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의 세상을 보는 창] 전략적인 교육/(5) The value of together. 같이의 가치
[예술가의 세상을 보는 창] 전략적인 교육/(5) The value of together. 같이의 가치
  • 유승현 도예가 /심리상담사
  • 승인 2016.10.28 1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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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승현 도예가 /심리상담사

전략적인 교육
 (1) 알파고가 어디예요?
 (2) 교육, 봄날 햇살의 힘
 (3) 자전거 도둑과 친해지기
 (4) 오늘 행복할 시간 있으세요?

 (5) The value of together. 같이의 가치

많은 문화예술 행사를 시행하는 계절이다. 넘치는 현수막과 포스터를 보고 있자니 이 시기에 바쁠 H가 떠오른다. 예술계 조직의 장을 맡고 있는 H는 만날 때 마다 너무 힘들다고 하소연을 한다. 돕는 사람도 없고 협회를 끌고 가는 것이 지치고 재미가 없다는 말을 쉽게 한다. 위로 차원에서 듣고는 있으나 그가 내뱉는 말들은 매우 무책임하게 느껴진다. 그도 그럴 것이 본인이 장을 하겠다며 준비된 표밭에 선거까지 치루고 그 위치에 오른 그이기 때문이다.

H가 지친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구성원들과 함께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사료된다. 어디든 두 사람 이상의 모임이면 공동의 목표가 생긴다. 아무리 단순 모임이라도 모임의 특성을 좌우하는 구성원들의 주테마가 자연스럽게 나오기 마련이며 전문화된 조직일수록 전략적인 문제해결능력이 필요할 것이다. 같이 해결할 때 조직의 문제는 해답을 찾아간다. 결과 역시 과정을 거쳐야 좋은 답이 나오기에 문제풀이를 하는 과정은 금쪽같은 시간이 된다. 그룹의 역동성을 활발하게 거쳐야 좋은 모임이 된다. 혼자 집에서 월드컵축구를 보아라. 리모컨이 내 것이라는 안정적인 소유욕만 있을 뿐 골을 넣는 순간 미친 듯 외칠 수 있었던 환희는 금세 추억속으로 잠기고 집안 누군가라도 나타나야 마주하며 기쁨을 다시 떠들 수 있는 것 아닌가? 같이 나눌 때 기쁨이 배가 되는 것이다.

필자는 20대에 친구와 5개국 여행을 한 적이 있다. 몇 년을 알고 지낸 사이였고 큰 무리없이 친분을 유지하는 친구로 여행일정을 함께 하게 되었다. 물론 동성친구였기에 부모님의 허락을 받았고 먼 길을 떠났으나 사실 우리는 음악을 같이 전공한 것 외에는 공통점이 거의 없었다. 개성이 각자 강한 우리였고 원하는 것이 다르니 단 한번도 같은 음료를 먹은 적도 없었다. 그저 같은 비행기를 탄 것과 한 장소에서 식사를 한 것만 공동의 시공간이었다. 같은 방에서조차 서로 다른 생각을 했고 클래식과 재즈로 서로 다른 음악을 들었다. 여행지 아침시간에 풀을 밟으며 산책하기를 좋아하는 나에 비해 친구는 저녁마다 테니스나 수영같은 역동적인 운동을 꼭 하고 취침하는 친구였다. 조금만 뛰어도 숨이 가쁜 필자는 운동부족으로 인한 부작용을 우정으로 극복하려고 많은 노력을 했으며 내가 하고 싶은 50%와 친구가 원하는 것의 50%에서 1% 배려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게 된 사건이다. 당시는 내가 싫은 것은 정말 하기 싫은 연령대였기에 우리의 긴 여행은 ‘내가 다시는 너랑 여행을 가나봐라’로 끝을 냈었다. 

물론 서로의 개성을 인정하였지만 서로 손을 잡기에는 ‘내가 왜? 왜 나만?’ 이라는 이기적인 인지능력을 가속시킬 뿐이었다. 신기하게도 지금은 그렇게 힘들어했던 역동적인 운동을 내가 하고 있고 사람 많은 곳도 참을 만하다. 사회에 적극적으로 적응하면서 현재는 누구랑 같이 하느냐 만큼 무엇을 왜 하는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늘어난 것 빼고는 어릴 적에 비해 누구든 같이 할 만 하다. 더 나아가서는 같이함으로 펼쳐지는 긍정적인 효과를 기대하며 조직에서의 우리 목표를 최대한 극대화 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곤 한다. 

사회적인 성장이 오면 올수록 개개인의 다름을 인정하는 만큼 같이 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함께 하는 것의 가치를 높게 책정하는 조직일수록 공동의 문제를 끊임없이 연구하면서 우리가 좋아야 나도 좋고 우리가 편해야 나도 편하고 우리가 행복해야 나도 행복하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습득하게 된다. 같은 선상에 있지만 조금 더 노력하는 누군가는 부족한 누군가를 끌어줄 수 있고 또 힘이 있는 이는 약한 이를 밀어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아 가며 사회적으로 완성된 성인이 되는 것 같다.

중학교 사회교사로 있는 친구가 학생들이 그룹발표를 하는데 아무리 수준높은 과제물이라 해도 리더 혼자 발표하는 그룹은 점수를 최저로 배점한다는 이야기를 하길래 의미있는 채점 방식이라 생각하며 귀담아 들었다. 개인만 생각하는 범위는 엄마 태중에 있을 때 뿐이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우리는 누군가와 마주하기를 시작하고 배고픈 것을 기억하고 요구하는 발달시기를 지나면서부터 선택이라는 낯뜨거운 과제를 접하게 된다. 인간관계도 선택이며 일처리도 선택이며 교우관계도 선택이지만 그에 따른 부작용도 발생하게 된다.

희노애락이 깃든 ‘삶의 과제물 발표하기’ 역시 창의로운 선택은 각자의 몫이지만 많은 이들과 함께 가는 것에 큰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이라면 문제의 답이 1개가 아닌 100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할 것이다. 친구와 조금만 더 함께 하려는 노력을 했다면 장르가 다른 친구의 음악을 심층적으로 감상할 수도 있었지 않은가? 또한 긴시간 여행지에서 아침 저녁 서로 다른 운동으로 제법 튼튼한 체력이 되었으리라. 아직도 누구와 함께 하는 것이 불편한 그 친구는 NO처녀로 살아가고 있으며 혼자 사는 것은 더 불편해 지는 부작용을 겪고 있다.

사실 같이의 가치. 잘 안들 쉽사리 실행할 수 있는 성질이 아니다. 시간이 흐르고 많은 경험을 통해 이쯤에서 같이, 이쯤에서 각자가 본능적으로 나오는 것이다. 누구든 의견에 대한 불일치가 있을 때 마음속으로 친밀한 관계를 포기함으로 침묵으로 일관하는 모습도 미완성된 사회인이며 조직의 무게를 혼자 짊어지고 징징거리는 모습도 성숙한 사회인의 모습은 아니다. 초기에는 늦은 듯 보이지만 구성원들간의 하모니를 통해 탄력이 붙는다면 못할 과제가 없다.

이 가을, 즐거움을 함께 나누는 문화예술이 많기를 바란다. 잘한다고 혼자 발표하는 학생보다는 공동의 목표 0순위 ‘함께’ ‘같이’ ‘더불어’를 실천하는 청소년들이 점점 더 많아지기를 소망한다. 서로 같이하는 것이 어려울 때 바로 즉시 1%의 배려만이 필요한 것인데 99%의 잦대를 세우느라 아까운 시간 다 버리고 이기심만 총동원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며 조심히 글을 마친다. 

The value of togeth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