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계 블랙리스트’ 정부는 ‘문화융성’ 논할 자격이 없다
‘문화계 블랙리스트’ 정부는 ‘문화융성’ 논할 자격이 없다
  • 임동현 기자
  • 승인 2016.10.13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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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에 조금이라도 반하면 불이익 주는 상황 지속, 불통이 문화를 망친다

우려했던 일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청와대와 문화체육관광부가 예술위원회 심사 및 심사위원 선정에 개입하고 있으며 이른바 '블랙리스트'가 존재한다는 것을 입증한 자료가 나온 것이다. '문화융성'을 앞세운 정부가 정작 문화융성에 가장 정면으로 배치되는 '문화 간섭'을 표방했다는 점에서 심각한 우려를 하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지난 10일 도종환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예술위가 지난해 5월 29일 회의록과 11월 6일 회의록을 제출하면서 정치적으로 민감한 부분이나 사업의 문제에 대한 지적 사항 등 상당 부분을 삭제한 채 허위 자료를 제출했다"면서 "삭제된 회의록 내용은 위원회 운영의 절차상 문제, 심사 과정에서의 문제점, 심사위원 구성 문제 등이고 그 중심에는 '위', '청와대'의 지시와 개입이 있었다는 것, 그로 인해 예술위의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운영이 어려웠다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고 밝혔다.

▲ 예술위 회의록을 공개한 도종환 더불어민주당 의원 (사진제공=도종환 의원실)

도 의원에 따르면 지난해 5월 회의에서 기금 지원심의 운영 규정에 대한 안건이 진행되던 중 한 위원의 책임심의위원 추천권에 대해 "직원이 된다, 안 된다, 1명만 넣어라"고 하는 것은 월권이라는 지적이 나오면서 논쟁이 있었다.

이때 권영빈 당시 문화예술위원장은 "우리 예술위원들이 추천해서 책임심의위원들을 선정하면 해당 기관에서 그분들에 대한 신상 파악 등을 해서 '된다, 안 된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그래서 그 과정에서 탈락되는 경우가 있다. 위원을 선정해놓고 보니 여러 가지 문제 중 지원해줄 수 없도록 판단되는 리스트가 있는데 거기에 대해 아무도 책임을 안 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직원들이 곤욕을 겪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또 하나는... 말씀을 드리기 힘든데 심의를 우리 맘대로 할 수 없게 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자율적인 심의가 원만하지 않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의 말대로라면 위원 선정을 '윗선'에서 지정하며 신상 파악으로 가부를 결정하는 것은 그들만의 '블랙리스트'가 있다는 것이 증명되는 것이다.

그해 11월 회의에서 한 위원은 "모 부장이 공문을 준 게 뭐냐면 심사위원 추천권이었다. 심사위원을 추천했는데 안 받아졌다. 결국 그분도 청와대에서 배제한다는 얘기로 해서 심사에서 빠졌다"고 말해 심사위원 선정에 청와대가 개입됐다는 것을 직접 밝혔다.

‘세월호, 문재인, 박원순’ 지지했다며 ‘찍힌’ 9,473명의 예술인

이 파문이 불거진 직후인 12일 한국일보는 '문화정책에 밝은 예술계 한 인사'를 통해 청와대가 지난해 문화예술계에서 검열해야 할 9,473명의 명단을 작성해 문화체육관광부로 내려 보냈다는 주장과 자료가 나왔다고 보도했다. 이로 인해 '블랙리스트' 설은 점점 확증으로 굳어가고 있다.

9,473명을 자세히 살펴보면 2015년 세월호 정부 시행령 폐기 촉구 선언에 참여한 문화예술인 594인, 2014년 세월호 시국선언에 참여한 문학인 754인을 비롯해 지난 2012년 대선에서 문재인 당시 대통령 후보 지지를 선언한 예술인 6,517인, 2014년 서울시장 선거에서 박원순 후보 지지를 선언한 1,608인이 포함됐다.

사실 '블랙리스트'가 있다는 소문은 이전부터 나왔다. 특히 석연찮은 지원 포기, 심사 탈락, 방송 출연 정지 등이 나오면 이 블랙리스트 설은 계속해서 퍼져나갔고 '분명 있을 것'이라는 공감대가 형성이 됐지만 확증이 없었기에 그동안 소문만 난무했었다.

지난 2009년 당시 조희문 영진위 위원장은 이창동 감독의 <시> 시나리오를 놓고 '각본이 아닌 소설 형식'이라는 이유로 영화진흥위원회 마스터 영화제작 지원사업 공모에서 '0점'을 주며 탈락시켰다.

이로 인해 문화계에서는 이창동 감독이 과거 참여정부 첫 문화부 관광을 지냈고 이른바 '노무현 인사'라는 점 때문에 그를 탈락시킨 것이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듬해 <시>가 제63회 칸 영화제에서 각본상을 수상한 것. '영진위 인사들의 보는 눈이 형편없다'는 비난을 들어도 할 말이 없었을 상황이었다.

▲ 박근형 연출가의 <모든 군인은 불쌍하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예술인을 향한 의문의 결정은 꼬리를 물었다. 지난해 박근형 연출가의 연극 <모든 군인은 불쌍하다>는 대본 공모 지원, 우수 작품 제작 지원 사업 등에 이미 선정됐음에도 불구하고 지원 사업에서 배제된 것은 물론, 예술위 직원으로부터 지원금 포기를 직접 종용받았다는 말까지 전해졌다. 이를 두고 문화계는 '박근형 연출가가 전작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을 비하한 것을 두고 정부가 꼬투리를 잡았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또 이윤택 연출가의 <꽃을 바치는 시간>은 '아르코문학창작기금' 희곡 분야 심사에서 100점을 맞아 1순위를 기록했음에도 선정 대상에서 탈락됐다. 이윤택 연출가는 지난 2012년 대선 당시 문재인 후보 지지 연설을 했고 이것이 결국 빌미가 됐다는 문화계의 주장이 제기됐었다.

결국 지난해 9월 국정감사에서 유기홍 당시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예술위가 연극 <안산순례길>을 다원예술창작지원사업 심의위원에게 요구해 선정작에서 제외시켰다"면서 "세월호와 관련돼 곤란하니 빼줬으면 좋겠다. 위에서 윤한솔(연출가)을 정치적 인물이라고 생각해 중간에서 힘들다"는 한 심의위원의 문자메시지를 공개해 블랙리스트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렸다.

특히 야당 후보 지지자까지도 모두 블랙리스트에 올려 지원 대상 저지 대상자로 만든 것은 결국 정부의 생각과 약간이라도 다르다면 불이익을 준다는 뜻을 밝혔다는 점에서 앞으로의 문화 정책에 대한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내 이름이 블랙리스트에 보인다. 세월호 성명서 썼다고...”

소식이 전해진 후 소설가 박범신은 SNS에 "블랙리스트에 내 이름이 보인다. 세월호관련성명서 때문이다. 스스로 앞장서 예인들을 적으로 돌리는 시대착오적인 자들을 일꾼으로 거느린 대통령이 불쌍타"라는 반응을 남겼고 배우 문성근은 지난 주말 배우 로버트 드 니로가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대통령 후보를 향해 "얼굴에 주먹을 날리고 싶다"고 말했다는 기사를 인용하면서 "미국에는 블랙리스트가 없다"는 말을 역시 SNS에 남겼다.

또 몇몇 예술인들은 "내 이름을 넣어줘서 고맙다", "나도 명단에 있겠지? 석차가 궁금하다"는 등 정부를 비꼬는 말로 항의의 표시를 하기도 했다.

▲ 영화 <인천상륙작전>을 관람한 박근혜 대통령 (사진제공=청와대)

이 9천여명의 이름들은 모두 공개가 되었으며 명단에는 문학, 영화, 연극, 미술 등 각 분야의 유명인들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만약 이들에게 모두 불이익이 돌아간다면 대한민국 문화계가 쑥대밭이 될 수 있다는 말이 과장으로 들리지 않는다. 

'블랙리스트 명단'을 보도한 한국일보는 사설에서 "정부 입맛에 맞지 않은 문화예술인을 따로 분류하는 것은 정치적 잣대로 편을 가르는 옹졸한 처서이자 문화예술에 대한 이해 부족이다"면서 "정부는 한편으로는 문화융성을 외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문화예술계를 적대시해 온 사실이 확인된 셈"이라고 밝혔다.

문화예술계 완전히 적으로 돌린 정부, 그들의 문화 정책이 불안하다

정부가 이처럼 문화예술계를 완전히 적으로 돌리면서 앞으로의 문화 정책에 대한 우려가 나오고 있다. 특히 박근혜 대통령을 최측근에서 보좌했던 조윤선 전 의원이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라는 점에서 더더욱 우려는 불안으로 번지고 있는 상황이다. 지난 조윤선 장관 인사청문회 당시 의원들은 조 장관의 과거 비리 의혹에 대한 질문을 했지만 정작 장관이 된 후의 문화정책에 대해서는 확실한 검증을 하지 않았다. 그저 조 장관의 형식적인 대답만 들었을 뿐이었다.

청와대와 문체부는 아직까지도 이렇다할 입장을 밝히지 않고 있다. 정연국 청와대 대변인은 12일 "문체부에서 사실이 아니라고 설명하고 있다"고만 밝혔을 뿐 명확한 입장을 말하지 않았으며 문체부는 여전히 해명 없이 침묵하고 있다. '침묵은 곧 인정'이라는 것을 모를 리가 없을텐데 문체부는 여전히 묵묵부답이다.

조윤선 장관은 13일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종합감사에서 "(블랙리스트는)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했지만 그 외에 진전된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다. 부인으로만 일관했을 뿐이다.

▲ 국립중앙박물관을 찾은 조윤선 문체부 장관 (사진제공=문화체육관광부)

문화예술인의 임무라고 할 수 있는 ‘현실 비판’에 마저 재갈을 물리는 정부는 정말로 문화를 이해하고 있는지 아니, ‘문화’가 뭔지나 알고 있는지 궁금하다. 1950년대 미국을 강타했던 ‘매카시즘’보다 더 무서운 광풍이 지금 21세기 대한민국 문화계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은 결국 정부가 말하는 ‘문화융성’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게 된다. 단언컨대 지금 정부는 ‘문화융성’을 논할 자격이 없다. 문화가 무엇인지부터 먼저 깨닫기를 바란다.

문화의 중요성을 스스로 짓밟으면서 이에 대한 해명조차 하지 않는 현 시점에서 문화계가 어떻게 힘을 발휘할 지 우려와 근심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정부의 불통은 그렇게 대한민국 문화계를, 나아가서는 대한민국 자체를 망쳐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