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중강의 뮤지컬레터] 창극 ‘오르페오전’ 황호준 음악감독께.
[윤중강의 뮤지컬레터] 창극 ‘오르페오전’ 황호준 음악감독께.
  • 윤중강 평론가/ 연출가
  • 승인 2016.10.11 0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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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중강 평론가/ 연출가

화제의 창극 ‘오르페오전’을 보았습니다. 대한민국의 오페라와 뮤지컬의 관계자도 관심이 집중됐습니다. 이소영의 극본과 연출입니다. 황호준 음악감독께서, 전체의 작창과 작곡을 맡은 작품이었습니다.

‘오르페오전’은 좋은 작품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다음과 같은 생각이 떠나질 않습니다. ‘이 작품이 과연 훌륭한 창극(唱劇)일까?’ 좋은 음악극(音樂劇)임은 분명하나, 좋은 창극(唱劇)이란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당신은 동 세대 작곡가 중에서, 극성(劇性)을 드러내는 곡을 가장 잘 씁니다. 그러하기에 장르적인 스펙트럼도 넓습니다. 극의 전개과정을 세심히 고려하면서, 일정한 수준을 유지하면서 진행하는 음악적 변화에 일단 찬사를 보냅니다. 그러나 어떤 노래에선 ‘판소리’ 혹은 ‘참(唱)’이 실종되었다고 생각됩니다.

당신은 이 작품을 통해서, ‘장단이 배제 된 창극’을 만들고 싶어 했던 것 같습니다. 창극에서 상투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장단의 한계를 극복하려고 했던 것이죠. 동의하기도 하고, 성과도 있습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장단을 배제한 상태에서라면 더욱더 판소리, 곧 (장단을 배제한) 소리(唱)에 힘을 실어줘야 했습니다. 이게, 아쉽습니다. 이게, 부족합니다. 다른 음악극 장르에선 표현해내기 어려운, 판소리와 창극만이 갖고 있는 ‘소리의 힘’을 보여주는데 주력했어야 했습니다.

창극(唱劇)이 왜 창극일까요? 궁극적으로 창(唱)을 통해서, 미적 교감과 감동을 경험하는 장르입니다. 아쉽게도 이 작품에선, 소리(唱)의 ‘골갱이’를 느끼지 못하는 곡들이 있었습니다. ‘단단하고 질긴’ 목청의 울림이, 기존의 창극보다 덜 했습니다.

당신이 만든 스코어 자체는 우수했지만, 그걸 배우(소리꾼)가 부르기엔 흡족치 못한 면이 있었습니다. 이른바 판소리의 ‘소리길’과 변화무쌍한 ‘목구성’에 대한 이해와 활용이 아쉽습니다. 국악계에서도 이미 그런 용어를 사용하고 있기에, 이렇게 비유해 보겠습니다.

이번 공연은 판소리라는 ‘랑그’는 아쉬웠지만, 소리꾼(배우)들이 ‘빠롤’로 충족시켜주었다고 생각이 됩니다. 그런 면에서도 국립창극단의 역량이 매우 우수하다는 걸 확인합니다.

창극의 제작방식은, 일반적인 음악극(오페라, 뮤지컬)과는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창극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작창(作唱)입니다. 무릇 작창을 하려면, 판소리를 ‘아주 깊이’ 알아야 합니다. 우조길, 계면길, 평조길, 이런 것들이 음악학자의 괜한 이론이 아닙니다. 판소리 특유의 추천목, 메나리목 등도, 창극의 귀명창(관객)에게는 식별이 가능한 중요한 요소입니다. 이번 작품에선, 판소리적 ‘분위기’는 충만했으나, 판소리적 ‘본질’이 아쉽습니다.

‘판페라’란 말이 있습니다. 판소리와 오페라의 합성어이지요. 나는 이 용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지만, 창극 ‘오르페오전’은 만약 ‘판페라’의 시각에서 본다면, 가장 정점에 놓일 수 있는 수작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작품은 ‘판소리를 잘 활용한 작품’으로서 극찬을 할 수 있으나, ‘판소리가 갖고 있는 음악적 어법(語法)을 돋보이는 작품’이라고 얘기하긴 어렵습니다.

이 작품의 중간에 ‘랩’처럼 이어지는 ‘판소리’가 있습니다. 관객들이 그 부분을 좋아하더군요. 왜 그럴까요? 랩이 대중들에게 익숙한 것이라서 그럴까요? 완전한 정답은 아닙니다. 그 부분에서 비로소 창자(唱者)의 호흡이 관객에게 제대로 전달되었기 때문입니다.

창극에서 장단을 배제하거나 약화하는데 동의합니다. 때론 너무 판소리와 창극이 장단에 갇혀 있으니까요. 그런데 장단을 약화시킨다면, 오히려 다른 것을 더욱더 강화시켜야 합니다. 그게 뭘까요? 나는 창자의 호흡이라고 생각합니다.

창자의 음악적 호흡은 관객에게 더 긴밀하게 전달되어야 합니다. 당신에 의해서 만들어진 작창과 작곡이 때론 판소리의 소리길과 목구성에 적당치 않더라도, 소리꾼은 최선을 다해서 ‘판소리’와 ‘창극’에 맞게 그 부분을 해석하고 전달하기도 했습니다.

당신이 만들어낸 선율에서 부분적으로 그런 ‘호흡’이 자연스럽게 드러나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올페(김준수, 유태평양)가 노래를 할 때, 객석에서 나오는 귀명창의 자연스러운 추임새를 통해서도 확인됩니다. 물론 당신이 만든 모든 노래가 그렇지는 못했지만요. 그런데 아쉽게도 이런 소리의 구성(색깔), 혹은 소리꾼의 호흡을 방해하는(?) 요소가 있었습니다.

문제는 반주였습니다. 특히 피아노였습니다. “명색이 창극인데, 피아노가 왜 이렇게 많을까?” 이런 의문을 배제하고라도, 피아노는 그 기술적 숙련을 떠나서 소리꾼의 호흡을 ‘바라지’해 주지 못했습니다. 그런 역할에 창극단 기악부 단원처럼 익숙치 않은 것이죠.

피아노와 서양악기가 음악적으로 풍성하게 들리고, 오페라와 뮤지컬에 익숙한 청중들에게 친근하게 들릴 수 있었겠지만, 이런 것이 ‘판소리를 판소리답게’ ‘창극을 창극답게’ 만들어주지는 못했습니다.

공연을 보면서, ‘수성(질)’ 혹은 ‘수성가락’이 때때로 그리웠습니다. 과거 창극에서, 창자의 소리를 악사가 즉흥적으로 따라하면서 반주하는 형태를 말합니다. 이런 것에 대해서, 과거 창극단의 예술감독이나 작곡가들이 매우 전(前) 근대적으로, 발전하지 못한 음악형태로 치부하기도 했지요. 창극에는 수성가락이 필요한 부분이 반드시 있습니다. 이것이 여러 악기를 편성해서 서양음악적 사고로 전개한 스코어보다도, 관객들에게는 아주 큰 감동을 줍니다. 서양음악적 시각에서의 작곡이 결코 해낼 수 없는, 국악기의 특성과 연주자의 개성이 있습니다. 수성가락에선, 이런 것들이 살아나고, 그것이 공연의 생동감으로 작용합니다.

나를 과거의 창극에 익숙한 사람으로만 보지 마십시오. 아마 모르긴 해도, 그간의 나의 경험에 따른다면, 오히려 해외의 식견있는 청중들도, 화성에 근거한 이런 반주보다는, 화성을 초월하고 때론 대위적인 쾌감(!) 마저 주는 이런 식의 반주의 장점이 있습니다. 나는 당신이 창극의 음악감독으로서 이런 것까지 제대로 수용해주길 바랍니다.

창극 <오르페오전>은 전반적으로 우수했습니다. 작품의 내용과 맞게 전개되는 무대연출에는 찬사를 보냅니다. 국립극장 대극장 역사에서, 가장 무대활용도가 작품의 내용와 일치하는 최고의 작품이란 찬사를 하고 싶습니다. 더불어서 음악에 있어서도 ‘코러스’적인 면에서는 수려했습니다. 이제 창극단 단원들도, 이런 식의 가창과 연기에 매우 잘 적응했습니다. 몇 년 사이에 달라진 국립창극단의 위상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나는 지금도, 이리 생각합니다. 당신은, 판소리를 활용해서 가장 극적인 음악을 만들어낼 수 있는 작곡가 중의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입니다. 당신의 작곡적 세계 혹은 한계에서 벗어나서, 판소리의 깊은 세계에서 더욱더 많은 자양분을 섭취하십시오. 당신은, 보일 겁니다. 당신은, 해낼 겁니다.

* 창극 <오르페오전>. 2016. 9. 23. ~ 9. 28. 국립극장 해오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