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기획]동양과 서양의 필연적 만남 화성과 화성돈(워싱턴)
[테마기획]동양과 서양의 필연적 만남 화성과 화성돈(워싱턴)
  • 이동식 언론인/저술인
  • 승인 2016.07.18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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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식 언론인/ 저술가/현 KBS 비즈니스 감사/KBS 정책기획본부 본부장 역임/2010.06~ 제7대 한국불교언론인회 회장.

인류에 있어서 18세기 후반은 희망의 시대였다. 그 때까지 서양을 짓누르고 있던 절대왕권이라는 압제의 사슬은 자유와 평등이라는 새로 태어난 이념(영국의 산업혁명으로부터 싹이 트기 시작해 시민사회의 성숙이라는 토양에서 거름을 취하고 프랑스혁명과 미국의 독립이라는 두 사건에 의해 마침내 현실에서 구현되기 시작한 그 이념)에 밀려서 서서히 걷혀가고 있었다.

동양에서는 어떠했는가? 동북의 만주족들이 중원을 석권하고 세운 청나라는 康熙帝 (강희제, 1661-1722), 雍正帝(옹정제, 1723-1735)등 걸출한 황제들의 치세를 지나 청나라 최대의 황금시대라는 乾隆(건륭, 1736-1795)황제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었다.

명나라를 부흥하겠다던 잔존세력은 이미 완전히 소탕됐으며, 중국 지식인들의 反淸(반청)정신도 이미 사그러들고 있었다. 이러한 태평성대를 증명하는 작품이 곧 「四庫全書」(사고전서)의 完刊(완간)이다.

"盛世修典"(성세수전),곧 성대에는 책을 펴낸다는 중국의 말처럼 사고전서는 1773년부터 1782년까지 10년 동안 중국전역에 흩어져 있는 책을 모아(물론 당시 청나라에 불리한 이른바 불온서적은 모조리 수거, 소각해 청나라 최대의 焚書(분서)사건으로 기록되기도 하지만) 당시 세계에서 가장 방대한 도서모음집으로 펴내었던 것이다.

중국의 동쪽에 있는 조선왕국에서는 건국이후 근 400년이 지난 시점에서 21대왕인 영조에 이어 그의 손자인 22대 정조라는 걸출한 지도자를 만나 새로운 문예부흥의 시대를 구가하고 있었다. 가장 융성한 청나라문물을 받아들이되, 중국 것을 그대로 베끼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사상과 토양에 맞게 새롭게 걸러내어 그림에서, 글씨에서, 학술과 사상에서 한국적인 아이덴티티(正體性, 정체성)을 구현해가고 있었다.

바다 건너 일본은 어떠한가? 도쿠카와幕府(막부)의 江戶(에도)문화가 무르익어가고 있었고, 임진왜란이후 조선으로부터 전래된 朱子學(주자학)을 바탕으로 성장한 일본의 國學(국학)이 서양에서 들어온 洋學(양학),또는 蘭學(난학)과 교감을 주고받으며 일본의 근대정신을 형성해가고 있었다. 한마디로 세계는 미래를 위한 희망이 자라고 있는 시대였다.

바로 이러한 18세기를 마감하는 마지막 10년대인 1790년대, 지구상에는 두 개의 새로운 도시가 서양과 동양 두 군데에서 동시에 세워지고 있었다.

워싱턴과 수원의 기이한 인연

자유와 평등이라는 새로운 인류의 이상을 목표로 문을 연 아메리카합중국은 영국군이 물러가고 독립은 했지만 여전히 13개 주의 이해가 상충되고 있는 상태에서 퇴역수당을 달라는 제대군인들이 필라델피아에 있던 의사당에 집단으로 난입하는 등의 소동으로 어수선했다.

▲미국의 행정수도 워싱턴(중국어로 화성돈華盛頓이라 표기).

미국인들은 그래서 외부의 간섭을 받지 않고 독립적으로 연방의 일을 다룰 수 있는 행정수도를 필요로 하게 됐다. 새 수도를 건설하자! 그러나 남부의 주와 북부의 주가 서로 이해관계가 달라 설전을 계속하다 겨우 7년만에 포토맥 江변에 새 수도를 세우기로 결정을 본다.

새 수도의 이름을 당시 초대 대통령이던 워싱턴의 이름을 따서 붙이기로 하고, 워싱턴대통령에게 그 수도의 설계자를 위촉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지자 워싱턴은 프랑스출신의 공병소령 피에르 샤를르 랑팡(Pierre-Charles L'Enfant)에게 새 수도의 기본설계를 의뢰한다.

파리의 왕립회화조각아카데미(Academie Royale de Peinture et de Sculture)에서 미술을 공부했고, 당시 자유와 평등을 신봉하던 많은 프랑스의 젊은이들처럼 1776년 미국의 독립전쟁에 지원병으로 뛰어 들어 많은 전공을 세웠으며, 혁명에 대한 남다른 열정과 예술적인 재능으로 존경을 받아온 랑팡 소령은 워싱턴으로부터 새 수도 설계를 의뢰 받자, "새 수도는 단순히 13개 주의 수도로서가 아니라 앞으로 무한히 발전하는 큰 나라의 수도가 돼야한다, 앞으로 50개 주에 인구 5억 명을 가진 대합중국의 수도를 지어야 한다"는 신념아래 포토맥 강변 허허벌판에 금을 긋기 시작한다.

▲수원 화성 전경

할아버지인 영조대왕이 52년간이나 재위에 있다가 승하하자 정조는 1776년(미국 독립전쟁이 일어난 같은 해임) 조선왕조의 제22대왕으로 등극한다.왕위에 오르자마자 정조는 억울하게 죽은 생부 莊憲世子(장헌세자)의 원한을 풀어주는 작업에 나서게 된다.

10살 때인 1762년에 일어난 아버지의 사망은 어린 정조에게는 너무나 큰 상처였다. 세 살 때에 이미 영조대왕과 대신들 앞에서 「孝經」(효경)을 외우고 7살 때에는 「童蒙先習」(동몽선습)을 뗄 정도로 영민했던 장헌세자였지만 궁중의 엄격한 법도를 벗어나는 행동으로 해서 부왕으로부터 자주 꾸중을 듣고 또 당파싸움에 관련된 각종 모함으로 비정상적인 정신질환을 앓게 된 뒤 급기야는 무고를 받아 뒤주 속에 갇혀 8일만에 세상을 뜬 장헌세자, 그 때가 겨우 28살이 아닌가?

정조는 즉위한 그 해 초 곧바로 당시 楊州(양주) 中梁浦(중량포) 拜峰山(배봉산)에 있던 아버지의 묘소인 垂恩墓(수은묘)를 격을 높혀 永祐園(영우원)으로, 존호도 思悼(사도)에서 莊憲(장헌)으로 바꾼다. 그러면서 아버지를 좀 더 좋은 자리에 모실 수 없을까 고민고민하다 천하의 명당으로 알려진 수원시 남쪽 태안읍 안녕리 산 1-1번지를 직접 수차례 답사한 뒤 이리로 자리를 옮기기로 결정한다.

▲수원 화성의 관문인 팔달문

즉위 13년째인 1789년 온갖 정성을 들여 새롭게 단장을 해서 아버지의 유택을 옮기고 이름도 顯隆園(현륭원)으로 바꾼 정조는 해마다 때마다 이 곳을 찾아 참배를 계속한다. 안양에서 수원으로 넘어가는 고개에서 길이 더디다며 재촉하고, 돌아설 때에는 가기 싫어 몇 번이고 되돌아 볼 정도로 효심으로 가득 찼던 정조, 그는 기왕에 옮겨진 아버지의 능을 길이 지켜 줄 든든한 성을 쌓고 싶었다.

물론 성을 쌓는데는 새로 능을 만드느라 능 밑에 있던 舊邑治(구읍치)와 민가를 집단으로 이주시켰기 때문에 이에 따른 민심을 안정시켜야 한다는 조정의 논의가 먼저 있었지만, 효심이 누구보다도 강했던 정조이기에 내심 이 기회에 아버님의 묘소가 훼손되지 않도록 지켜주는 방호기지로서 만세에 이어질 아주 튼튼한 성곽도시를 묘소 옆에 만들어놓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한 정조의 강력한 원심에 의해서 정조 14년인 1790년부터 팔달산 아래 숲과 벌판이었던 현재의 수원시자리에 새도시 건설을 위한 금을 긋는 작업이 시작된다.

▲현재 수원 화성의 성문과 누각, 누대 등이 배치된 지도.

돌이켜 생각하건데, 오늘날 세계를 이끌고 있는 미국의 수도로서 사실상 세계의 수도라고도 할 수 있는 워싱턴시가 현재의 자리로 세워지기로 결정된 것이 1790년이며, 이듬해인 1791년에 피에르 샤를르 랑팡 소령이 설계자로 위촉돼 수도건설을 위한 첫 작업이 시작됐다면, 같은 1790년에 조선에서는 정조대왕에 의해 새로운 성을 짓기 위한 설계와 공사가 시작되었다.

(*그보다 먼저 1776년, 미국의 독립전쟁이 시작된 해에 정조가 등극한 점에 유의해주기 바란다. 자유와 평등의 구현이 시작된 게 1776년이라면 아버지에 대한 비원을 안고 있던 정조가 등극함으로써 효를 구현할 수 있는 바탕이 마련된 것도 같은 해인 1776년이다)

한 도시는 서양의 최고이념인 자유와 평등을 구현하기 위한 도시이며, 다른 한 도시는 동양의 최고의 이념인 孝(효)를 구현하기 위한 도시이다. 정조의 원으로 세워진 華城(화성, 수원의 원래 이름으로 정조가 그렇게 명명했다)과 워싱턴은 이렇게 아주 기이한 인연으로 만난다.

◆화성, 인류사의 꽃봉오리를 피우다

화성의 건설은 1794년에 본격적으로 시작돼 약 3년 만인 1796년에 완공된다. 올해가 그 220주년이 되는 해이다. 워싱턴의 건설은 애초 설계자 랑팡에 대한 견제가 심해 설계자가 바뀌기는 했지만 1791년에 설계에 들어가 1790년대 후반에 공사를 대충 마무리하고 1800년에 새 수도에서 업무를 시작한다. 우리 조선에서는 이 해에 정조대왕이 세상을 떠난다.

1790년에서 1800년 사이에 동양의 조선왕국의 화성과 미국 수도 워싱턴은 이런 많은 우연과 필연을 거쳐 둘 다 동 서양의 최고의 가치이자 덕목을 내세우며 두 개의 계획도시로 탄생한다. 그야말로 인류사에 있어서 이러한 기연이 어디 있겠는가?

▲미국의 행정수도 워싱턴(중국어로 화성돈華盛頓이라 표기).

기연만이 아니라 그것은 동양과 서양의 추구했던 이상이 1790년대에 바로 꽃으로 핀, 그야말로 화성華城, 혹은 화성華盛이 되는 역사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다. 그러기에 이제 1776년 미국 독립전쟁의 시작과 1776년 조선왕국의 정조대왕의 즉위는 이러한 인류사의 큰 꽃봉오리를 피우기 위한 세계사적인 암시이자 신호탄이었다.

더욱 묘한 것은 미국의 수도 워싱턴을 중국인들이 한자로 번역할 때에 華盛頓(화성돈)으로 했는데, 그러다 보니 우리 나라의 華城과 한자로 표현한 이름과, 그 이름을 한국식으로 발음할 때의 발음이 같아졌다.

우리 나라의 華城이 꽃의 도시라면 워싱턴도 중국인들이 부르는 華盛頓이란 이름도 꽃이 무성하다는 뜻이 된다. 어떻게 이렇게 수원의 화성과 미국의 수도 워싱턴은 도시를 만드는 연대에서부터 만들려고 하는 의도, 그리고 이름에서까지 기묘한 일치가 많은가? 동양과 서양이 어떻게 이렇게 묘하게 만날 수 있는가?

▲수원 화성 성곽 전경.

우리의 화성은 한국의 고금성곽축조기술을 총망라한, 한국성곽사의 꽃이라는 의미 외에도, 華城의 발원자인 정조의 효심이 담겨지고 구현된, 효심이라는 이념을 담은 새 도시로서 지금까지, 아니 앞으로도 영원히 이어질 것이다. 미국의 워싱턴은 우리 인류에 있어서 가장 소중한 가치인 자유와 평등을 상징하는 도시로서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남을 것이다.

이러한 일치와 기이한 인연, 두 도시모두 동서양을 대표하는 소중한 이념에 의해 창조된 도시라는 점, 모두 같은 시간에 기획되고 같은 시간대에 만들어졌다는 점을 어떻게 우연으로만 돌릴 수 있을까? 인류에 있어서 희망의 시대였던 18세기 후반에 동양과 서양에서 인간의 숭고한 이념과 가치를 구현하기 위한 두 도시는 이렇게 동시대에 세워졌던 것이다.

◆시대를 앞지른 정조의 혜안

▲수원 화성을 축성하기 위해 당시 정약용이 고안한 거중기

그러나 그러한 의미 있는 성곽도시 華城은,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자칫하면 잠깐 피어나고 지는 꽃봉오리 신세에 지나지 못할 뻔 했다. 정조의 효심이 속속이 배어 든 저 長安門(장안문)의 홍예(虹霓), 팔달문의 樓閣(누각), 성을 지키기 위해 지휘소로 만들어진 西將臺(서장대), 웅장하면서도 미려한 성문과 樓臺(누대), 당시의 어떠한 火器(화기)에도 능히 방어할 수 있도록 설계된 튼튼한 방어시설 등등....난공불락의 요새이면서도 아름답고 화려한 이 철옹성도 세월이 지나면서 그 모습을 잃어버렸다.

일제의 침입, 625라는 동족끼리의 砲煙(포연)에 의해 한갖 떨어진 꽃봉오리의 신세가 될 뻔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다시 정조의 효심이 얼마나 철저하고 돈독했는지를 새삼 확인하게 된다. 왜냐하면 대왕은 이 화성이 영원히 남을 수 있는 비책으로서 성을 만드는 전과정을 성곽과 누대, 전각 등 모든 시설물의 실물도형과 함께 완벽한 기록으로 남겨놓았기 때문이다.

《華城城役儀軌》(화성성역의궤), 즉 화성 성을 쌓는 役事(역사)를 자세히 기록한 이 기록으로 해서 화성은 성이 세워진지 근 2세기를 지난 현대에 와서 화려하고도 아름답던 옛 모습을 되찾을 수 있도록 해주었다.

총 9권에 이르는 방대한 기록을 통해 거기에 참가한 공사인부들까지, 돌 하나 재목하나 필요한 모든 재료까지, 돈이 얼마나 들었는지를 꼼꼼히 적어놓은 외에, 화성의 공사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하게 기록해 놓았고, 모든 시설물을 빠짐없이 기록으로 남기도록 한 이 기록은 ,혹시나 세월이 지나감에 따라 훼손될지도 모를 이 성을, 당대만이 아니라 후세에 다시 살려주고 있다. 그래서 효심의 성 화성이 영원히 남도록 한 것이다. 정조의 혜안은 시대를 앞질러 가고 있었다.

이《華城城役儀軌》가 옛 판본 그대로, 정조의 효심이 흠뻑 배어있는 옛 책의 목판 칼자국 그대로를 살려 영인, 출판됐다. 수원의 서지학자인 이종학(전 독도박물관장)씨가 사재를 들여 만들었다. 모두 200질을 만들어 100질을 해외의 중요 연구소와 대학에 보내니, 이로써 우리 나라 전통문화의 우수성을 세계에 널리 알리게 되어, 그 의미가 깊다고 하겠다. 반갑고 기쁜 마음에 몇 줄 써 본 것이다.

▲이종학 전 독도박물관장이 펴낸 《華城城役儀軌》 가로 22.8cm 세로 36.8cm 크기의 영인본. 이 전관장의 기증으로 현재 수원광교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이 《華城城役儀軌》는, 한국이 세계에 자랑하는 인쇄문화인 동시에, 한국 건축사의 꽃일 뿐 만 아니라 동양건축사의 생생한 증인이자 당당한 適子로서, 또 우리 인류의 치밀하고도 용의주도한 모습을 새롭게 확인할 수 있는 세계적인 문화유산이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유네스코가 이 화성과 화성역의궤를 인류가 보존해야할 문화유산으로 지정한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 된다. 국민들과 함께 기뻐하며 그 의미를 나름대로 적어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