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국의 국악담론] 기녀(妓女), 그들은 누구인가?
[김승국의 국악담론] 기녀(妓女), 그들은 누구인가?
  • 김승국 전통연희페스티벌예술감독/수원문화재단 대표
  • 승인 2016.10.28 13: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김승국 전통연희페스티벌예술감독/수원문화재단 대표

기녀(妓女) 혹은 기생(妓生)이 주는 일반적 인식은 남정네들의 술자리에 자신들의 예능을 활용하여 흥을 돋구어주고, 때로는 몸을 파는 것을 직업으로 하는 여인일 것이다. 이런 일반적 인식이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은 일제 강점기 부터지만, 확고하게 자리 잡게 된 것은 70년대 초부터 80년대까지일 것이다.  당시에 많은 일본 남성들이 매춘을 위하여 한국으로 대거 기생관광을 온 것이 사회문제가 되었던 것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래서 기녀 혹은 기생이라고 하면 한마디로 천박한 직업으로 국민들의 뇌리에 각인되어 있다.

그에 반하여 교과서와 소설, 그리고 드라마와 영화 속에서 접했던 기녀 황진이는 사회계급으로는 비록 천민이지만 예능과 시문(詩文)과 서화(書畫)에 능했을 뿐만 아니라, 학식과 권세를 겸비한 조선의 사대부들을 희롱하였던 지적이며 낭만적인 여인이었기에, 기녀 황진이를 매춘을 일삼았던 천박한 여인으로 여기지는 않는다. 그래서 기녀는 지식인이자 예능에 뛰어난 여성이었다. 그렇다면 어떤 쪽이 정확한 사실일까? 

기녀는 삼국시대의 유녀(遊女)에서 비롯되었으며 조선왕조는 개국과 함께 중앙집권체제를 마련하면서 중앙과 지방의 관아(官衙)에 기녀를 배치하였다. 기녀는 관청의 행사와 관리의 노고를 위로하기 위해 필요한 존재였으므로 조선시대의 기녀는 관기(官妓)가 대부분이었다. 

기녀들은 보통 15세가 되어 기적에 오른 뒤 장악원에 소속되어 본격적으로 체계적인 교육을 받았고, 악기 하나는 전문적으로 배우게 하였다. 이들이 장차 상대하는 부류가 왕족과 고관이나 한학적(漢學的) 교양이 높은 유생(儒生)들이 대부분이었으므로 이들의 교육과목은 글씨, 그림, 춤, 노래, 악기연주, 시, 책읽기, 대화법, 식사예절 등 타인을 대하거나 즐겁게 할 때 필요한 것이었으며 예의범절은 물론 문장에도 능해야 했다.

조선시대에 사대부 여성들 중에는 허난설헌이나 이옥봉과 같이 시문(詩文)에 능한 여인들이 있었다는 것은 우리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지체 높은 사대부 가문의 여성들 이외에도 기녀들 중에서도 황진이와 같이 시문(詩文), 서화(書畵)에 능한 여인들이 많았다.

조선조 송도(개성) 기생 ‘황진이’, 경주기생 ‘홍도(紅桃)’, 부안기생 ‘매창(梅窓)’, 성천 기생 ‘일지홍(一枝紅)’ 등은 미모는 물론 시문에 능했던 기녀로서 명성을 떨치었다. 기녀들은 시문, 서화뿐만 아니라 예능에도 능했기 때문에 오늘날의 관점으로 볼 때 기녀 집단은 지식인이자 조선시대의 예술을 주도하고 전승해온 예술가 집단이었다고 할 수 있다.

기녀는 교육을 마친 후에 이들은 용모와 재주에 따라 1패(牌), 2패, 3패의 3등급으로 나누었다. 1패 기녀는 왕과 고관이 도열한 어전(御前)에 나가 춤과 노래를 부르는 최상급 기녀이며, 2패는 각 관아와 고관 집에 출입하는 기녀이고, 3패는 일반인과 상대하는 제일 하급 기녀로서 화초기생이라고도 불리었다. 

미모가 뛰어나고 시문에만 능한 기녀로서 머무른 것만은 아니었다. 나라가 위험에 처했을 때 나라를 구하기 위하여 분연(憤然)히 나서는 기녀들도 적지 않았다. 임진왜란 중 진주성이 일본군에게 함락될 때 왜장을 유인하여 왜장을 끌어안고 남강에 투신하여 산화(散華)한 진주기생 ‘논개’에 대해서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고, 그밖에 명량대첩의 일등공신인 기녀 ‘어란’, 평양성에서 왜장의 목을 베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던 기녀 ‘계월향’, 조선조 말 을사오적(乙巳五賊)의 첩이되기를 거절하고 죽음을 택한 진주기생 '산홍(山紅)', 일제강점기 3.1 독립만세투쟁을 이끈 수원 기녀 ‘김향화(金香花)’ 등 그 사례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조선이 일제에 의해 망하면서 기생제도 또한 없어질 수밖에 없게 되어, 일제강점기에 기생들의 교육기관이자 기생이 요정에 나가는 것을 감독하고 화대를 받아주는 기생조합인 권번(券番)에서 그 명맥을 유지하였는데, 일부 기녀들의 매춘 행위가 있었기 때문에 기녀들을 모두가 천박하고 비윤리적인 집단인 것처럼 여겨지게 되었으며 그들에 의하여 연행(演行)되었던 우리의 민속 공연예술 자체도 천박한 것으로 매도되었던 것이다.

일제 강점기는 면면한 우리 문화의 맥을 단절 혹은 왜곡, 비하시킨 불행한 시대였으며,  7,80년대 일본인들의 기생관광의 후유증은 첨단 정보화시대인 오늘 날까지도 우리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악취를 풍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