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더불어 70년 김남조 자료전' 11.2일까지 영인문학관
'시와 더불어 70년 김남조 자료전' 11.2일까지 영인문학관
  • 임동현 기자
  • 승인 2016.10.11 2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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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개국 언어로 번역된 '깃발' 번역시 등 자료 전시, 22일 문학 강연도 열려
▲ 사진은 올해 1월 본지 서울문화투데이 문화대상 시상식에서 특별상을 수상한 김남조 시인이 인삿말을 하고 있다.(서울문화투데이 DB사진)

시인 김남조 선생의 구순을 기념해 마련한 '시와 더불어 70년-김남조 자료전'이 오는 11월 12일까지 종로구 영인문학관에서 열리고 있다.

김남조 자료전은 지난 2013년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의 팔순을 기념하는 '동행전'을 연 데 이어 이번에 원로문인 두번째 자료전으로 김남조 자료전을 지난 9월 23일부터 개최했다.

영인문학관 측은 "이 전시는 출판 기념회도 잘 하지 않으시는 김남조 시인의 70년 시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한 시인의 역정 속에 한국시 역사 70년이 담겨져 있다"면서 "김남조 시인은 90 고령에도 손수 자료를 정리하실 만큼 여전히 젊은 열정을 가지고 계시고 곁눈 한 번 팔지 않고 70년간 한 길만을 가고 있다"고 이번 전시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제1전시실에서는 70년대 김남조 시인이 각계각층의 원로들과 직접 대담한 심층 인터뷰 기사와 1988년 38개국 국어로 번역되어 서울올림픽 선수단 수첩에 실렸던 '깃발' 번역시가 처음으로 공개된다. 한 작품이 38개국 언어로 번역된 일은 문학사적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다.

또 김세중 조각가가 만든 김남조 두상, 박득순이 그린 초상화와 윤영석의 부조, 김시중의 조각그림 등이 전시되어 있으며 첫 시집 <목숨> 세 가지 판본을 위시한 시집 17권, 자필로 쓴 '서화첩에 그린 나의 프로필', 유명인사들이 애송한 김남조 시 등이 전시되어 있다.

제2전시실에는 1953년에 쓴 첫 소설의 육필 원고와 시집 <0사랑초서> 전편을 육필로 쓴 육필시집, 17권의 시집에서 시인 자신이 고른 '김남조 자선시(自選詩)가 서화첩 4권을 통해 공개되며 젊은 시절 김남조 시인이 색종이로 형상을 만든 지공예 작품이 붙여진 노트 '색지장난'이 처음으로 공개됐다. 이 외에도 애장품과 사진 스크랩 자료 등이 전시됐다. 

한편 '작가의 방'에는 박두진 시인의 자료들이 전시됐다. 이백의 시를 옮겨쓴 6폭 병풍과 그의 글씨를 오각진이 목각한 목각시 2련, 자화상을 아들 박영하가 동판으로 만든 얼굴 그림과 손수 고른 수석들, 애장품 문방사우와 시집 등이 전시되어 있다. 이 모든 자료들은 안성에 곧 지어질 박두진문학관에 옮겨질 예정이다.

전시 기간 중 매주 토요일에는 문인들의 문학 강연회가 열린다. 지난 1일 소설가 김홍신의 '인생 견문록', 8일 소설가 조정래의 '풀꽃도 풀이다' 강연에 이어 오는 22일에는 김남조 시인이 '시와 더불어 70년', 11월 5일에는 소설가 박범신이 '유리'라는 제목의 강연을 한다.

강인숙 영인문학관 관장은 "이번 행사를 위해 지원금을 다 바치다보니 봄 전시에 도록을 내지 못했다. 가슴아픈 전시를 한 것이다"라고 말하면서도 "이 행사는 시만 보며 살아온 한 시인의 삶을 기리는 우리의 오마주이자 이 땅에서 문학을 하다가 망각의 늪에 버려지는 모든 문인들에게 보내는 오마주이기도 하다. 외길을 걸어온 그 삶을 송축하고 싶어 일을 시작했다"며 당위성을 밝혔다.

특히 강인숙 관장은 이번 김남조 시인의 전시를 개최한 배경으로 김남조 시인이 1953년에 발표한  '목숨'이란 시를 소개하면서 김 시인은 전쟁통의 참담한 현실에서 삶의 희망을 길어올렸다고 서술하고 있다.

"선생님이 첫 시집을 내셨던 1953년에, 우리나라는 전쟁 중에 서울 시민들이 부산으로 몰려가서, 길가에 판잣집을 짓고 살면서 쌀도 물도 전기도 없는 결핍의 시대를 살고 있었습니다. 그 결핍의 시대에, 젊은 남자들은 전쟁터에서 팔다리를 잃어 상이군인이 되기도 했고, 이름 모를 산 속에서 시체가 되어 썩어 가기도 했습니다. 여자들은 아이를 안고 후방에 남아 주림과 싸우고 더러는 혼수 이불을 뜯어 두폭짜리 치마를 해 입고 술집에 나가기도 했습니다...아이들은 부모를 잃어 양아치가 되어 갔고, 움직일 수 없는 노인들은 먹을 것도 없는 빈 서울에 짐짝처럼 버려졌습다. 떠오르는 해가 희망을 주지 못했습니다. 부는 바람이 위로가 되지 못했습니다.거리에는 허무의 바람이 휘몰아치고, 사람들은 방향을 잃어 허둥대고 있었습니다. 그 때 김남조라는 시인이 나타나 ‘목숨’이라는 시를 선보인 것입니다"


  누구 가랑잎 아닌 사람이 없고
  누구 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없는

  불붙는 서울에서
  금방 오무려 연꽃처럼 죽어갈 지구를 붙잡고
  살면서 배운 가장 욕심 없는
  기도를 올렸습니다
   
   반만년 유구한 세월에
   가슴 틀어박고
   매아미처럼 목 태우다 태우다 끝내 헛되이 숨져 간
   이 모두 하늘이 낸 선천의 벌족이라도

   돌맹이처럼 어느 산야에고 굴러
   그래도 죽지만 않는
   그러한 목숨이 갖고 싶었읍니다

 갓 대학을 졸업한 나이라 했습니다. 폐병을 앓고 있다 했습니다. 노천명이 ‘산호림’을 낸 후 18년 만에 처음으로 나온 여류시인이의 시집이라 했습니다. 첫사랑의 연인이 북으로 납치되어 ‘어두운 길바닥 못생긴 질그릇처럼 퍼질고 앉아 / 눈도 귀도 없이‘(어둠) 울기도 한다고 했습니다. 그 처절한 절규가, 그 참신한 감성이, 전쟁을 겪고 있는 사람들의 심금을 흔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