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경의 일본속으로]고이케 요시유키(小池善之)"일본 지역사도 '제국'시대 문제 드러내야"
[이수경의 일본속으로]고이케 요시유키(小池善之)"일본 지역사도 '제국'시대 문제 드러내야"
  • 이수경 도쿄가쿠게이대학 교수
  • 승인 2016.08.15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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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제국'에 투입된 조선인 비롯 해외인 등 각 지역 식민지배 일본의 '은폐된 양심' 지적
▲이수경 도쿄가쿠게이대학 교수

구미 열강의 각축 속에서 일찌감치 근대문화에 눈을 뜬 일본은 야마구치 지방 출신의 의사 오오무라 마스 지로(大村益次郎, 1824년 5월 30일~ 1869년 12월 7일) 가 서양의 서적들을 탐독하면서 군사학 이론을 정립시켜 근대 일본군을 창시하였고, 서양의 발전에 충격을 받고 돌아온 구미 시찰단들은 자국의 부국 강병책을 다양하게 논하게 된다.

그 결과 1875년의 강화도 사건을 비롯한 약 70년간의 한반도 강탈, 동아시아 각지의 식민지 통치 지배를 행하게 되고, 대륙으로의 통치 확대라는 호전적 공간 속에서 군국주의, 제국주의에 빠져 전쟁의 역사를 걷게 된다.

그러한 비극의 역사는 또 다른 슬픈 역사를 파생시켰다. 남북 분단구조는 일본 속의 동포 간 대립 갈등을 빚게 만들었고, 지금도 재일동포 사이에는 같은 한민족의 후손이면서도 서로 마음 편히 인사조차 나눌 수 없는 상황이다.

이런 민족적 불행의 원인을 제공한 일본 제국주의의 책임이 얼마나 큰지는 그러한 동포의 대립 구조공간에 놓여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게다가 과거의 제국주의 시대상황 속에서 일본도 힘의 논리를 따르지 않으면 안 되었다는 식의 정당화, 과거의 전쟁 은 성전이었다는 미화가 고개를 치들면서 일부 보수적인 정치가들이 과거사에 대한 반성보다 혐한 세력들의 주장을 되려 이용하고 있는 듯한 태도를 보이기에 재일동포들의 입지는 더더욱 불편한 현실이다.

도쿄도 지사 후보의 선거 유세라는 명목으로 민단 중앙본부 앞에와서 고성을 지르며 “선거권도 없는 외국인 주제에”,“조센진 주제에”,“한국으로 돌아가!”라는 도발과 난동을 서슴지 않는 혐한 세력의 초라한 횡포를 보다 보면 한일 양국은 서로의 성장한 사회 모습을 위해서라도 적극적 대화의 기반을 만들어 우호적인 분위기 조성을 하루빨리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한국을 이해하고 일본을 이해하여 가교 역할을 해야 하는 지한파 지일파 정치・행정가들의 감소, 혹은 부재라는 현실과 더불어 양국 정부 측 관료들의 대화는 역사문제에서 의견을 좁히지 못하고 탁상공론을 반복하는듯하다. 그렇기에 개선해야 할 한일관계는 더 복잡해지거나 혹은 경직 상태가 되고 있고, 일본은 추했던 과거사 은폐를 위한 ‘아름답고 보기 좋은 일본 만들기’에 여념이 없다. 양심의 부재이다.

일본이 만든 전쟁의 역사 속에서 파생된 재일동포의 존재가 거추장스러워 헤이트스피치 세력의 무차별 살인・강간 조장 등의 언어 횡포를 언론의 자유란 표현으로 방치 혹은 못 본 척하는 것이다. 그런 양심불량에서 양산된 혐한 세력들의 태도가 아름답게 치장하려는 일본을 오히려 흙탕물 속으로 밀어 넣고 있음을 방임하거나 깨닫지 못하는 현실적 모순에 답답함을 느끼던 와중에 시즈오카현(静岡県)의 지인의 서고에서 사료를 확인하던 어느 사학자를 만났다.

도쿄 근처 시즈오카현의 공립 이와타농업고등학교(1896년 설립)에서 역사를 가르쳤던 고이케 요시유키(小池善之, 65세) 씨는 퇴직 후, 국립 시즈오카대학 강사를 겸하며 시즈오카현 역사위원으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그는 발로 뛰고 원전(原典) 사료나 현장을 눈으로 확인하는 학자적 기본자세에 철저하다. 그리고 시즈오카현에 동원된 한국 조선인 동원 노동자들에 대한 조사를 많이 해 와서 동포들의 서글픈 역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다.

그렇기에 일본에는 ‘과거사 은폐’의 움직임만이 아닌 재야학자의 양심도 존재한다는 일말의 희망으로 그가 발표한 글을 소개하려 한다. 이글은 고이케 씨가 10년 전인 2006년 8월에『地方史研究』에서 발표한 내용이지만 동포 역사연구가이기도 한 그가 지적하는 지역에서 보는 ‘제국주의’와 그 영향, 지역 간 이동 노동자, 그 속의 우리 동포들의 강제동원 모습도 엿볼 수 있기에 소개하려 한다.

참고로 여기서 역설하는「大日本帝国」 은 당시 행해졌던 일본의 제국주의 슬로건을 그대로 인용하여 시대적 상황을 나타내는 용어이다.

아래는 고이케 요시유키(小池善之) 교수의 글을 필자인 이수경 교수가 번역한 글이다.(편집자 주)

(지방) 자치체(자치단체) 역사에 있어서의「제국(帝国)」의 결여
                                                                              

                                                                                고이케 요시유키(小池善之)

작년(2005년)부터간행되고있는『岩波講座アジア・太平洋戦争(이와나미 강좌 아시아 태평양전쟁)』전 8권. 그 전집 제 1권 「간행사」에 이렇게 적혀있다.

1945년의 패전까지「일본」은 조선반도, 타이완을 비롯한 식민지를 가지고,「満州国(만주국)」을만들고, 나아가서는 중국이나 동남아시아 등을 점령지로 하는「帝国(제국)」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제국 지배는 탈식민지화가 행해진「戦後(전후)」의 지금도 아직 각지에 심각한 흔적을 남겨놓고 있습니다.(ⅳ)

나는 평소부터 이와 같은 시점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후술 하겠지만 일본 근현대사에 있어서는 이렇게 보는 시점이 불가결하기 때문이다. 나는 몇 년 전, 다음과 같은 글을 적었다.

자치체 역사를 읽으면서 항상 불만스럽게 생각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일본 근현대사 속에「大日本帝国(대일본제국)」이 기록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지역의 역사적 전개와「大日本帝国」의 그것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이 존재하는 것처럼 기술된 것이 많다.

일반적으로는 지역사에 관한 서술 앞에 개설적인 일본 근현대사가 기록된다. 그 속에서는 근대 일본이 관련된 침략전쟁이나 식민지 지배는 논해져있다.

각 자치단체 침략전쟁이나 식민지 지배「基盤(기반)」이었던 것에 대한 언급 하지 않아

하지만 각 지역을 논하는 서술 속에서는 전쟁에 동원되는 모습(사람, 물자, 돈)은 묘사되어도(그 경우, 지역주민은 매우 수동적으로 묘사된다), 그지역이 「大日本帝国」의(지배) 아래에 있고, 침략전쟁이나 식민지 지배의 이른바「基盤(기반)」이었던 것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고 있다. 지역을 한정해서 지역사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심한 경우에는 근현대사 쪽이 사료가 없는 고대사보다도 지역이「한정」 되어있는 경우도 있다.

주지하듯이 근대 일본 국가는 다른 외국과의 전쟁, 그리고 주변지역의 식민지화를 추진하면서 형성되었다. 근대 일본 국가의 확립에 있어서 전쟁과 식민지 지배는 불가결한 요소였다. 그것은 지역도 같은 맥락이었을 것이다.

전쟁이든, 식민지화든 그것들은 현상적으로는 대외적인 관계이지만, 그러나 그것들은 동시에「大日本帝国」의 내부도 규정하는 불가결한 요소로서 존재해 왔다. 대외적인 문제임과 동시에국내적인 문제인 것, 따라서 그것은 동시에 지역의 문제이기도 했던 것이다.

예를 들면, 사람들의 이동에 대해서 보자. 전쟁 전에 있어서 토목공사를 비롯해 저임금 노동력을 구사하는 노동현장에는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만큼 조선인의 모습이 보였을 것이다. 이것은 지역에 있어서의 식민지 지배를 나타내는 것이다. 혹은 병사로서, 여행자로서 또는 관리로서 등등,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침략이나 식민지 지배의 일꾼으로서 외국 혹은「外地(외지)」에 이동했을 것이다. 어느 지역이라도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서 무관계(혹은「무죄」)일수는 없을 것이다.

제국주의 전쟁과 토목공사 등에 착취된 조선인에 대해 어떤 지역도 무관계(무죄)일 수 없어

우리들이 지역의 역사적 전개를 묘사한다는 것은 그와 같은 사실을 포함한 것이 아니면 안 된다. 만약 그러한 기술이 없다면 그것은「大日本帝国」 하의 지역의 역사를 묘사한 것이라고는 할 수 없지 않을까?

또 예를 들자면, 한 사람의 인간이「兵士(병사)」로 소집되어 출정한다(그야말로「大日本帝国」의 일원으로서이다). 아마도 그것은 가정에 있어서는「부정적인」 사태였을 것이다. 노동력의상실 등, 한집안의 생활・경영을 불안정화 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역, 지방(현 단위, 마을 등)이나 일본 국가는 그것을「긍정해야 할 것」으로 “逆転(역전)”시킨다.

그와 같은 구조가 각 분야에서 존재했다. 그것은 우선 근대 일본 국가가 채용한 징병제이고, 학교교육이고, 전시의 경우 헌금, 군사 공채의 응모, 그리고 소집에 응한 유가족에 대한 구원 사업, 귀환병의 환영, 표창 및 위령이었다. 이러한 사업 없이는 국가는 전쟁을 수행할 수 없었다. 그야말로 침략전쟁이나 식민지 지배가 지역을 규정하고 있었던 측면도 있는 것이다.

우리들은 지역을, 국경을 초월한 국제적 관계로서의「大日本帝国」이란 구조에 휘말려 들어간 것을 인식하여 그와 관련한 연구를 하고 서술하지 않으면 안 되지 않을까?

지역은 그 지역만으로 완결하는 것이 아니다. 일본의「東西(동서)」뿐만이 아니라 다른 지역(외국이나「외지」등도 포함)과 다양한 관계를 가지면서 지역사는 창조 되어간다.「국제화」는 현대만의 특징이 아니라 「대일본제국」 때는 당연한 것이었던 것이다.

나는 시즈오카현 내에서 몇 군데 자치체 역사에 관계하지만 그곳에서는 가급적「帝国」의 시점을 관철했다고 할 수 있다. 큰 테마로 서술한 것을 예를 들면 아래와 같다.

「제국」 일본을 지탱한 지역은 국내뿐 아니라 해외인들 이동의 기록 외면한 지역 근현대사 서술 문제 

『浅羽町史(아사바네쵸사)』에 있어서는 어느 해군 병사의 일기를 바탕하여 제1차 세계대전 하의 태평양에서의 전투나 함선 수령(艦船受領)을 목적으로한 영국으로의 회항의 상황을 서술했다.

후자의 경우, 농촌 출신의 한 병사에 의한 「문명국」 영국과의 해후(그것은 병사에게 있어서는 경이적이었다)」도 기록했다. 또 중국 전선에서 보내온 군사우편을 중심으로 남경 사건에 관한 시즈오카현 출신의 병사의 모습(평범한 한 농민이 전쟁터에서 「병사」로 전환해 가는과정 등)을 묘사했다.

『本川根町史(혼가와네쵸사)』에서는 일청(청일-역자) 전쟁에 출정한 병사의 일기를 토대로 요동반도에서의 전투를 쫓고, 현역병으로서 타이완에 배치된 한 병사가 무사 사건(霧社事件-1930년에 타이완서 일어난 항일 무장봉기 사건)에 관련되어, 퇴역 후는 만주에 건너가「満洲国軍(만주국군)」의 일본계 교관으로서 조선인 부대를 창설한 것 등을 기록했다.

또『中川根町史(나카가와네쵸사)』에 있어서는 전시하의 오오이 가와(大井川)의 댐건설공사에 동원된 조선인(노동자들)의 모습, 혹은 분촌 이민(分村移民)으로서 「만주」로 송출된 주민들의 모습을 기록했다.

위와 같이「제국」 일본을 지탱한 지역은 국내의「東西」 지역뿐이 아니라 해외도 포함한 다방면에서 온 사람들의 이동을 만들었다. 그 이동에 대해서 지적하지 않고는 지역의 근현대사를 서술했다고 과연 말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출전;『地方史研究』2006년 8월호(제56권 제4호). 번역: 이수경 도쿄가쿠게이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