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자 특별인터뷰]류영수 류무용단 대표/제7회 서울문화투데이 문화대상 젊은예술가상
[수상자 특별인터뷰]류영수 류무용단 대표/제7회 서울문화투데이 문화대상 젊은예술가상
  • 인터뷰 정리/이은영 편집국장,강지원 기자
  • 승인 2016.04.04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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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적인 향이 물씬 풍기한국에서만 할 수 있는 전통을 보여주고 싶다.
▲제7회 본지 <서울문화투데이> 문화대상 젊은예술가상을 수상한 류영수 류무용단 대표/상명대학교 문화기술대학원 공연예술경영학과 겸임교수.

한 소년이 있었다. 대학입시라는 절체절명의 장벽 앞에서 그는 잠시 혼란스러웠다. 그가 원하는 어떤 곳에 도달하기에는 자신의 성적은 영 못미쳤다. 그런 소년이 어느 날 주변의 친구들로부터 무용을 하면 대학 진학이 쉽다는 얘기를 들었다. 솔깃했다. 그 때까지 자신이 춤을 수단으로 무엇인가를 한다는 생각은, 단 한 줄도 그의 머릿속에 저장된 문장에는 없었다.

‘친구따라 강남간다’는 속담처럼 그는 어느 사이 무용학원에 등록을 했고, 열심히, 열심히 땀 흘리며 입시를 위해 한 발 한 발 다가갔다. 운이 좋았던 걸까? 무용대학의 명문인 한양대에 덜컥 입학한다.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도 춤이 자신에게 운명이 될 줄 몰랐다. 그저 주어진 일이라 성실히 해냈을 뿐이었다. 그런 그가 20대 후반이 돼서야 춤과 자신이 ‘한몸’이라는 깨달음을 얻는다. 이제 진정한 삶의 목표가 생긴 것이다. ‘춤을 통해 내 인생을 써보자라고.

이상은 올해 제7회 본지 <서울문화투데이> 문화대상 젊은예술가상을 수상한 안무가이자 무용수인 류무용단의 류영수 예술감독의 스토리다. 아직 불혹의 나이가 채 되지 않은 그는 큰 판을 벌이기를 좋아한다. 적어도 기자가 볼 때는 그랬다. 그런 질문에 그는 아직도 앳된 소년같은 쑥쓰러운 표정으로 ‘선생님들께서 정말 과분한 사랑을 많이 주셨다’며 자신을 한없이 낮춘다.

그의 프로필 중 ‘이사장’이라는 직함이 있어 기자는 사실 그에 대한 선입견이 그다지 좋지는 않았다. 아직 젊디젊은 친구가 적어도 장년의 나이가 넘은 이들에게나 어울릴 법한 무거운 타이틀을 겁도 없이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와 몇 번의 만남을 통해서 본 그는 솔직한, 아직도 그림을 그릴 여백이 많이 남은 청년이었다. "원석이 다이아몬드로 빛을 발하도록 더욱 정진해야 할 때"라고 말하는 그의 말처럼. 수상자 인터뷰를 위해 본지 사무실 근처에서 그를 만났다.

지난 1월 서울문화투데이 제7회 문화대상에서 젊은예술가상을 수상했는데 그 소감을 다시 한 번 듣고싶다.
상은 받으면 항상 좋다. 상이 좋은 기를 주는 것인지 상 받은 이후로 좋은 일이 많이 생겼다. 이 상은 열심히 하라고 주는 상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상태에서 안주하지 않고 더 나은 모습을 보여주라는 의미에서 상을 주신 거라 생각한다. 앞으로 춤만이 아니라 우리나라 문화예술 발전을 위해 더 열심히 노력하겠다.

한국 무용을 하게 된 이유가 궁금하다.
남들은 부모에 의해서 하게 됐다는데 나는 솔직히 말하자면 대학교 가려고 했다. 인문계 고등학교 재학 당시 내 성적 가지고는 지방대 국립대학밖에 갈 수 없었다. 그런데 옆에 친구가 무용하면 서울 쪽으로 갈 수 있다고 하더라. 대학을 가기 위해 선택한 이 길이 업이 될 줄 몰랐다. 호기심 반 걱정 반으로 시작한 무용이 여기까지 온 것이다.

▲▲제7회 본지 <서울문화투데이> 문화대상 젊은예술가상을 수상한 류영수 류무용단 대표/상명대학교 문화기술대학원 공연예술경영학과 겸임교수.

체육이나 미술 같은 다른 과목도 있었을 텐데 한국 무용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래서 어른들이 환경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 같다. 친구 중에 무용을 하는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가 당시 고등학교에서 유일하게 무용을 했다. 지금은 서울 시립무용단에 있는 신동엽이라는 친구다. 같이 무용은 했지만 배우는 선생님과 학원은 달랐다. 나는 한양대에 그 친구는 한예종에 진학했다.

갑자기 시작해 명문이라 할 대학에 들어가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 운이 좋았던 것 같다.
그래서 생각한 것은 아직도 ‘노력’인 것 같다. 천부적인 재능도 중요하다고 하지만 내가 생각했을 때는 99%, 아니 100% 노력인 것 같다. 그리고 운도 따라 줬지만 노력도 많이 했다. 군 면제도 스물아홉 때까지 연기시키다가 끌려가기 전에 됐다. (군 면제는 어떻게) 전주대사습놀이에서 일등을 하면 병역특례가 있었다. 우리나라 무용 전통 쪽으로 큰 상이다. 그러나 그 상도 한 번 만에 되지는 않았다. 나에게 한 번에 쥐어졌던 것은 없었던 것 같다. 상도 한 번에 온 것이 단 한 번도 없다.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고 그런만큼 그 상들이 더 뜻 깊더라

대학 입시를 위해 춤을 추기 시작했지만, 춤을 본격적으로 춰보니 어땠나? 처음부터 춤이 몸에 잘 맞지는 않았을 것 같다.
처음에는 안 맞았다. 대학 다니면서도 안 맞았다. 대학원 졸업하고 스물 후반부터 퍼즐처럼 맞춰 들어갔다. 춤이 좀 내 몸에서 정리되는 느낌이었다. 몸 쓰기나 음악이나 그런 것들을 알 것 같고, 그때 무작정 춤이 좋아서 했다.

공연 기획도 많이 하고 있다. 그런 기획들은 어떻게 나오나?
첫 발판을 내가 만들려고 만든 데 아니라 주위 분들이 많이 도와준 것 같다. 박은영 교수님은 나에게 시발점을 주신 분이다. 공연하면 몇 년 동안 항상 출연자로 불러줬다. 국민대 이미영 교수님 등 다들 솔로 하시는 데 남자는 나 혼자만 똑같이 동등한 무대에 섰다. 딱히 잘해드린 것 없는 것 같은데... 그래서 항상 죄스럽다. 뭐하자고 하면 먼저 도와주시려고 하고, 그런 선생님들의 도움으로 일을 자꾸 벌이는 것 같다. 나이 어린놈이 열심히 한다니 도와주는 것 같다.

보훈전국무용단체와 한국 보훈 전국무용대회를 운영하고 있고 이 단체에 이사장을 맡고 있기도 한데. 어떤 단체와 대회인지 설명해 달라.
대학 때 은사인 김운미 교수님이 유관순이라든지, 애국애족 즉 민족혼과 관련된 소재를 많이 하셨다. 알게 모르게 그 영향을 많이 받았던 것 같다. 관심을 제대로 안 가지면 사람들은 6월이 ‘호국 보훈의 달’인지 모른다. 나도 관심을 끌게 되면서 알게 된 거다. 우리나라를 위해 헌신한 분들을 기억하고자 보훈무용 단체를 만들었고 이번에 사단법인이 되면서 회장을 맡고 있다가 직함이 격상(?)됐다. 사실 그래서 부담이 됐기에 다른 윗 분 선생님께 맡아달라고 했는데 그 분께서 ‘네가 만들었으니 네가 맡아라’해서 그냥 그렇게 됐다.

▲제7회 본지 <서울문화투데이> 문화대상 젊은예술가상을 수상한 류영수 류무용단 대표/상명대학교 문화기술대학원 공연예술경영학과 겸임교수.

보훈청하고어떤  관련이 있나?
지원을 조금 받는다. 많지는 않고 한 회당 이삼 백만 원 정도 받는 수준이다. 이는 지원금 유치라기보다는 보훈정신을 잊지 않기 위해 보훈처와 함께하려는 의미다. 그래서 보훈대회 명칭을 ‘6월 호국보훈의 날 기념대회’, 아니면 ‘독립만세 운동’ 이런 명칭을 쓰기도 한다.

무용콩쿨도 열고 있는데, 일부에서는 콩쿨을 수익사업이라고 보는 경향도 있다.
나는 그런 말 듣기 싫어서 서울대회만 참가비를 받고 지방 전주 대회에서는 받지 않는다. 그리고 받은 돈은 다 써버린다.

보훈무용대회에 수상하면 특별한 어드벤티지가 있나?
있다. 매년 국립극장 별오름에서 6월 7일부터 12일까지 대관해서 수상자들 무대를 마련해주고, 일등한 안무가에게는 안무가전에 참가할 기회를 준다. 보통 콩쿨은 끝나면 끝이지만 우리는 별도로 자리를 만들어준다. 특별히 올해는 스무 명을 선발을 할 예정이다.

현재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교육자이기도 하다. 무용을 가르치는 교육자로서 본인의 교육철학이 있다면 말해달라.
나만의 철학이라고 하면 아직은 건방진 것 같다. 우봉 이매방 선생님에게 춤을 사사했는데 선생님이 하셨던 말씀이 기억에 남는다. 어느 날 선생님 안마를 해드리고 있는데 선생님께서 ‘ 지금도 선생이 있으면 우리나라 전국팔도라도 가서 배우고 싶다’라는 말씀을 하셨다. 우리나라 당대 춤꾼이, 하늘이 내린 춤꾼이라고 불리는 분이 그런 말을 한 것에 의아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선생님 말씀이 맞는 것 같다.
학생을 가르치고 있지만 사실 나도 배우는 처지인 것이다. 그나마 학생들에게 알려줄 수 있는 부분은 그런 것 같다. 첫 번째는 ‘사람 됨됨이’다. 어른들이 춤추고 연습하는 것만 봐도 사람 성격을 알 수 있다고 한다. 성질 급한 사람은 춤이 급하고 엉큼한 사람은 정말 엉큼한 춤을 춘다. 어느 순간 그런 것들이 눈에 보이더라.

두 번째로는 힘들어도 버티라는 것이다. 커가는 과정은 그렇다. 좋은 일만 할 수 없다. 하다 보면 힘든 일도 있고 포기하고 싶은 일도 있다. 이름난 춤꾼들의 삶 자체는 버팀이 있었다. 시련이나 노환이 와도 버텼다. 우봉 선생님도 육십 대에 예능 보유자가 된 다음에서야 팔자가 폈다고 했다. 포기하지 말라는 소리다. 실기 쪽은 이렇고 이론 쪽으로 조언하자면 무용과 접목할 수 있는 다른 전공을 해보라고 하고 싶다. 경영학을 하든 국문학이든 역사든, 지금 21세기에는 무용 하나만으로 힘들다. 나부터도 다른 전공도 해봤고 책도 매일 한 시 간씩 읽는다. 무용 외적인 것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지금 문화재청의 태평무 인간문화재 지정이 이슈가되고 있다. 같은 무용인으로서 이 문제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나 궁금하다.
나이 때문에 반려됐다는 얘기도 들리던데 사실 이건 문화재청의 실수다. 저명한 분들을 데려다가 무슨 콩쿨도 아니고 최고점 최하점 따져서 인간문화재를 지정한다는 게 웃기는 일이다. 그리고 제자가 심사를 본다는 것도 그분들이 특공무 최고봉인데 사실 그분들을 평가할 사람이 없다. 어떻게 하든 말이 나올 거라는 문화재청 심정도 이해가 되지만….

한국 무용이 사람들의 관심 속에서 멀어지고 관객 수도 줄어들고 있다. 이를 체감하는가?
관객 수가 많이 줄어들고 있다. 일반 관객들 백 명 중에 한 명이나 표를 살까 말까 하다. 초대권을 줘도 안 오는데. 그런데 나는 이해가 된다. 일반 관객들에게는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공연 때 연예인을 한 사람 불러 사회를 맡긴다. 그 연예인을 보기 위해서라도 와서 한국 춤 하나라도 보고 가라고. 그런 생각을 하는 이유는 나도 내가 춤 출 때는 긴장하지만 재미가 있어 몰입하지만 남이 할 때는 어느 순간 졸고 있더라. 그런 자신이 너무 웃겼다. 한국 무용 관객 수가 줄 수밖에 없는 것은 모두 본인 춤만 추기 때문인 것 같다. 본인만 즐기는 거다. 관객을 배려하고 그다음에 춤을 춰야 하는데 일방적인 춤이 되더라.

현대 무용과 한국 전통무용, 한국 창작 무용과 현대 무용 등 무용간 장르가 모호해진다는 이야기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특히 전통부분에서 문제를 많이 지적하는데.
그런 것도 충분히 있다. 전통 무용이 앞서 말씀드렸듯이 본인만 즐길 가능성이 크고, 우리나라 관객의 눈높이가 그렇게 높지는 않다. 전통을 이해하고 사랑한다는 사람은 소수이다. 중국권에 방문했을 때 인상 깊게 봤던 것은 중국에서는 학교 앞에 시시한 공연을 하는데도 몇천 명이 와서 구경하더라.

그리고 티켓값이 문제다. 영화관은 이만 원이면 둘이서 충분히 즐기지만, 무용 티켓 이만 원 삼만 원 표 사라고 하면 아무리 국립무용단이라고 해도 안가는 사람이 많다. 즐길 준비도 안 돼 있지만 무용단 자체에서 관객을 이해시키려고 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게 우리나라 전 무용단이 그렇다. 관객층을 일반인이라고 생각하고 무용을 해야 저변확대를 시키는데 자꾸 일방적인 공연만 한다. 일반인들이 외면할 때 무용가, 평론가가 자기들끼리 작품 좋았다고 손뼉 치고 끝나는 형편이다. 무용 장르간 혼용의 문제는 한국 전통 무용, 민족 무용, 발레, 클래식 그리고 나머지는 현대무용 장르로 갔으면 좋겠다. 민족 무용, 클래식, 현대로 해서, 요즘 춤을 보면 현대 무용도 한국 무용 같기도 하고 춤의 경계가 허물어져서 그럴 바에는 현대무용으로 한데 묶는 게 낫지 않나 하는 개인적 생각이다.

본인의 대표작으로 어떤 것을 꼽을 수 있을까?
2009년도에 국립무용단에서 매년 기획했던 ‘국립무용단이 뽑는 안무가’에서 ‘외눈박이’라는 공연을 했었다. 그때 안무가 세 명을 선발했었는데, 국립무용단에서 두 명이 나오고 외부에서는 나 혼자였다. 그때 그 작품이 기억에 남고, 2년 전에 했던 서울무용제 때 대상을 받은 ‘달의 비명’도 기억에 남는다. 위안부를 주제로 만들었던 ‘달의 비명’은 말도 많고 탈도 많았지만 나는 참 좋았다. 그래서 다시 한 번 만들고 싶은 그런 작품이다. 또 2007년도에 국립무용단 ‘바리바리 촘촘 디딤새’에서 안무가로 선정돼 했던 ‘한량’ 작품도 재밌었다. 전통은 전통대로 매력이 있지만, 창작을 하는 것도 참 재밌다.

▲2015년 서울무용제 영예의 대상을 수상한 류영수 안무의 <달의 비명>의 한 장면.

본인이 특별히 추구하는 안무형태가 있는지.
사실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좋아한다. 실화나 설화 같은 소재를 바탕으로 해서 그 내용을 그대로 따르되 재해석한다. ‘외눈박이’ 공연은 제주도 영등봉 불이라는 설화를 바탕으로 재해석해 만들어진 안무다.

앞으로의 계획, 큰 그림을 듣고 싶다.
사실은 '또라이'가 되려고 한다. 또라이가 된다는 말은 지금 작품을 구상하고 있는데, 그 작품에 일 년간 미쳐보려고 한다는 말이다. 일련의 행사들을 끝내고 하반기 때부터 시작하려고 한다. 정통하나 창작 하나인데, 지금 내가 구상한 데로 잘 이뤄내고 싶다. 한국에서만 할 수 있는 전통을 보여주고 싶다. 무대부터 극장 전체를 유기적으로 연결해 한국적인 향이 물씬 풍기게. 공연 보고 팸플릿 보고 끝나는 게 아닌 그런 공연을 하고 싶다. 작품 하나 올려 욕도 먹고 검증도 받고 싶은 기획자, 예술가적인 욕심이 있다.

공연도 기획하고, 학생도 가르치고 하는데 본인은 무용가, 안무가로서는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나?
지금도 배우는 과정이고, 부족하지만 그 부족함이 조금씩 없어지는 것 같다. 아직도 실수를 한 번씩 하는 미성숙함이 있지만 10년 뒤 50살 정도 되면 어느 정도 윤곽이 나오지 않을까 싶다. 지금의 나 자신은 가공되지 않은 다이아몬드 원석이라 평가하고 싶다. 가공해야 그만큼 값어치가 있는 것이고, 지금은 그 깎아내는 과정이다. 그래서 아직 더 투자하고자 한다.

인터뷰에서 이 말만큼은 꼭 해야겠다는 말이 있나
사실 (상 받으러) 갈 때부터 고민이 많았다. 입바른 말일 수도 있지만 젊은 예술가상은 매우 뜻 깊은 상이었다. 이제까지 받아온 장관상이나 대통령상보다도 더 뜻 깊었다. 시상식 때 김남조 선생님의 말씀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다.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종종 말한다. ‘잘했다. 칭찬 한마디 하는 것 이거 어려운 것 아니다’라는 그 말. 상 받은 것도 감사한데 그런 분들의 좋은 말씀을 들어서 더욱 잊히지 않는 순간이었다. 그 말이 이제까지 내 사고의 터닝 포인트가 됐다.

한국무용 안무자인 류영수는 고등학교 시절 전라북도무형문화재 제17호 한량춤 예능보유자 故금파(김조균)선생, 김운미 교수(한양대학교 교수), 조남규 교수(상명대학교 교수), 고(故) 우봉 이매방 선생(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 제97호 살풀이춤 명예 예능보유자)에게 사사했으며, 2011년 7월 24일 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이매방류)을 이수했다.

현재는 2003년 2월에 창단한 류무용단(RYU DANCE COMPANY) 대표와 안무자, 보훈전국무용경연대회 조직위원장, 서울특별시 국악발전협의회 위원,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자문위원, 서울종합예술실용학교 무용예술계열 한국무용전공 전임교수, 상명대학교 문화기술대학원 공연예술경영학과 겸임교수로 활동 중이다.

주요 수상경력으로는 2007년 5월 제33회 전주대사습놀이전국대회 무용부 장원(병역특례)을 수상했다. ‘韓國(한국)의 美(미)’ 라는 전통무용과 타악기를 기반으로 둔 작품을 터키 이스탄불에서 열린 제15회 국제 ‘뷰첵메제컬처 앤드 아트페스티벌’에 참가해 24개국 중 3위로 수상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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