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usic Coulmn] 베버의 어린시절
[Music Coulmn] 베버의 어린시절
  • 정현구 국제문화개발연구원 부원장/ 코리아 네오 심포
  • 승인 2016.10.28 1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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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현구 국제문화개발연구원 부원장/ 코리아 네오 심포니 오케스트라 예술감독

독일의 로맨틱 오페라의 창시자이며 모차르트의 부인 콘스탄쩨와는 사촌간인 베버(Carl Maria von Weber)는 1786년 11월 18일에 독일의 올덴부르크에서 태어났는데, 베토벤이 고향인  본에서 소년 음악가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한 무렵이었고, 모차르트가 아직 살아 있어서 빈에서 화려하게 활약을 하고 있던 때이다.

베버의 집안은 가명에 폰이 붙어 있는 것으로도 분명하듯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페르디난트 2세로부터 남작의 칭호를 받은 오스트리아의 지주인 요한 밥티스트 폰 베버를 선조로 하는 귀족집안으로, 그의 아버지인 작곡가 프란츠 안톤(1734~1812)도 남작의 작위를 가지고 있었다. 

베버의 아버지는 모차르트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자신의 아들도 신동으로 만들고자 일찍부터 음악을 가르쳤다. 그러나 베버는 태어날 때부터 체질이 약하였고, 아기일 때 좌골을 앓았기 때문에 4살이 되기까지 걷지를 못했을 뿐만 아니라, 겨우 혼자 일어설 수 있게 되어서도 절룩거려서 일생 동안 만족하게 걷지를 못했다. 음악도 그다지 잘 하지 못하여 그의 형인 음악가 프리츠는 "동생인 카를은 무엇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음악가는 되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말도 제대로 못하는 아기 때부터 음악의 가르침을 받아 온 베버이지만, 태어난 이듬해에 그의 아버지가 극단을 조직하여 각 지방을 순회하였기 때문에 안정되게 학습에 마음을 쏟기가 불가능하였다. 그러던 베버가 처음으로 그의 재능을 뚜렷하게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비록 단기간이었기는 하나 9세 때 힐트부르크하우젠에서 유능한 오르가니스트이며 오보에 주자인 요한 페터 포이시켈에게 체계적인 음악교육을 받은 후이다.

이 때 그는 코랄 <하늘에서 내려오셔서>에 의한 오르간곡을 작곡하였다. 그리고 잘츠부르크에서 하이든의 동생인 미하엘 하이든에게 작곡을 배워 12세 때 대위법적 기교를 담은 6개의 푸게타를 발표한다. 그 후 뮌헨에서는 요한 네포무크 칼혀와 발리스하우저, 바이올린으로 유명한 게오르크 요제프 포글러를 사사하여, 13세 때에는 첫 오페라인  <사랑과 술의 힘>을 작곡했다. 

베버는 호기심이 많아 보는 것이나 듣는 것 모두에 흥미를 갖고 그것들의 정수를 충분히 흡수했던 것은 모차르트와 비슷했다. 피아니스트로서 각 지방을 돌아다니면서 끊임없이 그 지방의 극장에서 무대에 올려지는 작품들을 보면서 극음악이 어떻게 하면 성공하는가에 대한 요령을 자연스럽게 터득하였다.

18세 때 스승 포글러의 추천으로 브레슬라우스라는 대학 도시의 가극장에 악장이 되었으나, 그의 이상주의와 투기적인 아버지의 속셈 등으로 자기 편보다 더 많은 수의 적을 주위에 만들었다. 1806년 그의 나이 20세 되던 해에 그는 또 다른 불행을 당하게 된다. 인쇄용 동판에 사용하는 초산을 포도주로 잘 못 알고 마셔서 2개월이나 고생을 한 끝에 결국 타고난 아름다운 목소리를 잃게 되었고, 이로 인해 말하기조차 불편을 느끼는 일생을 보내게 된다. 이 재난이 그를 싫어하는 적에게 이용되어 2년 만에 브레슬라우를 떠나게 된다.

그 후 그는 1807년 시투트가르트의 루드비히 공의 비서 겸 작곡가가 되었다. 그러나 이 취직은 장래의 불행을 초래하는 한 원인이 되었으며, 그 대 그가 받은 보수는 겨우 연봉 90파운드에 불과했다. 이 액수는 당시 인기가 없어 자력으로는 사교계에 나설 수 없는 배우들이 받는 급여보다도 못 미치는 것이었다.

이렇듯 20대 초까지 불행의 연속적인 삶을 살던 베버가 낭만파 오페라의 선구를 이룬 것은 고난의 삶 속에서도 새로운 것을 계속 학습하고 흡수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이를 바탕으로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구축한 것과 프라하 극장의 지휘자로서 생활의 안정이 바탕이 되었다. 
베버는 “최후까지 인내하라.”는 말을 모토로 삼았는데, 그는 진정 예술에 모든 정신과 육체를 다 바친 음악가이다.

“만약 내 악상에 변화가 없다고 한다면, 자신에게 천재가 결핍되어 있다는 것과 같다. 그렇다고 한다면 자신의 생명, 작업, 사랑을 신이 참다운 천직으로 주시지 않았던 예술을 위해 내던져 버리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일까? 이 의문은 나를 가장 불행하게 한다. 왜냐하면 나는 몇 백 명이 되는 작곡가 사이에 끼고 싶다고 결코 생각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내 자신이 높은 위치에 도달할 수 없다면, 피아노라도 가르쳐서 그 날의 빵을 구하는 편이 나으리라. 하지만 나는 나의 모토가 되는 ‘최후까지 인내하라’를 주장한다. 그것에 도달할 수 있는지 어떨지는 시간이 명백히 그것을 제시해 줄 것이다.” – 베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