 것들을 해결해야 된다는 고민과 의무감이 생겼다. 그 무렵 우리 정부가 동경예술대학에 우리 직원 연수파견을 요청해 협의 끝에 연수를 받게 됐다. 79년에서 86년까지 3~4년 동안 연수를 했다. 또한 동경문화재 연구소에서 객원연구원으로 고야노 회화보존연구소에서
복원에 대해 배웠다. 8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작품들을 복원하기 시작해서 91년에는 수복된 작품들 한 100 여점 가운데 몇 점을 선별해서 전람회를 열었다. '근대유화 복원에 대한 새로운 기술의 장이다' 는 취지로 이 전람회를 4개월동안 관계 전문가는 물론이고 화랑하는 사람들, 애호가들한테 유화 복원에 대한 인식을 재기시키는 그런 기회가 됐다.

복원의 윤리를 지켜야 제대로 된 복원

복원에 원칙이 있다고 들었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
19세기 이전에는 소위 윤리, 복원의 윤리라는 것이 정립이 안 돼, 보기 좋게만 하자 그런 분위기였다. 19세기 이후에는 윤리적인 문제가 대두되어 원화를 존중하고 원상태로 복원해야한다는 목소리가 높았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외국에서도 19세기 이전에는 복원하는 사람들이 자기 임의대로 왜곡하고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하다가 19세기이후에는 윤리적인 문제가 강조됐다. 보존 원칙을 보면, 문화재 영속성을 보장하고, 철저히 원형을 존중하는 윤리적인 문제를 지켜 문화재의 가치를 유지하는 것이다. 그래서 복원할 때는 항상 그 전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한다. 더 좋은 기술이 나오면 그 기술을 쓸 수 있게.

복원 과정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설명해준다면?
아시다시피 유화는 캠퍼스 위에 이렇게 오일을 물감에 개어가지고 그리는 건데 캔버스는 계속 신축 작용을 계속 하는 데 반해서 유화 물감은 그런 움직임이 덜하다. 그래서 이 스트레스로 인해 균열이 생긴다. 또 우리나라는 서양 유럽 쪽에 비해 여름에 덥고 습하고 겨울에 춥고 건조하다. 그런 계절을 지나면서 균열이 가고 떨어져 나가거나 곰팡이가 생긴다. 그래서 복원의 첫 번째는 곰팡이라던가 때를 제거하는 거고 두 번째는 훼손된 캔버스를 보강하기 위한  배접을 하는 원리, 세 번째는 떨어져 나간 부분을 보존 처리과정이다.

이 기술이 지금 이 시점에서는 이상적인 재료고 이상적인 기법이라고 하더라도 세월이 많이 지나가면 이것도 자꾸 기술과 재료 발달하게 된다. 복원작업은 차후 보존처리시 지장을 받지않도록 가역적인 방법을 선택해야 한다. 즉 유화물감도 오리지널하고 용해도가 다른 것, 오리지널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제거가 가능한 그런 물감, 맨 위에 작업을 하는 니스도 제거 가능 한 것을 쓴다. 니스를 뿌리는 목적은 그림은 보존하기 위한 목적, 또 시각적인 목적 등 여러 가지 목적이 있다. 그 니스도 제거가 가능한 용제를 쓴다. 원화 유지를 가장 최우선으로 하고 훼손이 많이 된 작품에 대해 사진이라든가 기록이 있으면, 원화대로 추적이 가능 한데 그런 게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부분이 이렇게 다 나가버렸다면, 이 부분을 주변 색하고 비슷하게 하는 것이 원칙이다. 주위 분위기에 맞게 해야지 왜곡해서 그려 넣지 않는다.

▲대한민국1호 복원전문가 강정식 선생.

오늘날에는 인공위성을 비롯해 첨단 장비가 복원에서 사용되고 있다. 복원을 위해 장비 사용도 많이 하는 편인가?
미술품의 조사에는 미술사적인 조사, 회화수복가에 의한 작품의 노화, 훼손상태 등의 조사와 더불어 최근에는 자연과학적 조사방법으로 가시광선, 자외선, 적외선 등 빛을 이용한 회화 표면의 조사를 한다. 더불어 내부구조를 파악할 수 있는 엑스레이 촬영 등 과학기자재가 동원되고 안료를 분석하는 미량 박편 검사 등도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종합적인 진단 결과에 따란 복원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미술품 보존의 첫째는 환경 조성, 적당한 온도, 습도 중요해

미술품이 일반가정에까지 널리 보급된 시대를 살고 있다. 가정에서 작품 보존을 신경 쓰는 게 쉽지 않은데.
미술품 보존은 첫째는 환경을 조성해주는 일이고, 가까이서 미술품을 대하는 소장자 자신이 항상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는 것이 중요하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문화유산의 최종적인 상속자가 아니라 관리자다. 이걸 고이 간직해가지고 후손들에게 물려줘야할 사명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림도 역시나 물질이기 때문에 환경에 적용을 받는다. 특히 온도와 습도 그리고 조명이다. 아까 말씀드린대로 우리나라 기후 조건이 유럽 특히 서양 유럽에 비해서 고온 다습 저온 저습하다. 그래서 문제가 겨울에 그 저온 저습의 상태에서 온도가 높아지면 더 건조해지고 거기서 균열 같은 문제가 나타난다. 여름에는 고온고습으로 곰팡이 문제나 캔버스의 변형 또한 일어난다.

온도와 습도 이외에도 조명도 지적했는데
자외선은 그림을 퇴색·변색시킨다. 1970년대 내가 미술관에 있을 때만해도 남산의 '야외 미술 전시장'이라해서 야외에 전시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국립미술관이 그런 무지막지한 전시를 할 정도로 보존에 대한 인식들이 별로 없었다. 80년대 이후에서야 보존 관리에 대한 중요성을 깨달았지. 그래서 미술관이나 박물관의 빛은 자외선을 차단을 한 그런 빛이다. 햇빛에 노출되지 않는 것을 최선으로 하고 그림을 걸 적에도 가능하면 외벽에 접한 데는 걸지 않는다. 부득이 걸 적에는 작품하고 벽하고 스펀지를 넣던지 해서 간격을 둔다. 이러지 않고 무관심으로 몇 년을 걸어놓으면 습해져서 뒤에 곰팡이가 나오고 한다. 관리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한 현재에는 햇볕이 직접 미치는 그런 문제는 없다.

많은 작품을 복원해왔다. 특별히 기억에 남거나 어려웠던 작품이 있다면?
고희동 작품이 제일 기억에 남고 보람 있었다. 동경예술대학은 졸업할 때 의무적으로 작품을 한 점씩 제출하게 돼 고희동의 자화상도 소장돼 있었다. 내가 복원한 작품이 그 무렵 같이 제작된 자화상인데, 당시 동경예술대학에서 연수하면서 고희동의 1호 작품을 내가 복원한다는 게 뜻 깊었다. 어려웠던 작품으로는 김환기 작품이 있다. 김환기 초기 작품은 물감 층이 얇았지만 점점 물감 층이 두꺼워 진다. 물감 층이 두터우면 원래 복원하기 어렵다. 더 쉽게 떨어지고 메꾸기가 힘들다. 이 작품 돌담길 같이 이렇게 균열이 가고 떨어져 나가면 참 어렵다.

▲대한민국1호 복원전문가 강정식 선생.

고희동, 김환기 작품 기억남아, 미술품 소장에는 욕심 없다

많은 작품을 봐왔는데, 소장한 작품은 얼마나 되나?
조선대학교에 있다가 세상 떠난 진양옥 작품하고 도상봉씨 딸에게 10년전에 산 작품이랑 해서 몇 점 있다. 미술관에 일하는 사람이 그림에 욕심을 가지면 안된다는 생각이다. 백남준 작품의 작업을 할 때 백남준 누나가 작품을 준다고 해도 안 받았다. 진양옥 작품도 내가 조선대학교에서 강의를 할 때 그 분이 학장을 했는데, 그래서 나한테 고생한다며 꼭 주고 싶다 해서 받은 것이다. 미술관 다니면서 욕심은 금물이다. 1969년 미술관이 개관한 후 그 곳에 종사했다 퇴직한 행정직, 전문직들의 모임에서 회장을 맡고 있다. 과거 어려웠던 과정들을 많이 겪으면서 변모된 오늘의 미술관이야기들을 나누곤 한다.

또 다시 이슈가 되고 있는 천경자 ‘위작’사건에 대해 당시 보존실에 있었으니 작품을 보았을 거라 생각이 되는데.
천경자 사건에 대해서 나는 미술관에 몸담았기 때문에 거기서 결론 내린걸 따라야지. 어제는 sbs에서 전화가 와서 인터뷰를 해야겠다고, 천경자 얘기를 하는 거야. 나는 모른다고 미술관에 물어보라고 했다. 아는 것도 얘기가 잘못 전달되면 오해 아닌 오해만 생길 수 있으니까.

은퇴 후 후학양성은 되고 있는 상황인가? 복원 전문가현황이 궁금하다.
요즘 보면 유화 복원하는 사람 젊은 사람들도 몇 있고 사적으로 몇 명 그리고 현대 미술관에 한두 명 있다. 요즘은 젊은 사람들이 어렵고 한 것을 안 배우려 하는데, 그게 나는 안타깝다. 이게 한두 해 해서 될 일 도 아니라 요즘 젊은 얘들은 쉽게 되는 일을 원하지 어려운 일은 관심들은 많은데 막상 잘 하려고는 하질 않는다. 또 사람들 인식 또한 부족해서 사회적으로 인정을 덜 받는다. 그래서 이런 일들이 중요하다는 인식을 바꿔야지 하는 사람들도 자신이 힘들더라도 어떠한 사명감을 가지고 할 수 있다.

회화 보존 수복 연구가 강정식은 1972년 경복궁 국립현대미술관의 소장미술품 관리를 맡으면서 미술품과의 인연을 맺었다.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을 모으던 중 한국의 미술품들의 열악한 실태에 안타까움을 느낀 그는 79년과 82년 86년, 그리고 90년, 모두 네 차례에 걸친 일본 연수를 통해 동경미술대학과 고야노 회화보존연구소에서 복원에 대해 공부했다. 그 이후 한국으로 돌아와 손상된 작품들을 찾아내 복원했으며, 91년에는 국내 최초로〈회화와 수복전〉을 열어 보존과학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을 환기 시켰다. 대한민국 1호 복원전문가로서 다량의 작품들을 복원해 온 그는 98년 국립현대미술관 보존과학 담당관직을 정년퇴임했다. 그 후에도 '강정식 회화 보존 수복 연구소'를 운영하며 현재까지 미술품과의 삶을 이어 나가고 있다.

인터뷰·정리 / 이은영 편집국장
강지원 기자 press@sctoda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