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정의 발레인사이트]이상적인 고전발레의 아름다움-라이몬다(Raymonda)
[김순정의 발레인사이트]이상적인 고전발레의 아름다움-라이몬다(Raymonda)
  • 김순정 성신여대 교수/한국예술교육학회장
  • 승인 2016.05.16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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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정 성신여대 교수/한국예술교육학회장

지금은 어김없이 매년 5월 열리는 동아무용콩쿠르지만 초기에는 2년마다 열렸고 대학생 이상만 참가하는 일반부문 경연 하나뿐이었다. 동아무용콩쿠르에 참가한 것은 대학4학년이던 1982년의 5월이었다.

무척 좋아하는 글라주노프의 음악 “4계” 중 <여름>을 골라 임성남 선생님께 안무를 부탁드렸는데 워낙 바쁘신 탓에 차일피일 미뤄지고 대회 얼마 전에야 겨우 안무를 해주셨다. 전 국립발레단 주역인 진수인 선생님께 연습을 봐 달라 부탁하고, 안무도 살짝 손을 보아 무대에 올랐다.

눈부신 여름, 시원하게 뚫린 자작나무 길을 걸어갈 때 바람에 잎이 흔들리며 하얗게 빛을 반사하는 강렬한 느낌을, 이 작품을 연습할 때마다 매번 느끼곤 했다. 그리고 경연 순간에 일정부분 무의식적으로 원하는 안무로 바꿔 춤을 추고는 내려왔다.

요즘 같으면 콩쿠르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예상 외로 좋은 상을 받았다. 놀라면서도 의문이 들었다. 계획되지 않은 즉흥성은 어떤 순간에 발휘되는 것일까? 예기치 않았던 힘은 아마 음악에서 나온 듯하다. 글라주노프의 음악은 나로 하여금 깊고 비밀스러운 통로를 지나 넓게 열린 예술의 길로 이끌어주었다.

▲라이몬다-마곳 폰테인(라이몬다역),루돌프 누레예프(쟝 드 브리앙 역),호주국립발레단

한참 시간이 흐른 뒤, 또 한 번 마음을 빼앗는 춤과 음악이 있었다. 글라주노프 작곡 프티파 안무 <라이몬다>였다. 1996년 국립발레단은 전막 아닌 갈라 공연으로 <라이몬다 3막>을 무대에 올렸다. 국립극장 2층에서 공연을 보았다.

무릎 위까지 내려오는 푸른색의 로맨틱하고 약간 긴 의상이 인상적이었다. 또한 스페인, 헝가리 등 민속춤에서 차용된 미묘한 손들의 움직임과 어깨의 사용, 발의 부딪침, 섬세하고 기품있는 시선과 머리의 움직임은 아름다운 선율과 함께 캐릭터 댄스의 매혹을 선사하는데 모자람이 없었다.

나에게는 안무가 프티파(1818-1910) 말년의 대표작품이 <라이몬다(초연,1898년)>라는 것이 무척 흥미로웠다.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던 시기에 프티파는 삶의 마지막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그가 세상을 떠나던 해인 1910년 파리에서는 스트라빈스키가 <불새>를 작곡하여 초연을 했다.

▲라이몬다-나딸리야 두딘스카야(라이몬다 역), 보리스 샤브로프(압데라흐만 역),키로프발레단.

이후 고전주의발레는 사그러질 줄 알았지만 사회주의가 된 러시아에서도, 현대예술이 도래한 유럽에서도 불씨는 꺼지지 않고 지금까지도 도도하게 살아있다. 순수한 음악과 춤의 원형을 반복해서 듣고 보고 싶어 하는 열망이 사람들에게 있기 때문일 것이다.

프티파가 눈을 감은 지 100년 후인 2010년, 국립발레단과 볼쇼이발레단의 합동공연으로 유리 그리가로비치 안무 <라이몬다>가 예술의 전당에서 상연되어 주목을 받았다. 국립발레단의 김주원, 김지영, 김현웅, 장운규와 함께 마리아 알라쉬, 아르템 아브라첸코 등 볼쇼이 현재 주역들의 춤을 비교하며 볼 수 있었던 의미 있는 무대였다.

<라이몬다>가 인기 있는 이유 하나는 중세 기독교와 이슬람 세력 간의 갈등보다는 그 안에 펼쳐지는 스페인, 헝가리 등 이국적인 춤들의 다채로운 향연이 화려하기 때문이다. 민속춤을 무대화한 캐릭터 댄스는 고전발레의 테크닉을 연마하듯이 체계적인 수업이 필요하고 오랜 숙련이 이루어져야하지만 무엇보다 자유로운 개성이 드러나야 한다.

▲라이몬다-니나 아나니아쉬빌리(라이몬다역),알렉세이 파데예체프(쟝 드 브리앙 역).볼쇼이발레단.

이름을 남긴 안무가 중에 캐릭터 무용수 출신이 많은 것을 보면 창의적인 움직임은 틀에 박히지 않은 다양한 춤의 경험에서 나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유리 그리가로비치 역시 뛰어난 캐릭터무용수였다.

엄격히 구분하면 귀족인 라이몬다와 기사 쟝 드 브리앙은 클래식발레무용수이고 사라센 영주 압데라흐만은 캐릭터무용수로 구분할 수 있다. 이들은 작품에서 서로 다른 아름다움으로 겨루는데 각각의 비중이 쉽게 우열을 가릴 수 없다.

고전발레에 필수 요소인 클래식 무용수와 캐릭터 무용수는 이렇듯 상호보완적이다. 그러니 어린 무용수들이 기본기를 잘 다진 후에는 자신에게 맞는 춤을 더 잘 추도록 격려해주어야 한다. 모두가 왕자와 공주가 될 수도 없고 또 그럴 필요는 더욱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