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수의 무용평론]노정식의 신작, '거인들'에서 보는 안무가의 진정성
[이근수의 무용평론]노정식의 신작, '거인들'에서 보는 안무가의 진정성
  • 이근수 무용평론가/경희대명예교수
  • 승인 2016.08.19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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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수 무용평론가/경희대명예교수

막이 오르기 전 나지막한 음악이 객석을 부드럽게 감싸며 울려 퍼진다. 슈베르트의 ‘4개의 손을 위한 피아노곡 판타지(Fantasie in F minor, D 940)’이다.

자연이 주제가 된 작품을 자연스럽게 풀어가려는 서곡이 인상적이다. 막이 오르면 무대 중앙에 건장한 체구의 벌거숭이 남자가 등을 돌린 채 웅크리고 누워있다. 바닥과 배경의 연녹색이 널따란 초원을 연상케 한다. 무대 한 쪽에서 장대를 든 인간들이 나타나더니 탐색하듯 무대를 가로질러간다.

배경이 석양빛으로 물들고 그 앞에 실루엣처럼 엉켜 있던 검은 군상 들이 하나 둘 씩 흩어지면서 기괴한 동작들을 실험하기 시작한다. 자리에서 일어난 남자가 무대 앞 쪽 바닥에 숨겨진 거울을 찾아내고 얼굴에 회칠을 하기 시작할 때 배경 막엔 담배연기처럼 안개가 피어오른다.

새소리가 사라지고 음악은 둔탁한 타악으로 바뀐다. 황량한 설산을 배경으로 검은 동굴이 보이고 그 앞에서 원시적인 제의가 펼쳐진다. 양팔을 360도 회전시켜 커다란 원을 만들고 두 손을 앞으로 모아 기원하는 동작이 반복된다.

배경의 변화는 시간의 흐름을 의미한다. 장송들이 들어선 울창한 숲을 배경으로 남자와 남자가 조우하고 그들의 대결이 벌어진다. 한 사람은 장대를 들었다. 장대가 무기이고 문명을 상징한다면 자연을 파괴하려는 자와 자연을 지키려는 자의 대결일 것이다. 가부좌를 튼 자세로 원 안에 앉아있는 여인들이 머리를 빗고 바느질 하고 빨래를 하고 다듬이질도 한다. 여인은 자연이고 여인의 일상은 자연스러움이며 지켜져야 할 유산들이다.

그러나 자연에 대한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고 욕망은 허상을 키운다. 3개의 중심으로 분할된 무대에 군무가 펼쳐진다. 스피드와 힘을 갖춘 남성들의 군무는 역동적이고 춤사위는 탄력적이다. 푸른 대지가 붉은 색으로 물들어가고 오염된 세계는 구름과 안개로 자욱하다. 장대를 든 군상들과 홀로 대결하던 남자가 쓰러진다. 슈베르트의 음악이 다시 들려온다. 겨울이 깊으면 봄도 멀지 않으리. 언 땅을 제치고 새 싹이 돋아나듯 우리는 봄을 기다리고 거대한 자연은 또 살아나 끈질긴 생명력을 이어갈 것이다. 

2016년 신작 <거인들(8.4~5,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노정식이 보여주고자 한 것은 자연과 인간의 복합적인 관계다. 그는 본원적이고 거대한 자연의 존재를 거인들로 표현하고 문명화되어가는 인간의 출현을 자연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한다. 인간과 자연간의 대립이 심화될수록 자연은 훼손되고 기후도 변화할 것이다. 그렇지만 노정식이 자연과 인간을 반드시 2분법적이고 대립적인 존재로만 인식하는 것은 아니다.

자연은 여전히 거대한 힘을 지니고 인간의 지혜가 상생의 길을 찾을 수 있다는 낙관 때문이다. 작품은 일관된 스토리텔링형식을 택하는 대신 10여개의 에피소드를 모자이크하듯 이야기를 완성해간다. 최지희의 드라마트루기가 돋보이는 부분이다. 자연 속 인간에 대한 낙관적인 상상은 피날레의 명장면으로 암시된다. 상처입고 쓰러진 남자가 일어나고 다시 무대에 깔리는 슈베르트의 희망적인 음악을 통해 회복의 메시지가 읽혀진다. 

임정은의 음악과 음향효과, 배경술의 의상, 김정화의 조명으로 구성되는 서정적인 무대는 복잡하면서도 미묘한 주제를 전달하는데 효과적이다. 양승관, 이동하, 권지애를 비롯한 11명 무용수들의 몰입된 춤을 통해 안무자의 구체적인 춤 언어와 주제를 파고드는 진정성이 느껴진 60분 작품이었다. 2010년 이후 독립무용가 및 연출가로서 꾸준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노정식이 ‘상처’, ‘소풍’, ‘Memory' 등에서 보여주었던 개인적 삶과 몸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자연과 사회 등 거인들로 확장하고 있다는 면에서도 의미 있는 작품이었다.  

 “뭘 해야 하는지 알고 싶다고는 하지만 자네는 보이는 세상조차 제대로 보질 못하고 있어. 뭔가의 공격을 받고 있다는 건 느끼지만 그게 뭔지는 몰라. 자넨 위대한 힘을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지? 짐승, 식물, 돌의 위대한 힘을...” ‘장 지오노(Jean Giono, 1895~1970, 프랑스)’의 소설 ‘언덕(Colline)’의 한 구절이다.

‘언덕’, ‘보뮈뉴에서 온 사람’, ‘소생’ 등 3부작이 자연과 인간에 대한 독특한 자연관을 그려낸 그의 작품들이다. <거인들>을 보는 내내 이 소설이 떠올랐다. 안무자가 이러한 세계에 계속적인 관심을 갖고 있다면 일독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