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인터뷰/원로화가 제정자 화백]“버선에서 발현되는 미가 우리의 아름다운 마음, ‘선조의 영혼’”
[특별인터뷰/원로화가 제정자 화백]“버선에서 발현되는 미가 우리의 아름다운 마음, ‘선조의 영혼’”
  • 이은영 편집국장
  • 승인 2016.05.17 0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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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업 50년 맞아 12일~19일까지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서 ‘선조의 영혼’ 전 열어

“곡선과 직선의 버선의 미는 한국여성의 여성성, 이는 곧 어머니다”

제정자 화백은 버선 모양을 조형물로 형상화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한국 고유의 정서와 미를 버선을 통해 아름다운 색과 선으로 표현, 한국인의 애환을 나타내는 작품세계를 추구하는 것으로 평가 받고 있다.

▲ 오는 12일부터 특별전을 여는 제정자 화백

50년의 화업을 이어오고 있는 제 화백은 평면회화부터 조형에 이르기까지 한국 현대 미술작가 중에서도 독보적인 작가로 자리매김 하고 있다. 이브자리가 협찬하고 서울예술재단이 주최하는 이번 전시는 제정자 관장의 특별전으로 기획됐다.

한국여인의 애뜻함을 품고 있는 ‘버선’시리즈를 꾸준히 선보이고 있는 원로 작가인 제정자 화백의 특별전이 오는 12일부터 19일까지 서울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열린다.

‘선조의 영혼’이란 주제로 열리는 이번 전시는 제정자 화백의 초기작품부터 버선이 갖는 조형적 요소의 다양한 느낌의 형태를 ‘정(靜) 과 동(動)’으로 표현한  다양한 작품을 선보일 예정이다.

박래경 큐레이터협회 명예회장은 제정자 화백의 작품에 대해 “한국성이 늘 근간으로 지켜지고 있으면서도 현대라는 시대성을 한시도 잊지 못하는 강한 의지의 예술가 상을 반영하고 있다”고 평한 바 있다. 대비적 색채감과 구조적 공간감을 살려 버선에 생명력을 불어넣으며, 이를 통해 미적인 가치를 발견하게 한다는 것이다.

올해 화업 50년을 맞아 12일부터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대규모 전시를 연다. 만만치 않은 세월을 작업해 오셨는데, 전시를 앞두고 소회가 남다를 것 같다.

지금까지 해온 작품들을 내가 생각한대로 잘 했나 반추를 해보자면 한국적인 우리의 정신과 멋과 미를 표현하는 작업을 잘 선택했지 않았나 생각한다.

‘한국의 美’하면 떠오르는 것이 있다. 기와의 완만한 곡선, 저고리의 섶, 팔소매, 호장이라든가 버선의 아름다운 직선과 곡선의 절묘한 만남은 아무리 보아도 빼어난 ‘우리의 미(美)’다. 정말 ‘우리 것이 세계적’이라고 흔히들 말하지만 우리 선조들이 지닌 정신과 멋(외향적인 것만이 아닌)은 우리가 감히 따라가지 못할 것 같다.

우리의 아름다움이 예술적 가치가 있다는 것을 실감하기에 젊은이들에게 내 작품을 통해 알리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하다. 그래서 기회 있을 때 마다 후배들에게 ‘우리의 미라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가’를 전파하고 있다.

"한국성이 늘 근간으로 지켜지고
현대라는 시대성을 한시도 잊지 못하는
강한 의지의 예술가상 반영"

▲ 제정자 화백은 버선 모양을 조형물로 형상화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번 전시 제목이 ‘선조의 영혼’인데 어떤 내용인가?

선조의 영혼이라는 것은 우리의 그야말로 우리의 혼을 얘기한다. 특별히 ‘선조의 영혼’에 관한 작품을 따로 그렸다. 버선 한 켤레가 화면에 한 쪽에 놓여져 있는 작품으로, 150호 크기다. 작품에서 공간의 여백에서 주는 미에서 선조들의 울림을 느낄 수 있는 작업을 했다. 그동안 생각만 하다 못한 작업인데 이번 전시를 준비하면서 한순간 강한 영감을 받게 돼 작업을 하게 됐다.

작품을 끝내 놓으니 여러 생각이 많이 떠올랐다. 특별히 돌아가신 어머니 생각이 간절하더라...그런 그리움의 마음을 담았다고 할까. 

버선을 소재로 다양한 작업을 많이 해오고 계신데, 제선생에게 버선의 의미는 무엇인가

버선은 하나의 우주라고 생각한다. 발은 우리 신체의 작은 우주인데 그것이 지탱하는 것이 버선이다. 버선은 한국여성들의 삶이 깃들어져 있고 애환이 함축돼 있기에 무궁무진한 이야기가 있다. 어머니가 열손가락 안 아픈 자식 없다는데, 버선은 곱든 미웁든 모든 발가락을 하나로 다 감싼다. 그런 것처럼 버선은 신는다는 기능적인 것을 뛰어 넘어 엄청나게 많은 것을 시사하고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많다.

그 옛날 할머니 어머니들은 밤이 되면 버선을 만들고 꿰매면서 만 가지 생각이 많았을 테고 완성됐을 때 그 희열은 여성이 아니면 못 느낄 거다. 박래경 선생이 이번 내 작품 평론에서 말씀하듯이 ‘여성의 애환의 상징’이 버선이다. 선조의 영혼과 숨결이 담기지 않았으면 나올 수 없는 작품이다.

물론 버선만이 아니라 고가구 도자기 등에서도 선조의 영혼과 숨결을 느낄 수 있다. 겸재나 추사 등의 작품에서 느껴지는 기개와 혼과 같다할 수 있을 것이다. 작업에 있어서는 과거에서 벗어나 현대화 시키는데 주력했다.

이번에 평론가 박래경 선생께서 제 선생의 작품세계를 여성의 시각으로 좀 더 천착해 들어가 대단히 심도있게 다뤘다

평론을 받고 굉장히 기뻤다. 내 버선작품에 대해서는 돌아가신 이일 선생부터 다섯 분이 쓰셨다. 이일 선생은 내게 ‘버선이라는 소재를 잘 끄집어냈다. 앞으로 기대된다’ 해서 자신감과 의욕을 주셨다. 사실 그 말씀을 듣기 전까지 작가로서 제대로 가고 있는 길인지 의문을 품기도 했었기에 말이다. 박래경 선생은 버선을 통한 한국여성의 삶에 대한 철학을 잘 일깨워 주셨다. 한국여성의 삶에 내재된 고난의 세계 등을 잘 표현해 줘서 너무 기쁘다. 작가로서 어려운 때도 많았지만, 이번 평론을 받고 잘 살아낸 것에 대한 격려가 담긴 것 같아, 보람이 있다고 할까.

특히 박 선생은 얼마나 세밀하고 치밀하신지. 직접 내 작업실을 방문하셔서 내 어머니 아버지 사진을 보고 그 시절에 깨인 분이셨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상기시켜 주셨다. 기억을 되돌아보니 젊은 날부터 아버님은 서예를 해오시면서, 손수 그림과 글을 써서 수예책을 묶어내셨다. 그걸 어머니께 선물하고 굵은 실로 목도리를 손수 짜서 선물을 하시기도 한 분이셨다.

▲ 이번도록 표지작품靜과 動 Serenity and Dynamism, 2010, Cotton and Acrylic on Canvas, 259x194cm.

그 시절에 대단히 멋쟁이셨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도 대단히 섬세하시고 자상하신 분이셨다. 글을 쓰시고 수묵화를 하시던 아버님 곁에서 나도 어렸을 때부터 알게 모르게 많은 영향을 받았던 것 같다. 그런 아버님의 필력이 내 첫 작품 시리즈인 ‘세월의 소리’에 발현됐던 것 같다.

이런 이야기들을 들으신 박래경 선생이 그 부분을 잘 끄집어 내주셨다. 어머니 또한 항상 바느질과 재봉틀을 이용해 옷을 만들어 주셨다. 정리정돈이라든지 집을 예쁘게 가꾼다든지 하는 것들이 어머니한테서 배운 것으로 느끼고 있었는데, 박래경 선생이 그런 점들이 DNA속에 들어있기 때문이라고 짚어 주셨다.

선생의 작품을 보면 특히 버선작품이 조형성에서 봤을 때는 단색화의 카테고리에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은데

세월의 소리, 기운의 소리, 線과面(선과면), 精과動(정과동) 이런 것들이 거의 단색화였다.
정과동에서는 붉은색, 푸른색, 노란색 등 몇 몇 칼라를 쓰긴 쓰지만  칼라를 거의 많이 안 쓴다. 그런 점에서는 단색화에 속한다. 이강소, 하종현 박서보, 선생 등과 동시대 작품을 내놨기에 같은 작품으로 분류하면 됐다.

사실 이우환 씨 이전에 내가 ‘세월의 소리’로 단색화를 했는데 이우환 선생이 먼저 발표했기에  그걸 접고 구부리는 작업을 한 것이 세월의 소리였다. 칼라가 들어가도 보일 듯 안보일 듯 은은하게 작업했기에 그런 사조라 볼 수 있다.

단색화 하시는 선생들이 6,70년대 일본을 많이 드나들었다. 당시 동경의 유명한 화랑인 우에다 화랑에서 한국작가 서세욱씨를 비롯 쟁쟁한 분이 하셨는데, 네 번째로 내게 전시 제안이 왔었다. 그 준비작업을 하다가 갑자기 아파 수술하는 바람에 못했다. 당시에 아쉬움을 조금이나마 달래려고 우에다 화랑에서 보내온 내 전시 포스터와 실내 평면도 등 여러 자료들을 이번에 화집에 실었다.

전통소재 중에서도 ‘버선 작가’하면 ‘제정자’로 자리매김했다. 그런데 이전 작품과는 확연히 다른 작품을 선보였다

작가는 한군데 머물러 있으면 안 된다. 변신을 해야 하는데 어떻게 변신을 할까 정말 고민을 많이 했다. 그래서 한동안 운동화 신고 열심히  해외 아트페어를 돌아다녔다. 그 때 느낀 것이 세계적인 작가들도 거의가 ‘자기 것’을 가지고 하더라. 그래서 한국적인 것을 찾기로 생각하고 버선을 찾아봤다. 버선에서 이미지를 가져와서 어떻게 현대적으로 표현할까? 하는 고민을 하면서 시작한 작업이 몇 번의 변신이 있었다.

초기에는 그리다가, 그 다음에는 오브제로 버선을 사용하기도하고, 그 다음 단계로 버선을 만들어 붙였다. 이후 버선을 해체해 시접을 살리는 작업으로 음과 양을 표현했다. 버선에는 사각형의 틀을 넣었다. 조형적인 면도 있겠지만 그것은 하나의 창으로 대중과 소통하고 싶다는 의미를 담았다.

그것과 함께 조각도 했다. 신는 방향이 아니라 버선 바닥부분을 세워서 작업을 했는데 얼마나 아름답고 섹시한지 모른다.(웃음) 버선에는 여성성과 여성의 자존심을 살리는 직선과 곡선이 있는데 그것을 확대해서 3미터 5미터 크기로 공원이라든가 우리가 사는 아파트 등 공공장소에 세워놨을 때를 상상하면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 간결한 선이 내뿜는 기운과 기품이 있다.

지금 어딘가 조형물을 세울 계획을 가지고 있는데, 어느 아파트에 세워질 것이다. 우리 일반 대중들은 물론 외국인들에게도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는 한국의 미이기에 각 도 마다에 다 세우고 싶다는 것이 내 바램이다. 버선에서 발현되는 미가 우리의 아름다운 마음으로, 세계적일 수 있다.

▲ 歲月의 소리 The Sound of Time Passing By, 1983, Oil on Canvas, 60.6x71cm, 개인 소장.

말씀을 들어보면 여성성에 대한 것에 천착이 강하신 것 같다

내가 일찌감치 혼자 있는 생활을 많이 했기 때문에 여성의 삶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그것을 보면서 버선자체가 여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고, 여성 손끝에서 이뤄지는 것이 버선인데 그걸 하다 보니 여성의 삶과 인생, 여성의 엄청난 고뇌를 느끼게 됐다.

요사이 여성들은 많이 달라졌지만 옛날 여성은 많은 걸을 참고 인내해야했다. 그 분들은 질곡의 시대를 보냈다. 그러면서도 무슨 노래인지 도 모르지만 흥얼거리며 작업을 하면서 온몸으로 이겨냈다. 그리고 우리시대의 인물들을 만들어냈기에 위대하다 생각한다.

어느 가을에 버선을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작업을 하는데 가을 바람이 창틈으로 불어 들어오는데 너무너무 어머니가 보고 싶었다. 아파트 밖으로 뛰어내리고 싶을 만큼 어머니가 너무 보고 싶었다. 그래서 어디다 전화를 했다. 그분도 남편과 사별하고 혼자 계시면서 조각보를 하시는 분인데 당시 나를 많이 위로해 주셨다.

예전에 한 화랑에서 전시를 하고 있는데 강부자씨가 왔다. 버선 조각을 만지면서 어머니를 부르는데, 그의 눈시울이 뜨거워지더라. 그 모습을 보면서 버선이 이렇게 어머니를 부르는구나 실감했다. 그래서 여성성은 어머니다. 그 여성성은 버선이고 버선은 또 어머니다.

이브갤러리 관장을 맡는 동안 70대 이후 작가들의 작품으로 꾸려진 ‘70’s르네상스’라든지 여러 의미있고 굵직한 전시를 많이 열어 좋은 평가를 받았다

한국화단의 뿌리인 그 분들이 70이 넘고 80이 넘어 요사이 병원 출입하는 것이 일상이 돼버린 것이 너무 슬프다. 이분들이 지금도 작업들을 활발히 하고 계신 분들이다. 그 분들의 작품을 한데 모아 역사적으로, 기념비적인 전시를 열어야 하는데 그런 자리가 잘 마련되지 않는 것 같아 안타까웠다.

그런 심정에서 내가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르네상스가 문예부흥 아닌가. 그 때 전시를 앞두고 오광수 평론가를 만났는데 정말 이시대에 잘한 생각이라고...흔쾌히 글을 써주셨다. 이브가 큰 화랑도 아니고, 작은 공간이었지만 오프닝에 오신 선생님들이 다들 너무나 좋아하셔서 오히려 내가 죄송하고 기뻤다. 또 나하고 직접 알지 못한 분들도 계셨는데, 동시대를 살아왔기에 나를 믿고 작품을 내주셨기에 감사했다. 남은 여생도 더 반듯하게 잘 살아야겠다 생각했다.

세월의 소리 첫 전시 때 운보 김기창 선생이 많은 격려를 해주셨던 걸로 알고 있다. 선생과의 인연도 각별하셨던 것 같다

1984년도 신세계 미술관에서 열린 처음으로 열린 내 전시 초대전에 운보 선생이 오셨다. 운보 선생님께서 세월의 소리에서 10호짜리 첫 작품을 보시고 ‘이 나이에 어떻게 이런 필력이 나오냐’ 하면서 놀라셨다. 그러면서 필담으로 많은 좋은 격려의 말씀을 해주셨다.

특별히 내 작품을 보고, 여백을 살리는 작업을 보고 좋아했다. 꽉 채우는 작품하지 말고 여백이 있는 작품을 하라고 하셨다. 당장 선화랑에 전시를 주선하신다고 하셨고 그렇게 하셨다. ‘제정자가 최고야’ 하면서 엄지손가락을 드시던 모습이 선하다.

그리고 운보선생 살아계실 때 한독미술교류협회장을 맡으셨고 내가 수석부회장을 맡았었다. 그전에 전시장에서 뵈면 깍듯이 인사하는 관계였는데 입회 후 더 가까워졌다. 돌아가시고 회장직을 승계 받았는데 3년 끝났는데 또 시켜서 9년을 했다.

운보선생을 생각하면 그만둘 수가 없었다. ‘너가 잘 이끌어라’ 말씀하시는 것 같아서 말이다. 선생님 생전에 자주 뵙고 미술관에도 가고, 돌아가시기 전까지 병원도 가고 죽 다녔다. 나는 좋은 선생님들을 많이 만나서 그것도 하나의 복이다. 김환기, 한묵선생 등등.

이브자리에서 이번 전시 후원을 크게 했다고 들었다

이브자리 대표인 고춘홍 사장님과는 오래 전 고대 최고경영자 과정 동창이었다. 역사적 인물을 빼놓고 내가 존경하는 분 중 한 분이다. 너무 겸손하신 분이다.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시는 분이다. 나무심기에 1억 원을 기부해도 드러내지 않는다. 앞에 나서시는 것도 좋아하지 않으시는 분이다. 그래서 인격적으로 존경하는 분 중 한 분이다.

고 사장님이 삼성동에 사옥을 지은 얼마 후 나를 만나자 하더니, 지금의 갤러리 장소를 보여 주셨다. ‘여긴 뭘 하면 되겠냐’ 고 묻더라. 두 말도 안하고 ‘뭘하긴 뭘하냐, 화랑하라. 내가 도와 드리겠다’했다. 이틀 만에 화랑으로 변신을 시켰다. 2012년에 관장을 요청하셔서 다른 분 같으면 안 했을텐데, 그 분이 하시는 말씀이니까 승낙했다. 그럼 어떻게 할 것인가 해서 르네상스를 생각했고, 실천했다.

올해가 이브갤러리 개관 20주년이고 이브자리 창사 40주년이다. 마침 나도 작가생활 50년을 맞으면서 고 사장님이 이번 전시를 적극 후원해 주셨다.

다음 작품 계획은 어떻게 되는지

버선작업은 계속하되 내가 하고 싶은 전시가 있다. 이번 전시 타이틀을 사실 ‘데뷔’라고 할려고 했다. 그런데 박래경 선생님 글에서 ‘선조의 영혼’이라고 지칭하신 그 말씀이 깊이 다가왔기에 그것을 쓰기로 했다.

데뷔라고 쓸려고 했던 것은 이 전시를 통해 다음 새로운 작업에 도전하겠다는 의지를 담아서 데뷔라는 말을 쓰고 싶었다. ‘데뷰 제정자’는 생각과 울림을 크게 주는 말로 앞으로 그런 새로운 작업을 하겠다는, 그런 의지의 상징이다.

‘세월의 소리’에서부터 버선까지 다 합한 작품이 될 것이다. 이번에 하고 싶었는데 시간상 못했다. 꼭 이 작품을 가지고 큰 전시를 다시 한 번 할 때가 오면 할 것이다.

후배들에게 한 말씀 해주신다면

작품을 열심히만 한다고 해서 예술이 되는 것이 아니다. 눈을 뜨지 않으면 안된다. 파리에서 세계적인 작가들이 몰려들어 경쟁하는데 제대로 된 화랑전시는 어렵다. 정말 그림에 대한 눈을 떠야만 한단계 한단계 올라간다. 6,70대에 어떤 작가로 남을 것인가가 중요하다. 그때 좋은 작가로 남지 않으면 그동안 작품활동이 헛되이 돼버린다.

세계적인 작가가 하루아침에 된 거 아니지 않나. 진지하게 자신을 되돌아보면서 나이 들어 어떤 작가로 남는가라는 생각하면 한 시도 허송세월 하면 안 된다. 전시할 때 마다 많은 고통이 따르지만, 자기가 하는 일에 정말 애정을 갖고, 이겨내고 좋은 작가로 성장하기 바란다.

 

원로화가 제정자 선생은 홍익대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일본, 미국 등에서 24회의 개인전과 국립현대미술관 한국현대작가초대전, Vapariso 비엔날레(칠레), Grand et jeunes D’aujourd’ Hul(파리, 프랑스), 그랑팔레 한국미술대전 (파리, 프랑스), 서울시립미술관 남서울 분관 개관전, 한중수교 17주년전(상상미술관, 중국), 미주이민 100주년 현대미술전(LA, 미국) 등 수많은 단체전에 참여했으며, 이브갤러리 관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국내외에 걸쳐 왕성한 작가활동을 해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