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혜림의 ‘심연(深淵’-22회 창무국제무용제
장혜림의 ‘심연(深淵’-22회 창무국제무용제
  • 이근수 무용평론가/ 경희대 명예교수
  • 승인 2016.07.14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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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무용가가 도달하기 어려운, 예술성과 시대성을 겸비한 최고의 작품"
▲이근수 무용평론가/ 경희대 명예교수

<심연>을 보기 전 몇 군데 무대에서 장혜림의 춤을 보았다. 국립국악원 무용단 정기공연에서 <역신과 처용의 처>에 이동준과 함께 출연한 2인무와 M극장 개관 10주년 기념 기획공연에서 이영일과 함께 춤춘 <물들다>, 그리고 가장 최근에 <다움>에서 본 연은주와의 2인무다.

이 작품은 한명옥 드림무용단의 창단 20주년기념공연에 초청되어 풍류사랑방 작은 무대에 오른 15분의 짧은 공연이었다. 중요무형문화재 40호인 ‘학연화대합설무’의 학과 연꽃이 모티브가 되고 전통 춤의 우아함에 현대 춤의 세련된 형식을 담아 신비로운 여심을 표현한 조용하면서도 유쾌한 작품이었다.

이러한 인상들이 22회 창무국제공연예술제에 초청된 Ninety9 Art Company의 <심연(深淵; 7.7~8, 아르코대극장)>공연으로 자연스럽게 나를 이끌었다.

<심연>의 주제는 여인의 한(恨)이다. 장혜림을 비롯한 8명의 여자무용수가 출연한다. 무대 오른 쪽에서 몸에 밀착된 검정색 긴 드레스를 입은 한 여인(장혜림)이 등장한다. 그녀의 손에 종이로 접은 듯한 하얀색 작은 배가 들려 있다. 무대 반대편에서 흰 옷을 풍성하게 차려 입은 다른 여인(서진실)이 등장한다. 머리에 쓴 흰 관과 빳빳하게 세워 올린 머릿결이 예사롭지 않은 신분임을 암시한다.

조명이 가려진 무대 뒤쪽에서 바이올린(한아인)이 생음악을 연주한다. 무대 가운데서 조우한 두 사람의 주변을 새롭게 등장하는 검은 옷의 여인들이 둘러싸고 춤추기 시작한다. 여인들이 두 손을 가슴에 모은 채 받쳐 든 종이배는 저마다 품고 있는 자기만의 한(恨)이다. 넘실대는 강물 위에 떠내려가는 조각배처럼 그네들이 품은 한도 물결처럼  흔들린다.

품은 한이 깊은 만치 춤사위도 굴곡이 깊다. 리드미컬하게, 정지한 듯하다가 때로는 거칠게, 느림과 빠름을 반복하며 온 몸의 율동이 이어질 때 관객들은 숨죽이며 무대로 몰입한다. 무대 한 가운데 정좌해 있던 여인이 일어나 무대 주변을 거닐기 시작한다.

그녀는 하늘이며 바다며 시간의 흐름이고 인간에게 주어진 숙명을 상징한다. 검은 상복(喪服)의 여인들이 그 앞에 등불을 올리고 그 등불은 다시 그녀의 손에서 여인마다에게 하나씩 넘겨진다. 여인들이 앞으로 이동하면서 자리에 등불을 내려놓는다. 울부짖듯 바다를 향해 내 지르는 여인의 곡성에 메아리치듯 여인들이 짧은 비명을 지르기 시작한다.

보컬의 리더는 서진실이다. 운명을 예감하고 주어진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체념의 표시일까. 가슴 속에 자리한 한을 반드시 흘러 보내야하는 것은 아니다. 보내려한다고 해서 완전히 사라지지도 않을 것이다. 깊숙이 간직된 한이 새로운 출발을 위한 극복의 에너지로 작용할 수는 없는 것일까.

바이올린과 함께 자리한 드럼과 건반이 힘 찬 음악을 연주하고 있다. 어두운 바다처럼 무겁게 흐르던 춤사위에 힘이 더해지고 무대의 긴장감은 정점으로 치닫기 시작한다. 세련되고 정교했던 춤에 열정과 동력이 가해지면서 장혜림의 춤은 논리성과 서정성을 동시에 갖춘 완벽한 춤으로 다시 태어난다.

“고요하고 깊은 바다/ 홀로 있던 배 한 척/ 삶의 무게에 짓눌려/가라앉고 가라앉다가/
바다 속 깊은 곳 컴컴한 그곳에서/ 가슴 치던 한을 만났다/애써 외면하고/ 운명이라 주워 삼키고 삼켜왔던/ 그대들의 한을 만났다/바라보니 나 또한 괴로워/ 몸부림에 굽이치듯/ 영혼의 물결이 일면/깊고 깊은 바다 속에서/ 다시 배 띄우리. 깊고 깊은 내 영혼의 바다 속에서”(이주희)

심연처럼 깊이 가슴에 맺힌 한을 여인들이 손마다에 받쳐 든 작은 배로 상징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세월호의 아픔을 떠올려준다.

‘크리틱스초이스 2016 공연’(4.2~10, 아르코대극장)의 마지막 순서로 2주년 추모일을 한 주 앞두고 초연된 작품이라는 데서 이러한 추측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장혜림은 사건을 직접 언급하지도, 직설적으로 표현하지도 않는다. 속절없이 죽어간 자식들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한을 한국 고유의 정서인 한으로 승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재학 중이던 2008년, 동아무용콩쿠르 한국무용창작부문에서 금상을 차지함으로써 자신의 이름을 처음 알렸던 장혜림이 보여주고 있는 놀라운 성숙함이다.

유관순을 주제로 판소리를 한국무용과 연결시킨 <겨레의 꽃>이 그때의 수상작이었다. 2014년 Ninety9 Art Company를 창단하고 <숨그네>로 2015년 크리틱스초이스 최우수안무가로 선정되었던 장혜림이 <심연>에서 보여준 예술세계는 심미적이면서도 독창적이다.

<심연>은 30세 젊은 무용가가 도달하기 어려운, 예술성과 시대성을 겸비한 최고의 작품이었다고 나는 평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