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수의 무용평론] ‘수치심에 대한 기억들’-상실의 시대에 보내진 김용걸의 엘레지
[이근수의 무용평론] ‘수치심에 대한 기억들’-상실의 시대에 보내진 김용걸의 엘레지
  • 이근수 무용평론가/경희대 명예교수
  • 승인 2016.11.20 2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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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수 무용평론가/경희대 명예교수

수치심을 잃어가는 시대다. 신분의 상하, 노소, 직분을 가리지 않고 거짓말이 일상화된 나라에는 욕심과 이기심이 창궐할 뿐 명분도 수치심도 자취를 감추고 있다.

이 시대에 ‘서울국제공연예술제(SPAF, 9.30~10,30, 아르코 및 대학로 예술극장)’에 출연한 김용걸의 작품 ‘수치심에 대한 기억들’은 제목이 먼저 시선을 끈다.

검정색 교복을 입은 여학생들이 전면에 등장하고 먼 곳에선 피아노(김경희)가 라이브음악을 연주한다. 학창시절의 회상(Reflection)은 순수하다. 교회와 성당과 절간에서 종교적인 믿음(Trust)도 존재하던 세상이다. 십자가가 보이고 묵주를 들고 있는 신부의 단정한 모습이 영상으로 비쳐진다.

검은 안경을 쓴 남여의 3인무가 펼쳐진다. 삶(Life)이란 슬픔과 기쁨이 병존하는 시공간이다. 삶의 애환을 표현하기엔 이주희의 오르간 연주에 맞춘 테너 이희상의 성악곡이 적격일 것이다. 누구나 바램(Love)이 있다. 하고 싶은 것과 좋아하는 일들이 마음속에 그득하지만 제약과 금지도 함께 있다. 부모의 욕심, 시험과 경쟁, 시간의 제한...사육되는 동물처럼 견뎌내기 어려운 간섭이 학대로 느껴질 때 갈등과 충돌에서 벗어날 수 있는 젊음의 탈출구는 죽음뿐인가.

누가 이들을 죽음으로 몰아가는가. 고층아파트에서, 한강다리 난간 위에서 언어와 따돌림의 폭력을 견디지 못하는 중학생, 고등학생 어린 죽음의 시도는 되풀이 된다. 그들에게 친구(Friend)란 다만 경쟁자며 가해자며 넘어설 수 없는 적일 수밖에  없는 것인가. 어둠 속을 헤매는 청춘들에게 여인(Woman)은 유일한 빛이다. 그녀들은 그리운 시며 풋풋한 감성이다.

시간이 흘러가며 소녀의 얼굴엔 주름살이 늘어가고 가슴엔 상처가 파이고 머릿속엔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다. 어린 생명들을 속절없이 수장시킨 최근 4월의 기억은 지금도 또렷하다(In the Dark). 다리가 무너지고 체육관 지붕이 내려앉고 어린 아이들만이 남아 있던 컨테이너에 불이 붙었다. 몇 사람 남지 않은 위안부 할머니들은 아직도 진정한 사과에 목말라한다.

(Neutrality). 애꿎은 죽음과 상처들은 아물 새 없이 깊이깊이 맺히며 반성은커녕 덮어만 가려는 부끄럼 모르는 세상은 절망적이다. 그 영혼들을 위한 진혼곡인가, 무대 위에 굿판이 벌어진다. 짐승 탈을 쓰고 온통 검정색으로 감싼 군무진가운데 빨강색 여인(이다운)의 솔로가 혼자 남았다.

75분 공연의 피날레다. 수치심으로 점철되는 이 시대에 대한 치유가 시작되기 위해선 아팠던 순간들이 잊히지 않고 기억되어야한다는 안무가의 절규가 들려오는 듯하다.

올해로 16회를 맞는 서울국제공연예술제(SPAF)엔 해외초청작 2편, 국내초청작 6편을 포함해 모두 8편의 무용작품이 공연되었다. 김용걸의 ‘수치심에 대한 기억들(Memories of Shame)’은 국내 작품 중 유일하게 75분 길이의 대극장 공연용이다. 2014년 SPAF에서 본 김용걸의 ‘Inside of Life’는 세월호사건의 비극을 춤 예술로 승화시킨 수작이었다.

삶과 죽음에 대한 성찰이 피상적이지 않고 안무가의 진지한 고민이 정교한 드라마터지(dramaturgy)를 통해 객석에 전달된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작가의 진정성에 관객은 혼연히 공명하고 환호를 보낸다. ‘비애모’(2012)에서 보여준 예술성과 대중성의 조화, ‘빛, 어둠 그리고...’(2014)에서 발견한 스토리텔링의 능력을 김용걸은 ‘Inside of Life’를 통해서 종합하며 그가 뛰어난 안무가며 연출가인 동시에 무용수들의 섬세한 조련사임을 확인시켜주었다.

‘수치심에 대한 기억들’ 역시 이러한 연장선에 있다. 인명경시 풍조, 부모와 자식 간 소통의 단절, 해결되지 못한 일제의 잔재, 세월호의 비극과 극한적인 정파 대립으로 표출되는 권력 갈등...염치도 없이 목전의 이권만을 찾아 이합집산이 되풀이되는 현실상황에서 수치심이란 과거의 유물이 되어버렸다.

김용걸은 이러한 현상을 ‘Reflection’에서부터 ‘Exorcism(굿)’까지 9개의 에피소드로 예리하게 풀어낸다. 김다운, 최원준 등 컨템퍼러리발레 테크닉으로 무장한 핵심단원 들이 솔로와 듀엣, 군무를 통해서 어두운 기억들을 공유화한다.

현실과 유리된 관념적 주제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천편일률적인 작품을 연산하고 있는 현대무용의 최근 풍조에서 현실을 직시하되 직설적이 아닌 상징적 어법으로 이를 풀어낼 수 있는 안무가는 차별화된다. ‘수치심에 대한 기억들’은 상실의 시대, 우리에게 보내진 김용걸의 엘레지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