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수의 미술칼럼]예술작품 어떻게 볼 것인가.
[박정수의 미술칼럼]예술작품 어떻게 볼 것인가.
  • 박정수 미술평론가/정수화랑 대표
  • 승인 2016.03.18 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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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수 미술평론가/정수화랑 대표

예술작품은 어렵다. 도무지 알 방법이 없다. 전시장을 돌면서 의미를 알 수 없는 작품앞에서 몇 초 동안 머물면서 고개를 끄덕여야 하는 우리는 무식함을 감추기 위함인가 아니면 잘난  척 하기위한 고도의 계산된 행위인가.

보통사람(전공하지 않은 일반인)과 함께라도 할라치면 아는척 해야 하고 고상좀 적당히 떨어줘야 전공자로서 체면이 다소선다. 그것이 풍경화이거나 추상화이거나 상관없이 잠시 멈춰줄 줄 아는 우리는 시대가 낳은 교양인들이다.

현대미술이라는 이름의 것들은 더욱 어렵다. 봐도 봐도 모르겠다. 어디선가 비싸다는 말만 들어도 더 좋아 보이고, 비자금이나 상속을 위한 비리가 연루된 작품이라면 그것이 더 좋아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고속도로 휴게소나 터미널의 한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미술품을 보고 ‘그것은 예술이 아니다’라고 말하면서 ‘왜 예술이 아닌가?’에 대한 명확한 해답은 찾지 못한다. 무엇인가를 보고 그것을 평면으로 옮겨내는 정밀묘사와 같은 물건을 유화물감으로 엇비슷하게 그려낸 미술품과의 차이점은 무엇이란 말인가. 예술작품(여기서는 미술)을 보는 입장은 다양하다. 남들이 좋다고 하는데 나는 싫고, 나는 좋은데 남들은 좋다고 한다.

시골에 계신 여든이 넘으신 노모께서는 평생 미술작품 없이도 잘 살아 오셨다. 자식이 미술책을 내고 신문에 나오면 신문을 자랑할지는 몰라도 무엇을 하는지 어떤 일을 하는지는 그다지 중요한 일은 아니다. 여기서 문제는 예술작품이라는 것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의 문제와 예술이 과연 어디쯤에서 가치를 획득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 주요 키워드다.

미술작품은 ‘보는’것에 중점이 있다. 시각예술이라고는 하지만 굳이 시각이니 예술이니 할 것 없이 보는 예술 혹은 만져도 되는 예술의 영역이다. 음악이나 무용은 듣고 보지만 만질 수 없고, 문학은 책을 만질 수는 있어도 텍스트와 함께하는 내용을 획득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보는 것’과 ‘듣는 것’ 그리고 ‘생각하는 것’의 차이점만 이해한다면 미술작품에 대한 의문은 어느 정도 해소될 개연성이 있다.

“작품 설명 좀 해줘!”
“그냥 보고 느끼면 돼.”

무엇을 보고 따라그린것도 아닌데 그것을 보고 무엇인가를 느껴야 하는 의무감에 휩싸인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교양없는 사람이 되고 만다. 그러면서 소위 전문가라 칭해지는 큐레이터나 학예사, 혹은 도슨트님(?)들은 “모방이 아니라 정신에 대한 감흥이나 철학적 사고 문제가 우선되기 때문에 이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접근조차 어려워 졌다.”고 설명하다. 현대 미술은 과거와 현재, 시간과 공간을 아우르는 정신 지향적 이미지를 사회계층의 중간쯤에서 관찰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고 설명해 준다.

어렵고 힘든 미술이지만 이번 주말에는 인사동이나 예술의 전당, 국립현대미술관을 방문해 보자. 그렇게 어렵다는 미술품을 구경이라도 해 보자. 이해할 수 없으면 없는 대로 보이면 보이는 대로 그냥 그렇게 방문해 보자. 이미 미술작품에 담긴 의미를 이해할 수 없다면 그냥 이해하지 말고 쳐다보고 내 맘대로 생각하자.

미술작품에서 감상(鑑賞)이란 예술 작품을 이해하여 ‘즐기고 평가’하는 것이라 하였다. 수준에 맞는 예술품이란 없다. 예술이라는 것은 창작의 영역이기 때문에 언제나 낯설고 어색하다.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으라는 것이 아니다. 생각에 맞지 않는 다른 생각을 하는 예술가들의 곁에 슬며시 머물러보자.

다른 세상과 다른 생각과 다른 이야기들이 있다. 기차를 타고 비행기를 타고 여행하는 낯선 동내에서 느끼는 새로운 생각들을 여기에서도 가질 수 있다. 어색한 것을 즐겨볼 필요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