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리뷰] 아우슈비츠와 광주, 그리고 90년대를 통해 전하는 예술인의 고뇌 '슬픔의 노래'
[공연리뷰] 아우슈비츠와 광주, 그리고 90년대를 통해 전하는 예술인의 고뇌 '슬픔의 노래'
  • 임동현 기자
  • 승인 2016.11.02 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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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연 20년만에 다시 선보여, 어둠 속의 슬픔이 극적으로 다가온다

20년만에 연극 <슬픔의 노래>가 돌아왔다. 지난 1995년 초연 이후 호평을 받았던 연극이 다시 우리 곁으로 돌아왔다. 초연 당시 패기있는 젊은 배우였던 박지일과 남명렬은 이제 노련한 중견 배우가 되어 무대에 섰고 그 뒤를 이어 새로운 젊은 배우들이 이들이 맡은 캐릭터를 연기한다. 그리고 그들은 폴란드와 한국, 아우슈비츠와 광주로 대표되는 묵직한 메시지를 관객들에게 던진다.

정찬의 원작 소설이기도 한 <슬픔의 노래>는 폴란드 작곡가 헨릭 고레츠키의 교향곡 3번이다. 참혹한 불행을 당한 이들의 '슬픔'을 표현한 이 곡은 2차대전 당시 아우슈비츠에서 희생된 이들을 위한 일종의 '진혼곡'으로 아픔을 느끼게 하는 선율과 18세 소녀가 죽기 직전 벽에 남긴 짧은 기도문을 가사로 한 소프라노의 노래, 전쟁에서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아픔을 담은 폴란드 남부 민요가 더해지면서 슬픔을 넘어선 고통과 구원을 우리에게 던진다. 이 곡을 바탕으로 소설과 연극이 만들어졌고 연극은 바로 이 곡을 배경으로 슬픈 이야기를 펼친다.

▲ 레전드팀의 남명렬, 박지일, 손성호 (사진제공=림에이엠시)

인터뷰를 안 하기로 유명한 고레츠키를 인터뷰하기 위해 소설가이자 기자인 유성균(남명렬, 이명호 분)은 폴란드를 찾는다. 폴란드에서 사진작가로 활동하는 친구 민영수(손성호, 이찬영)의 집에서 그는 통역을 맡기로 한 연극배우 박운형(박지일, 김병철 분)을 만나게 되고 그에게서 묘한 느낌을 갖게 된다.

아우슈비츠를 찾고 고레츠키와 '슬픔의 노래'를 대상으로 인터뷰를 하게 되는 그 과정 속에서 유성균은 박운형의 내면의 갈등이 폭발하는 모습을 보게 되고 민영수와 박운형이 결국 역사의 아픔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유성균과 박운형의 긴 인터뷰가 이어진다.

폴란드가 배경인 만큼 이 작품은 폴란드 문화의 상징들이 극의 소재로 사용된다. 헨릭 고레츠키, 아우슈비츠와 더불어 '가난한 연극'을 내세운 그로토프스키, <베로니카의 이중생활>, <세가지색 시리즈> 등을 만든 영화 감독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 등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특히 '배우와 관객, 무대만 있어도 연극은 존재한다'는 그로토프스키의 '가난한 연극'론은 이 연극에서 아주 유용하게 사용된다. 인물들의 대사에 집중하다보면 극의 재미를 한껏 느낄 수 있다.

2차대전의 아우슈비츠의 기억은 80년대 우리나라 광주의 기억을 소환시킨다. 그리고 광주의 기억은 박운형을 끝없이 괴롭힌다. 그 상황에서 '슬픔의 노래'가 계속 들려진다. '슬픔의 노래'가 들려지면서 무대가 어두워질 때, 기자는 '암전도 연극의 한 장치'라는 것을 깨닫게 됐다.

어둠 속에서 들려지는 '슬픔의 노래'는 지금 현재의 우리의 감정을 바로 건드린다. 그 어둠 속에서 느껴지는 슬픔이 극을 더 빛낸다. 약간 긴 암전이 단순히 무대 교체를 위한 것이 아니라 극적 장치라는 생각을 갖게 만든다.

초연 멤버였던 박지일과 남명렬의 연기는 다소 식상한 표현이지만 '명불허전'이라는 말 외에는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다. 특히 박운형의 절규를 표현하는 박지일의 연기는 소름을 돋게 만드는데 마치 모든 혼을 다 바치는 듯한 박지일의 절규와 무대까지 들리는 숨차는 소리는 박운형이라는 인물의 숨겨진 슬픔을 더 적나라하게 표현한다.

또한 남명렬과 손성호가 서로 대사를 주고받는 모습은 너무나 자연스러워 잠시라도 시선을 흐트리는 틈을 주지 않는다. '가난한 연극'이 이처럼 재미있는 연극이라는 것을 이 연극을 통해 깨닫게 된다.

▲ 뉴웨이브팀의 이명호, 이찬영, 김병철 (사진제공=림에이엠시)

<슬픔의 노래>는 90년대 아우슈비츠와 광주를 화두로 삼았지만 20년이 지난 지금은 '90년대'라는 화두를 추가한다. 90년대를 생각해보면 서울올림픽과 동구권 해체를 시발로 다양한 문화들이 유입되던 시기였다.

키에슬로프스키의 영화들이 우리나라 상영관을 찾아왔고 다양한 예술 담론들이 연구되던 시기이기도 했다. 예술이 점점 자본화되어가는 상황에서 인물들, 아니 극중 예술인들이 말하는 폴란드 작가들의 이름과 이론들이 묘한 반가움을 선사한다. 그렇게 과거의 아픈 상처와 예술을 논했던 90년대에 대한 기억을 2016년 <슬픔의 노래>가 들춰낸다. 

그리고 극은 묻는다. '이 혼탁한 세상에서 예술인들은 어떻게 고통을 달래고 극복해야하는가? 그리고 슬픔의 강을 어떻게 건너야하는가?' 레전드팀이 선보이는 원숙함과 뉴웨이브팀이 보여주는 패기가 이 화두와 어울리면서 한 편의 아름다운 연극이 완성되었다.

이 연극이 전하는 '슬픔'에 동참하는 순간, 관객의 마음의 키가 한 뼘은 자랄 것이라는 생각을 감히 해본다. 고뇌를 풀어내는 예술인들의 모습이 이처럼 아름다울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슬픔의 노래>는 오는 20일까지 대학로 아트원씨어터 3관에서 공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