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석희-캔버스와 대화하는 화가, 세상과 자신과의 대화를 제안하다
정석희-캔버스와 대화하는 화가, 세상과 자신과의 대화를 제안하다
  • 임동현 기자
  • 승인 2016.11.08 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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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석희 개인전 '시간의 깊이', 세상을 바라보는 그의 '서정'에 매료된다

'서정'이라는 말을 찾아보니 '주로 예술 작품에서, 자기가 느끼거나 겪은 감정이나 정서를 나타냄. 또는 그 감정'이라고 뜻을 달아놨다.

그런데 '주로 예술 작품에서'라는 말이 참 거슬린다. '무엇인가를 통해 자신이 느끼는 감정' 이렇게 간단하게 정리할 수 있는 게 '서정' 아닐까? 자신의 감정에 따라 자유롭게 표현하는 이들. 사실 예술인들은 서정이 없으면 작품을 내놓을 수 없다. 서정이야말로 예술의 시작이라 할 만하다.

▲ 작품을 소개하는 정석희 작가

'서정'이라고 하면 선입견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세상사와 분리된, 그저 '자연을 노래하고 사랑을 노래하고 감정을 노래하는 것이 전부'인 것으로 서정을 해석한다.

이 때문에 한때 우리나라의 서정 예술인들은 비난의 대상이 됐다. '현실은 힘들고 비참한데 구름만 타고 있다', '시대의 아픔을 외면한다'는 것이 그들을 향한 주된 비난이었고 이에 대해 '구호를 외치는 것이 예술인가', '예술은 결국 자신만의 세계 속에서 탐구하는 것' 등의 반격을 가하는 이들도 있었다.

분명한 것은 서정은 결코 세상사와 외면될 수 없다는 것이다. 윤동주의 시는 물론 아름답다. 그러나 윤동주가 어떻게 학업을 이어갔고 조선말을 쓰는 것조차 법으로 금지했던 암울한 시대를 살았다고 생각한다면 그의 시가 결코 단순한 감정을 노래한 시가 아니라는 생각을 가지게 될 것이다. 윤동주가 지금도 사랑받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 The Gate, 2004, 1 채널 비디오, 3분, 가변크기

서론이 참 길었다. 정석희 개인전 <시간의 깊이>를 보고 난 느낌을 정리하려다보니 소개글이 길어졌다. 그는 작업을 '캔버스와 자신의 대화'라고 표현한다. 작업을 하면서 그는 '여기서 끝내야하나?'라는 아쉬움을 가지게 됐고, 결국 자신의 작업 과정을 표현하는 이른바 '영상 회화'를 선보이게 된다.

마치 여러 그림을 빠르게 보여주면 그 그림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착시 현상을 이용한 애니메이션의 느낌이 그의 작품에 있다.

그의 집 실내부터 자연의 풍경으로 이동하는 과정을 그린 애니메이션 드로잉과 자신이 직접 종이에 '예수의 고난과 부활'이 담긴 성경 구절을 필사하는 장면을 함께 보여주는 <The Gate>, 소파가 놓여진 방, 창 밖에서는 계절이 변하고 그에 따라 방의 느낌이 바뀌고 '겨울이 길었다', '아이가 태어났다', '아내가 암에 걸린 것을 알았다' 등의 자막이 깔리는 <소파> 등을 보면 앞에 언급한 그의 말이 확실하게 전달된다.

▲ 소파, 2002, 영상 드로잉, 18개의 드로잉 이미지, 4분 18초, 부분 스틸 이미지

그는 마치 일기를 적는 것처럼 캔버스에 자신의 일상을 표현했다. 그렇기에 그림을 그저 한 장만 그리고 멈추기가 싫었던 건지도 모른다. 나의 생활인데, 이 생활을 한 장의 그림으로만 끝낸다는 것이 얼마나 허무한 일인가. 그는 그렇게 말하는 듯했다.

그의 이 서정은 점점 슬픔으로 변해간다. 캔버스와의 대화가 이어지는 동안 제주 강정마을의 구럼비는 해군기지 건설을 이유로 넘어가고 세월호에 탔던 304명이 희생됐다. 정석희 작가는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 소식을 듣는 순간 '멘붕'이 왔다고 밝혔다. 그 이후 한동안 그림이 이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만큼 충격이 컸던 것이다.

▲ <끝나지 않은 이야기>

<에피소드>를 통해 정석희는 세월호 소식을 들은 후의 충격과 공백, 그리고 다시 시작하려는 모습을 같이 보여준다. 그림이 그려지는 상황에서 갑자기 낙서만 된 종이들이 몇 장 보인다. 그림을 그리지 못한 것이다. 그 이후의 그림은 바다에서 학생의 모습이 떠오르기 시작하고 바다에 사람의 눈동자가 그려진다. 지켜보는 눈. 그가 다시 그림을 그리는 이유다.

<끝나지 않은 이야기>는 철원 노동당사를 그린 드로잉으로 시작한다. 노동당사에 어느덧 책상이 놓여지고 그 책상은 다시 하얀 새로 변해 날아간다.

그는 이 의미에 대해 '결국 모든 문제의 근원은 분단'이라는 메시지를 알리고 싶어서였다고 말했다. 하얀 새가 된 그들은 이제 비극의 주인공이 아닌 평화의 상징이 됐다. 그의 그림이 '치유와 소통'을 목적으로 한 것임을 단번에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구럼비의 무너짐을 그린 <구럼비>는 또 어떤가? 평화로운 곳에 갑자기 어둠의 세력이 몰려오면서 구럼비는 사라진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그림은 아름다움을 잃지 않는다. 충격적인 상황과 아름다운 그림이 합쳐지니 슬픔이 된다. 

▲ 구럼비, 2014, 영상 회화, 152개의 회화 이미지, 2분 10초, 가변크기

정석희의 영상 회화를 보면서 우리는 '서정'이란 무엇인지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아마 이 글만 읽으면 그가 현실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작가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런 이분법인 단정을 싫어한다. 그는 그저 '신진 화가'로 불리고 싶어하는 작가였다. 누구나 세상을 보고 느낄 수 있는 생각을 그는 작품으로 나타낸 것이다.

그러면서 정석희는 작품을 선보이는 것 자체가 소통이고 치유라고 말한다. 비록 작가가 A라는 의도를 가지고 그렸어도 보는 이들은 작품을 B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것은 토론의 대상이 아니라 대화의 대상이고 그 대화는 서로를 소통하게 만들고 그러면서 치유가 된다. 정석희의 작품들은 그렇게 우리에게 말을 걸고 있다. 자신과 같이 대화를 하자고 제안하고 자신처럼 종이에 글을 써보자고 제안한다. 

▲ 늪, 2016, 영상 회화, 78개의 회화 이미지, 8분 18초, 가변크기

<The Gate>가 전시된 곳 앞에는 실제로 나무 책상과 의자, 그리고 종이와 연필이 놓여있다. 앉아서 마음껏 종이에 연필로 적어보란다. "'나 왔다간다'라고 써도 되요?"라는 우문을 던지자 흔쾌히 "그럼요, 그래도 돼요"라는 현답을 한다.

같이 쓴다는 것 자체가 대화다. 그러면서 치유한다. 이번 정석희의 개인전이 예사롭지 않은 이유다. 순실, 아니 '상실의 시대'를 맞은 지금 이 순간에 말이다.

정석희展 <시간의 깊이>. 12월 23일까지 OCI미술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