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usic Coulmn]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제7번 '레닌그라드'
[Music Coulmn]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제7번 '레닌그라드'
  • 정현구 국제문화개발연구원 부원장/ 코리아 네오 심포
  • 승인 2016.09.09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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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현구 국제문화개발연구원 부원장/ 코리아 네오 심포니오케스트라 예술감독

1941년 6월 23일 독일의 나치 공군들이 옛 소비에트연방의 도시를 공격하였다. 이 날 쇼스타코비치는 축구경기를 관람하기 위해 집을 나섰고, 축구장으로 가는 도중에 라디오를 통해 다급한 사변의 정세를 통고하는 몰로토프(본명은 Vyacheslav Mikhailovich Skryabin으로 당시 외무인민위원)의 연설을 들었다.

얼마 후 쇼스타코비치는 레닌그라드(현재의 상트페테르부르크)방호단에 들어가 공습에서 도시를 방호하는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그 후 얼마 안되어 쇼스타코비치는 전 소비에트연방을 향해 다음과 같은 방송을 하였다.

“나는 지금 전투가 아주 가까운 곳에서 벌어지려고 하는 레닌그라드에서 이 방송을 하고 있습니다. 하늘에는 우리의 공군이 날고 있습니다. 나의 방송은 그 전방에서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새로운 교향곡을 2악장까지 완성했습니다. 만일 순조롭게 작곡되어 언젠가 제3악장, 제4악장도 완성이 된다면 이것이 제 교향곡 제7번이 됩니다. 레닌그라드는 위험한 상태에 놓여져 있지만 시민들의 생활은 중단되지 않고 있습니다. 레닌그라드의 문화적 노동자는 다른 레니그라드의 시민과 같이 그 임무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쇼스타코비치는 이러한 공습의 상황에서도 틈틈이 작곡을 계속하고 있었는데 그의 아내 니나는 다음과 같이 당시의 일을 말하고 있다.

“공습이 있을 때에도 드미트리는 어지간해서는 작곡을 그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아주 위급한 사태일 경우에는 펜을 조용히 놓고 그것이 마르기를 기다려 단정히 원고를 챙겨가지고는 대피를 합니다. 외출 중에 공습경보가 있을 때는 언제나 나에게 전화를 걸어 원고를 대피소로 가져가는 것을 잊지 않도록 하라고 말했습니다.”

쇼스타코비치는 공습의 상황 속에 약 3개월 동안 레닌그라드에 머물고 있다가 정부의 명령에 의해 10월에 쿠이비셰프(볼가강 중류에 있는 현재 ‘사마라’의 예전 이름)로 가족과 이주하게 되고, 이곳에서 그의 교향곡 제7번이 완성되었다. 이 교향곡은 12월 27일에 탈고되어 1942년 3월 1일 지휘자 사모스드(1884~1964)에 의해 쿠이비셰프에서 초연되었다.

이 초연은 대단한 성공을 하였고, 열광적인 관객들의 호응과 박수로 인해 쇼스타코비치는 몇 번이고 무대로 불려 나오게 되었다.

이후 이 교향곡은 <레닌그라드 교향곡>이라 부르게 되었다. 쇼스타코비치는 “이번 전쟁의 영웅이 된 전 소비에트 시민에게”라는 헌정사와 함께 이 교향곡을 전쟁으로 상처를 입었으나 잘 극복해 내고 있는 시민들에게 헌정했다.

전쟁 중에 던져진 문제작으로 이 작품의 여파는 대단했다. 이 교향곡의 스코어는 곧 마이크로필름에 담겨져서 당시 연합국인 미국과 영국에 항공편으로 급송되었다.

미국에서는 지휘자들 사이에 서로 초연권의 쟁탈전이 일어났으나 결국 1942년 7월 19일 NBC 방송을 통해 토스카니니가 초연을 하게 되었다. 영국에서도 1942년 프롬나드 콘서트에서 콘서트에서 연주되었는데 너무나 평범한 작품이라는 평과 함께 그다지 환영을 받지는 못했다.

이 교향곡의 조성은 C장조이며, 제1악장은 알레그레토-모데라토, 제2악장은 모데라토 포코 알레그레토, 제3악장 아다지오-라르고, 제4악장 알레그로 논 트로포로 이루어져 있다. 이 곡을 대하며 ‘내가 쇼스타코비치와 같은 상황이었다면 과연 내 일상을 이렇게 충실하게 유지할 수 있었을까?, 자신의 일에 혼신을 다 할 수 있었을까?’ 자문하곤 한다.

그렇다. 상황이 바뀌어도 그것이 불가항력적인 것이라도 자신의 비전을 놓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자신이 목표로 한 것, 그것의 완성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쇼스타코비치는 이 교향곡을 통해 ‘너의 열정의 화로에 불을 지피고, 결코 풀무질을 멈추지 말라’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