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섭의 여행칼럼]인간의 집념과 신성(神性)의 교차점 시기리야
[정희섭의 여행칼럼]인간의 집념과 신성(神性)의 교차점 시기리야
  • 정희섭 글로벌문화평론가/숭실대 글로벌통상학과 겸임
  • 승인 2016.04.05 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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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섭 글로벌문화평론가/숭실대 글로벌통상학과 겸임교수

야생동물이 저마다의 색깔을 뽐내는 밀림의 한 가운데에서 불현듯 나타난 외계인 무리가 큰 바위산을 만들고 있다. 외계인들은 산 정상에 수영장과 연회장을 만들어 놓고 한동안 실컷 웃고 떠들다가 비행체를 타고 유유히 사라졌다.

입구로 걸어 들어갈수록 점점 크게 다가오는 암석을 보는 순간 머릿속은 온통 상상(想像)하는 즐거움에 빠졌다. 이 평평한 대지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융기(隆起)된 괴석(怪石)이 자리 잡을 수 있었는지 학력고사 시험과목이었던 지구과학 시간에 배운 지식을 총 동원해보지만 결론을 내릴 수 없었다.

사람들은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삼라만상(森羅萬象)을 목도할 때 인간이 아닌 신성(神性)을 생각하게 되는데 외계인은 신성을 어렴풋하게 묘사하는 도구가 된다.

싱할리 말로 ‘사자의 목구멍’이라는 뜻을 가진 이 바위는 세계 10대 불가사의로 인정받는다고 한다. 바위 자체가 도시의 이름이 된 이 곳을 보기 위해 나는 스리랑카로 고행의 길을 떠났다.

나에겐 시기리야가 스리랑카이고 스리랑카가 시기리야라고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현지인보다 약 45배 비싼 30불의 입장료를 내었지만 이상하리만치 이 곳에서는 아까운 생각이 들지 않는다. ‘볼 가치’ 가 ‘돈의 가치’보다 높을 때 아까운 마음은 상쇄되어 없어진다. 시기리야 사람들에게는 ‘잘 생긴 바위 하나가 열 아들 안 부럽다’ 는 속담이 있지 않을는지.

해발 370미터나 되는 기암(奇巖)을 능선이 아닌 가파른 돌계단을 통해 수직으로 오르는 것은 콜롬보에서 이미 지쳐버린 내가 감당하기에는 무리가 있었지만, 정상에서 바라다보는 밀림의 광경은 이마에 맺힌 땀을 날려버렸다.

▲스리랑카의 시기리야

정쟁(政爭)을 피해 이 곳으로 피신해 바위 궁전을 건설한 왕은 과연 자연의 아름다움을 즐길 수 있었을지 궁금해졌다. 벽에 그려놓은 미인들의 그림은 저 아래에 남겨놓은 정인(情人)에 대한 그리움으로 탄생한 것일까. 날이 어두웠으니 이제는 내려 가야할 시간이라고 택시 기사가 말할 때까지 나는 바위산 정상에 건설된 궁전을 떠나지 못했다. 빨리 다른 곳을 둘러봐야 한다는 여행의 강박증도 이 사자 모양을 한 돌산에서는 잠시 짐을 내려놓는다.

하산하는 길의 입구마다 진을 치고 앉아있는 일군(一群)의 원숭이들이 인간을 동물 보듯이 쳐다보고 누군가에게서 받은 빵을 먹고 있다. 바위틈에는 어미개가 낳은 지 얼마 안 되어 보이는 새끼들에게 수유(授乳)하고 있는 모습도 보인다.

산을 올라가기 전에는 외계인이 떠올랐었는데 내려올 때는 지극히 자연적인 모습이 보이는 이유는 권력자의 집념과 궁전 건설에 동원된 노동자들의 흘린 땀이 전달하는 무언의 목소리가 느껴졌기 때문일 것이다. 불가사의한 힘과 인간의 노력은 산을 오르는 여정 속에서 기묘한 화음으로 조화를 이룬다.

고생도 마다하지 않을 사람들에게 시기리야 여행을 권한다. 비포장도로의 흙먼지와 숲에서 갑자기 튀어나오는 코끼리의 위협, 기념품을 팔려는 사람들의 호객행위를 다 물리치고 바위산 정상에서 누릴 수 있는 감동을 기다릴 수 있는 자에게 시기리야는 신과 인간의 경계선에 선 것과 같은 기분을 만들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