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년 왕실의 영혼을 담은 조선왕릉을 만나다
500년 왕실의 영혼을 담은 조선왕릉을 만나다
  • 이은영 기자
  • 승인 2016.07.01 21:1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조선왕릉, 왕실의 영혼을 담다」특별전 개최,8.28까지 국립고궁박물관

문화재청 국립고궁박물관과 국립문화재연구소, 조선왕릉관리소는 지난 21일부터 8월 28일까지 국립고궁박물관 기획전시실(2층, 지하)에서「조선왕릉, 왕실의 영혼을 담다」특별전을 개최한다. 아울러 기간 중에는 특별전과 연계한 다양한 체험‧교육 프로그램 등도 함께 진행된다.

▲<철종국장도감의궤(哲宗國葬都監儀軌)>1865년, 4책, 종이에 먹과 채색, 45.0×31.5cm, 보물 제1901-3호 1863년(고종 즉위년) 12월 8일에 창덕궁 대조전에서 승하한 철종(재위 1849~1863)의 국장에 대한 내용을 기록한 국장도감의궤이다. 국장의 진행 과정과 각 관청 간의 연계와 재정의 출납, 인력의 동원과 사용한 제기 및 의장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정보가 기록되어 있다. 의궤는 총 4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채색 도설(圖說)과 반차도(班次圖)가 포함되어 있다. (사진제공=문화재청)

조선왕릉은 절대적 권위와 위엄을 지녔던 왕과 왕비가 사후에 묻히게 되는 공간이었다. 따라서 왕릉은 위치 선정부터 건설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절차가 국가적 예법에 따라 신중하고 엄격하게 진행됐으며, 완성된 이후에는 왕과 왕비의 영원한 안식처이자 왕실 의례의 장소로서 철저하게 관리됐다. 이처럼 조선왕릉에는 500년 조선역사의 건축, 조경, 예술, 제도, 의례 등 유·무형의 요소가 어우러져 있다.

또한, 조선왕릉은 전쟁 등 역사적 시련 속에서도 대부분 원형을 보존하고 있어 많은 이들에게 경외감을 주고 있는데, 역대 통치자의 무덤이 이토록 완벽하게 남아 있는 경우는 세계적으로도 찾아보기 어렵다. 이러한 역사성과 인류문화적 중요성을 인정받아 대한민국에 소재한 조선왕릉 40기(북한에 소재한 2기는 제외)는 2009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됐다.

▲산릉도감 계회도(山陵都監契會圖)>
1575년, 비단에 먹과 채색, 95.0×62.3cm, 충재박물관, 보물 제901호. 1575년선조 8)에 제작된 명종비 인순왕후(1532~1575) 장례 당시의 산릉도감 관원의 계회도이다.
견본담채(絹本淡彩)의 족자로 상단에는 제목, 중단에는 안견(安堅, 15세기 활동)의 산수화풍의 계회도, 하단에는 도제조(都提調) 박순(朴淳, 1523~1589) 등 22인의 좌목이 있고, 그림 왼쪽 여백에는 판서(判書) 정유일(鄭惟一, 1533~1576)이 짓고 쓴 제시(題詩)가 있다. 권벌(權橃, 1478~1548)의 아들 동보(東輔, 1517~1591)가 당시 도감 계원으로 받아서 그의 자손에게 전래한 것이다. (사진제공=문화재청)

이에, 조선왕릉의 전시‧연구‧현장관리를 담당하고 있는 문화재청의 세 기관은  조선왕릉 관련 유물 전시, 그간의 연구성과 발표, 체험‧현장 프로그램 등을 통해 조선왕릉을 종합적‧입체적으로 조망하고 보다 많은 이들에게 조선왕릉의 가치를 널리 알리기 위하여 특별전을 비롯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기획해 선보인다.

「조선왕릉, 왕실의 영혼을 담다」특별전 개최

이번 특별전은 ▲ 조선왕릉, 세우다 ▲ 조선왕릉, 정하다 ▲ 조선왕릉, 모시다 ▲ 조선왕릉, 돌보다 등 4개의 주제로 구성되며, 일반에 최초로 공개되는 부장품(副葬品)을 포함한 조선왕릉 관련 유물 200여 점을 전시한다. *부장품(副葬品)이란 무덤에 시신과 함께 넣는 여러 가지 물품

1부 ‘조선왕릉, 세우다’에서는 시작점인 국장(國葬)에서 왕릉의 건설까지의 과정을 살펴본다. 국장과 관련된 의궤(儀軌) 등의 기록, 국장에 사용된 물품, ‘명릉도’(明陵圖) 등 왕릉 터의 입지여건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산릉도(山陵圖), 왕릉 건설에 대한 내용이 담긴 산릉도감(山陵都監)과 관련된 유물이 전시된다. 그리고 국장~왕릉 건설까지의 과정을 쉽고 재미있게 이해할 수 있는 애니메이션 영상도 상영한다.

2부 ‘조선왕릉, 정하다’에서는 왕릉의 내·외부를 구성하는 요소와 그 제도를 관련 유물을 통해 소개한다. 조선왕릉은 이전 왕조로부터 물려받은 전통과 새 왕조의 철학을 결합하여 독특하고도 새로운 양식의 왕릉 모습을 제도로 정착시켰고, 이는 500년이 넘도록 유지되었다. 이번 특별전에서는 최초로 공개되는 ‘정조 구릉지 명기’(正祖 舊陵地 明器)’, ‘조선왕실 재궁’(朝鮮王室 梓宮, 왕의 관)을 비롯하여 그간 쉽게 접할 수 없었던 조선왕릉 부장품이 전시되어 주목된다. 명기(明器)는 장사 지낼 때 무덤에 시신과 함께 묻는 기물이다.

<정조 구릉지 명기(正祖舊陵地明器)>1800년, 도자기, 청동, 국립문화재연구소
정조(재위 1776~1800)가 승하하고 처음에 묻혔던 곳에서 출토된 명기(明器)이다. 정조의 능은 1821년(순조 21) 효의왕후(1753~1821)와 합장하면서 현재의 건릉(健陵)으로 옮겨지게 되었고, 2011년 발굴을 통해 융·건릉 경계 동남쪽에 위치한 구릉지에서 백자 명기와 칠기함 등의 왕실 명기가 다수 출토되었다. 이 중『건릉산릉도감의궤』(1800년)의 기록에서 보이는 경(磬)과 같은 악기와 보(簠)·궤(簋)·작(爵) 등의 제기(祭器) 명기는 사대부의 명기와 구분되는 왕실 부장품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사진제공=문화재청)

3부 ‘조선왕릉, 모시다에서는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산릉제례(山陵祭禮)의 전통을 실제 사용되었던 제기(祭器) 등의 유물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그리고 왕릉으로 향하는 왕의 행차인 능행(陵幸), 사후에 왕릉으로 모시는 의례인 봉릉(封陵), 왕릉을 옮기는 의례인 천릉(遷陵) 등 왕릉과 관련된 여러 의례를 유물과 영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제릉지(齊陵誌)>1936년, 6책, 종이에 먹, 28.4×20.3cm
태조(재위 1392~1398)의 원비(元妃) 신의왕후(1337~1391)의 능인 제릉(齊陵)에 대한 능지로, 1936년 제릉 참봉 이병두가 옮겨 적은 책이다. 권1에는 제릉 참봉 이흡이 1782년(정조 6)에 쓴 서문이 있고, 각종 제례와 관련된 축식(祝式) 및 삽도, 절목(節目), 사목(事目), 죽책문(竹冊文), 옥책문(玉冊文) 등을 기록하였다. 권2에는 제릉과 예조 사이에 주고받은 문서를 기록하였고, 권3에서 권5까지는 1849년(철종 즉위년) 9월 23일의 기신제부터 1911년까지 관원들이 수향(受香)한 날짜와 능침의 수리 및 보수, 관리에 대한 내용을 정리하였다. 권6에는 1929년 이주황이 쓴 서(序), 1928년에서 1930년까지 임명된 재관과 능침의 수리·보수 및 관리에 대해 기록하였다. (사진제공=문화재청)

4부 ‘조선왕릉, 돌보다’에서는 조선왕릉을 지키기 위한 노력을 각 왕릉의 개요와 관리 기록이 수록된 <왕릉지王陵誌> 등 관련 유물을 통해 소개한다. 이곳에서는 선조들의 왕릉을 철저하게 보호하기 위한 왕실의 각별한 노력의 흔적들을 엿볼 수 있다.

▲<영조가 각 능의 재관에게 내린 지침을 새긴 현판(御製飭諭陵司齋官懸板)>
1755년, 나무, 44.0×101.0cm.영조(재위 1724∼1776)가 1749년(영조 25) 5월 각 능의 재관(齋官)에게 사전(祀典)의 중요함과 몸을 깨끗이 하는 일, 제기를 간수하는 일, 하인을 다루는 일 등을 유시(諭示)한 것이다. 서삼릉(西三陵)에 걸었던 것으로 이철보(李喆輔, 1691∼1775)가 글씨를 쓰고 1755년(영조 31) 10월에 판각되었다. (사진제공=문화재청)

이은영 기자 press@sctoda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