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아, 김수환 추기경』펴낸 전기작가 이충렬
인터뷰 /『아, 김수환 추기경』펴낸 전기작가 이충렬
  • 이승철 시인/ 한국문학평화포럼 사무총장
  • 승인 2016.03.18 13:4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전인적 삶과 시대정신의 진수를 보여주다
▲전기작가 이충렬 씨가 펴낸『아, 김수환 추기경』(전 2권, 김영사 간행)

김수환 추기경(1922―2009)의 삶과 사랑, 그 정신을 오롯이 보여준 전기『아, 김수환 추기경』(전 2권, 김영사 간행)이 최근 출간되어 화제다.

선종 7주기를 맞아 출간된 이 전기는 김 추기경의 87년 생애를 담아냈음은 물론, 내면세계와 영성의 완성까지 아름다운 한 인간의 모든 것을 철저한 사실에 근거하여 온전히 되살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김수환 추기경 관련 책으로는 유일하게 <천주교 서울대교구>의 공인 전기로 인정받았으며, 단순히 생애의 완성에 그친 것이 아니라, 굴곡진 대한민국의 현대사를 생생히 복원해낸 책이다. 유례없는 출판 불황 속에서도 출간 보름 만에 2만부를 발행하는 등 현재 교보문고 종교분야 베스트셀러 2위를 기록하고 있다.『아, 김수환 추기경』의 저자, 이충렬(63세) 전기작가를 만났다.

 ‘소설가’로 등단했는데, 요즘 ‘전기작가’로 명성을 날리고 있다. 어떤 계기로 전기작가로 나서게 되었나?
계간『실천문학』1994년 봄호에 단편 <가깝고도 먼길>을 발표하여 소설가로서 첫발을 내딛었다. 이 소설은 최인훈의 소설 <광장> 이후의 중립국 포로의 삶을 다룬 이야기다. 1976년 스물세 살 나이에 부모님을 따라 미국으로 이민을 갔고, 이후 오랜 문청시절의 꿈을 이뤄 작가가 되었지만, 미국에서 20년 동안 살다보니 소설의 현장성에 스스로 한계를 느꼈다. 그 때문에 한때 역사소설을 집필하려고 몰두하기도 했다. 독서를 통해 자연스레 한국 근현대 문화예술인들을 만났다. 그런데 이들 문화예술인들을 삶을 제대로 담아낸 ‘인물전기’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서 ‘전기작가’로 나서게 되었다. 

▲최순우 옛집에서 저자 이충렬

간송 전형필(우리문화재 수장가), 혜곡 최순우(전 국립중앙박물관장), 수화 김환기(한국 추상미술의 거장)의 삶과 예술을 다룬 전기로 한국의 대표적 ‘전기작가’의 반열에 올랐다. 하지만 김환기 탄생 100주년 기념으로 출간한 책 때문에 고통을 겪지 않았는가? 
지난 2010년부터 전형필, 최순우, 김환기 등 ‘한국문화예술 인물사’ 3부작을 집필, 출간하여 언론과 독자들로부터 찬사와 사랑을 받았다. 우리 문화를 빛낸 3총사를 ‘평전’이 아닌 ‘전기’ 형식으로 쓴 것이다. ‘평전’이 한 인물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우선시되는 책이라면 ‘전기’는 스토리텔링 형식으로 한 인물의 삶을 재현한 저술이다. 미국에는 조지 워싱턴이나 링컨 관련 전기가 수십 권이 나와 있다. 스티브 잡스가 타계하자마자 그의 전기가 미국에서 곧바로 출간되는 걸 봤다. 청소년 시절에 에디슨이나 처칠, 혹은 퀴리부인 전기를 읽고서 그들을 좌표로 삼아 미래를 꿈꾸지 않았던가. 우리도 이 땅의 인물들을 다룬 ‘전기문학’에 보다 큰 관심이 요구되고 있다.

▲저자 이충렬

김환기 탄생 100주년을 맞아 그의 삶과 예술을 다룬 전기『김환기-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를 2013년 3월에 ‘유리창’ 출판사에서 출간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환기미술관’ 측으로부터 저작권 위반으로 고소당하는 일을 겪었다. 도판사용 허락을 위해 원고를 검토한 환기미술관 측에서 일부 내용의 삭제를 요청하는 ‘삭제요청서’를 건넸는데, 그 부분들은 사실에 어긋나지 않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창작과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라고 판단하고 작가적 양심을 지키기 위해 거부했더니, ‘명예훼손’으로는 걸지 못하고 김환기 화가의 ‘일기’를 부분적으로 인용한 것이 저작권법 위반이라고 고소한 것이다. 검찰에 의해 무혐의 불기소처분을 받았지만, ‘환기미술관’ 측은 다시 항소하고 ‘1억원 손해배상’ 민사소송을 제기했다. 약 1년 동안 재판을 끌다가 ‘환기미술관’ 측과 합의하고 끝냈다. 합의 내용은 ‘책의 절판, 폐기, 1500만원’의 배상이었다. 나름대로 혼신을 다해 쓴 책을 ‘분서갱유’하라는 요구에 합의해준 것이다.

 공들여 쓴 ‘김환기 전기’가 ‘한국판 분서갱유’를 당했는데, ‘표현의 자유’가 침해된 그 같은 비문화적 행태에 대해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고통을 겪은 후에 왜 하필이면 김수환 추기경 전기를 집필한 것인가?      
문화인물 3인을 조명한 이후에 우리 사회를 빛낸 세 사람을 써보자고 마음먹었다. 해방 이후 이념의 대립 때문에 우리에게는 좌우 양쪽에서 모두 존경받는 어른이 드물다. 그러나 김수환 추기경의 경우 종교인이지만 사회적 인물로 국민적 존경의 대상이라고 생각한다. 2009년 한국갤럽의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우리 국민의 열 명 중에 아홉 명이 김수환 추기경을 존경한다고 했다. 카톨릭은 물론 다른 종교 신자와 무신론자들도 존경하는 첫 번째 인물로 김수한 추기경을 꼽았다. 각자의 이념과 종교를 떠나 김수환 추기경을 모두 ‘시대의 표상’으로 존경한다는 것은 이념적 갈등이 첨예한 대한민국에서 참으로 놀라운 현상이라고 생각했다. 이에 3년 전 ‘김영사’ 출판사와 출판계약을 맺어 집필 작업에 착수했고, 이번에 출간하게 되었다.

▲(좌)2007년 5월 동성고 100주년 기념행사를 위해 학교를 방문한 김수환 추기경이 자신의 자화상 ‘바보야’와 함께 웃고 있다 ▲(우)서울대교구 퇴임신청을 수락해 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며 교황청을 나서는 김수환 추기경(1998.5.14.) (사진제공=김영사)

김수환 추기경 전기 외에 이충렬 작가가 쓰려고 하는, 우리 사회를 빛낸 나머지 두 명은 누구인가?
이건 아직 영업비밀인데(웃음), 털어놔도 될지 모르겠다. 그 한 사람은 ‘국제법의 아버지’라고 일컬어지는 백충현 선생이다. 그는 국제법적 논리로 외규장각 도서반환을 이끌어낸  분으로 독도 문제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로스쿨에서 ‘국제법’ 강의가 2년 후에 사라진다고 하여 지금 외교부에서 매우 곤혹스러워한다고 들었다. 강대국 논리의 지배하에 있는 국제법 분야에서 백충현 선생처럼 우리 사회에서 꼭 필요한 일을 묵묵히 해내신 분도 귀중한 존재이고, 자신의 자리에서 국가와 민족을 위해 묵묵히 노력한 분들도 발굴되고 조명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서다. 다른 한 분은 아직 유족 측과 협의가 끝나지 않아 밝힐 수는 없지만, 평생 가난하게 살면서 우리사회에 빛을 던져준 분이다. 

이 전기는 가톨릭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었기에 가능한 저술이라고 생각되는데, 김 추기경과 생전에 어떤 인연이 있었고, 이 책을 쓴 결정적 동기는 무엇인가?
청소년 시절 천주교 서울대교구 산하의 동성중고등학교를 다녔다. 김수환 추기경이 이사장을 맡고 있던 가톨릭 학교다. 당시 살던 집은 서교동인데 시험을 봐서 동성중고에 입학해 혜화동까지 6년을 다녔다. 1969년 김수환 추기경님으로부터 견진성사를 받았고(세례명: 실베스텔), 1972년 2월 졸업식 때는 졸업식 축사를 들었던 인연이 있기도 하다. 하지만 그 이후 추기경님을 직접 만나 뵐 수 있는 기회는 없었다. 1976년 아버님의 사업실패로 우리 가족이 모두 서울을 떠나 미국 이민행을 택했다. 미국에서 생존을 위해 봉제공장, 야채가게, 편의점, 병원 청소부, 육류가게 직원으로 전전하다가 1990년 중반부터 멕시코 국경 근처의 아리조나주 피닉스에서 ‘이씨네 잡화상(Lee's Discount Store)’이라는 상호로 도소매 장사를 했다.

▲김수환 대주교 착좌식. ▲(좌) 명동성당 입당하는 모습 ▲(중) 취임 서약 ▲(우)사제들의 순명서약을 받는 모습. (사진제공=김영사)

말하자면 온갖 직업을 전전하면서 밑바닥 삶을 살다가 자영업자가 되었고, 청소년 시절 간직했던 문학의 꿈을 이루고자 마흔 한 살 때 비로소 소설가라는 이름을 얻었던 삶이었다. 자식 세 명이 대학을 졸업하자 비로소 가정이라는 질곡에서 해방되었고, 이후 아리조나 피닉스에서 장사를 하면서 글쓰기에 전념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시대의 인물이 정리되어야 역사가 정리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고, 소설가보다는 전기작가로 나서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내가 김수환 추기경 전기를 쓰겠다고 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물었다. 왜 하필 김수환 추기경이냐고. 김수환 추기경은 우리 현대사에서 몇 안 되는 정신적 지도자 중 한 명이라고 생각했다.

그분은 누구보다도 가난하고 소외받는 약자들을 사랑했고, 정치적 억압이 가중되던 1970―80년대 군사독재 시절에 한국 민주화운동에도 적극 앞장선 분이다. 그분은 도저히 풀 수 없을 것 같던 시대적 난제를 대화를 통해 풀어냈던 사회 갈등의 중재자이기도 했다. 김수환 추기경께서 생전에 보여준 삶과 정신, 그가 추구했던 가치관에서 우리 사회가 가야 할 길과 방법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 책을 쓴 결정적 이유이다.

▲(좌)목동 무허가촌 방문. ‘예수의 작은 자매들의 우애회’가 목동 무허가촌 인근에 설립한 ‘협조의 집을 방문한 모습 ▲(우)막달레나 집에서 윷놀이 하는 김수환 추기경. (사진제공=김영사)

이번 책을 통독해보니 작가의 치밀한 ‘사실 검증’으로 새로운 사실을 많이 알게 되었다. 김 추기경님의 여러 일화와 에피소드도 흥미롭게 읽었다. 옹기장이 막내아들로 태어나 열두 살 때 형님과 함께 사제의 길을 걸었고, 현재 경북 군위면 집이 생가가 아니라 옛집이라는 것, 일제 강점기 때 신학생으로 일본 유학중에 사병으로 강제징집을 당했고, 종전 후 일본군 전범재판에 증인으로 섰다는 것, 세계 최연소 추기경으로 선임된 배경과 이유 그리고 박정희, 전두환 군사독재시절에 구속을 불사하고 시대의 아픔에 동참한 사실들, 특히 사목 목표인 ‘세상 속의 교회’를 실천하고자 가난하고 소외받는 이웃과 노동자들을 돌보는 데 앞장선 여러 이야기들이 나온다. 또한 김 추기경님의 아호가 ‘옹기’라는 것을 이 책을 통해 처음 알 수 있었다.그런데 집필 도중 너무 힘들어 중도에 그만둘까도 생각하는 등 책이 어렵사리 완간된 걸로 알고 있다.

김수환 추기경은 하느님이 가장 사랑한 존재가 다름아닌 인간이라고 믿었다. 그러기에  인간존엄성을 침해하는 불의에 저항했고, 인권과 사회정의를 위한 일이라면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것이 바로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가르침이었고, 그 뜻을 자신의 전 생애를 통해 밀고 나간 분이다. 추기경님의 삶을 조명한다고 했을 때 역사적 사실과 다른 지나친 ‘우상화’는 있어선 안 되고, 또 그것은 추기경님이 바라던 바도 아니었다. 잘못 알려진 어떤 사실, 그리고 관련 사진에 얽힌 정확한 설명을 위해 수없이 크로스체크를 했다.

▲김수환 신부의 서제 서품식이 끝나고 찍은 가족사진. 오른쪽이 어머니 , 그 옆 위가 둘째형 , 그 뒤에 안경낀 위가 큰 고모부.(사진제공=김영사)

우리나라에 제대로 된 전기문학이 없는 실정이기에 사명의식으로 작업을 했다. 집요하게 파고드는 것을 재미있어 하고 좋아하는 성격이라 마치 탐정처럼 하나의 팩트를 완성하기 위해 방대한 자료를 수없이 섭렵했는데, 그 분량이 사과상자 15박스였다. 아울러 장익 주교 등 21명을 직접 인터뷰했다.

애초에 대중적 확산을 위해 500쪽 분량의 단행본 한 권으로 펴내려고 했다. 그런데 어느 날 KBS 사장을 지낸 정연주 선생과 만남에서 김수환 추기경 전기를 쓸 계획이라고 말하니 대뜸 그가 “추기경 책이라면 읽든 안 읽든 따지지 말고, 최소 1000쪽 분량으로 펴내야 한다.”고 주장했고, 결국 이에 동감하여 2권 분량의 단행본으로 출간키로 작정했다. 김 추기경의 삶과 시대를 실감나게 묘사하고 독자들의 감정이입을 위해선 무엇보다도 나는 사진자료가 중요하다고 생각했기에 미공개 개인앨범은 물론이거니와 천주교 각 교구와 단체에 사진을 입수하기 위해 수십 차례 협조공문을 발송했다. 또한 주요 일간지에 실린 관련 사진을 구입하여 추기경의 87년 생애 궤적을 사진을 통해서 온전히 되살리려 했다.

그런데 사진 자료가 너무 많은 곳에 흩어져 있던 탓에 입수가 잘 안 되고, 차일피일 미뤄졌을 때 몇 번이나 좌절감을 맛보았지만 결국엔 3년째가 되었을 때 “당신 열정에 탄복했다.”는 말과 함께 대부분의 사진자료를 구할 수 있었다. 총 1000여 장의 사진을 열람했고, 100장의 미공개 사진을 포함 360여 장의 사진을 이 책자에 싣기로 결정했다. 또한 초고 1만매를 절반으로 압축, 4500매 분량으로 최종 탈고를 할 수 있었다. 그러고 나서 출판사의 편집작업에 참여하기 위해 3개월 전부터 미국에서 한국으로 건너왔다. 

김수환 추기경의 전인적 삶의 궤적을 보여주기 위해 무척 고생하신 점에 대해 독자의 한 사람으로 감사드린다. 끝으로 작가는 이 전기를 통해 독자들에게 어떤 점을 설득시키려 했는지 궁금하다. 독자들에게 전하고픈 작가의 의도는 무엇인가?
김수환 추기경의 정신과 행동이 지금 이 시대에도 굉장히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이 책을 통해 사회갈등에 처한 우리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울림이 되는 목소리를 전하고자 했다. 추기경은 사회갈등 해소를 위해 첫째,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자세를 보여주었고, 둘째 상대에 대해 욕과 비난이 아니라 설득의 논리를 제시하려고 했다.

▲(좌)명동성당에서 농성을 끝내고 김수환 추기경을 방문한 권영길 민주노총 위원장(1997년 1월 24일) ▲(우)박종철 군 추모와 고문 근절을 위한 인권 회복 기구 미사 집전. (사진제공=김영사)

엄혹한 유신시절, 박정희 대통령과의 만남 자리에서 추기경은 교회적 관점에서 왜 그러한 목소리를 낼 수밖에 없는지 사회정의, 인간존엄의 관점에서 설파하여 국민적 입장을 대변했다. 또한 전두환 5공시절, 특히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때는 명동성당에서 미사를 집전하면서 “지금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너희 아들, 너희 제자, 너희 젊은이, 네 국민의 한 사람인 박종철은 어디 있느냐?”라고 말씀하시는 등 ‘정권타도’를 외치기보다는 국민들이 누구나 공감하는 논리로 사회적 현안에 대해 깊은 성찰을 제시해준 분이다.

추기경님은 항상 기도하였고, 책을 보거나 공부하면서 상대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등 귀가 열린 분이었다. 지금 우리사회는 ‘원로’가 없다고 한다. 자신의 생각과 다를 때 원로를 배척하고, 매도하는 시대다. 만약 추기경께서 살아있다면 “이렇게 높고 많은 목소리에서 내 목소리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인간에 대한 따스함과 상대방에 대한 존중하는 마음이 있을 때 우리사회의 갈등도 해소될 수 있다.

우리는 지금 너무나 이념적으로 서로 갈라져 있다. 사회통합을 위해 먼저 정치가들이 변해야 마땅하다. 그리고 사랑이 없는 구호는 갈등 해소에 도움이 안 된다는 점도 인식해야 한다. 전임 지도자의 삶에 대해 비판할 것은 비판하되, 배우는 자세 또한 중요하다. 그리고 올바른 역사인식의 형성을 위해 총체적 장르인 ‘전기문학’이 반드시 필요하며, 전범적 삶에 대해 자유롭게 쓰고, 읽는 풍토가 조성되어야 한다. 아직은 미약한 민주주의라는 과정을 슬기롭게 헤쳐 나가려면 한국에서도 전기문학이 반드시 뿌리내려야 한다. 내가 김수환 추기경의 전기를 쓴 의도가 바로 이 때문이다. 

<전기작가, 소설가 이충렬 주요 경력>

  1954년 서울에서 태어나 동성중고를 졸업했고, 대학 재학 중인 1976년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 갔다. 미국 LA에서 격월간지 <뿌리> 편집장을 역임했고 <샘이 깊은 물>, <한겨레>, <경향신문>, <국민일보> 등에 르뽀와 칼럼을 발표했다. 마흔한 살 때인 1994년『실천문학』봄호에 단편 <가깝고도 먼길>를 통해 소설가로 등단했다. 주요 저서로『그림 애호가로 가는 길』,『그림으로 읽는 한국 근대의 풍경』등이 있다. 아울러『간송 전형필』,『혜곡 최순우, 한국미의 순례자』,『김환기,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아, 김수환 추기경』등은 한국 전기문학의 새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현재 미국 애리조나주 피닉스에서 자영업을 하면서 한국을 오가며 집필 작업을 병행하고 있다.

 
                                            인터뷰 ․ 정리 / 이승철(시인, 한국문학평화포럼 사무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