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의 적’들에 농락당한 문화계, 문화예술인들은 괴롭다
‘문화의 적’들에 농락당한 문화계, 문화예술인들은 괴롭다
  • 임동현 기자
  • 승인 2016.11.21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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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리스트 파문’과 잇단 ‘게이트’로 폐허가 된 문화계, 문화인들은 단결하고 있다

지난 4일 문화예술인들의 시국선언이 있었던 광화문광장에는 '문화8적'의 이름이 적힌 깃발이 휘날리고 있었다. 그 깃발에는 박근혜 대통령, 최순실씨를 비롯해 차은택 광고감독, 김종덕 전 문화체육부장관, 박명진 문화예술위원장, 김종 전 문화체육부차관, 송성각 전 한국콘텐츠진흥원장, 김상률 전 청와대교육문화수석의 이름이 올라있었다.

참 열거하기가 힘들다. '차은택'이라는 이름으로 대표되는 문화계의 전횡과 이로 인한 문제들을 일일이 들기에는 너무나 양이 많다. 지난 2012년 박근혜 대통령의 대선 승리 이후 내걸었던 '문화융성'은 결국 '제 식구 배불리기'와 '정부의 비위 맞추기 문화 양성'이라는 결과로 이어졌고 정부에 반대하는 이들을 '블랙리스트'에 몰아넣고 지원을 끊고 숨통을 조이며 문화인들을 옥죘다. 그리고 그 결과는 대대적인 문화인들의 '시국선언'으로 이어졌다.

▲ 지난 4일 문화예술인 시국선언에서 휘날린 '문화8적' 깃발

역대 최대라는 7천449명의 문화예술인이 참여한 시국선언을 비롯하여 무용계, 연극계, 체육계 등 각계각층의 시국선언이 이어졌다. 심지어는 보수 성향을 지닌 예술단체조차도 박 대통령의 퇴진과 관계자들의 처벌을 요구하는 시국선언이 나왔고 그간 어수선한 시국에도 침묵을 지키고 있다는 비판을 받았던 국악계도 시국선언에 동참하는 모습을 보였다.

지난 9일 서울 시민청에서 열린 '블랙리스트의 시대, 예술가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토론회에 참석했던 신현식 앙상블 시나위 대표는 "국악계는 그동안 사제지간 등 거미줄 관계로 엮어 있는 부분이 있어 문제가 있어도 목소리를 못냈는데 이번에 시국선언에 동참했다"고 밝혔다.

지난해 국립국악원 검열 사건의 당사자이기도 한 신 대표는 불과 공연 2주를 남겨두고 공연 연출을 맡은 박근형 연출가를 갖은 이유를 들어 내쫓은 것을 두고 '블랙리스트가 있거나 윗선의 지시가 있었다'는 것을 간파할 수 있었다고 했고 이 사건 이후 많은 예술인들이 국립국악원 공연을 거부한 이야기를 들려준 바 있다.

이러는 사이 차은택 감독과 송성각 전 원장이 구속됐으며 김종 전 차관은 구속영장이 신청된 상태다. 김종덕 전 장관은 차은택 감독의 스승이며 김상률 전 수석은 차 감독의 외삼촌이다. 박 대통령과 최순실씨를 위시해 이들이 '어허라 둥기둥기'식으로 자신들 맘대로 문화계를 죄자우지했다는 점에서 문화인은 물론 국민의 분노도 크다고 볼 수 있다.

그동안 본지는 각종 기사를 통해 박근혜 정부의 문화 정책에 대해 우려와 비판의 목소리를 내왔다. 조윤선 장관 임명 당시에는 문화부에 '자기 사람'을 꽂아 문화계를 정부가 좌지우지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표현했고 '문화계 블랙리스트'가 공개될 시점에는 '정부가 문화예술계를 완전히 적으로 돌렸다'면서 '문화융성을 논할 자격이 없다'는 강한(?) 발언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래서는 안 된다'라는 기사를 쓰는 순간 이미 우려했던 일들은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었다. 지난 정부 4년 내내 말이다. 

문화계는 이 상황을 '엄청난 위기'로 보고 있고 모처럼 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문화계 인사들도 '이 정도로 단합이 될 줄은 몰랐다'라는 분위기다.

블랙리스트에 이름이 올라간 박재동 화백은 "박근혜 대통령이 문화인들을 한 자리에 모이게 만들었다"며 정권을 비꼬기도 했다. 성향을 떠나 문화 자체가 존재할 가능성이 없어졌다는 것에 문화인들은 발등에 불이 떨어진 느낌을 받게 됐고 결국 한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이다.

▲ 지난 9일 열린 '블랙리스트의 시대, 예술가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토론회

이런 가운데 조윤선 장관이 청와대 정무수석으로 재직할 당시 블랙리스트 명단 작성을 지시했다는 증언이 문체부 전현직 관계자들로부터 나오면서 파장이 일었다. 블랙리스트는 세월호 시국선언에 참여한 이들과 2012년 문재인 당시 대통령 후보 지지선언 예술인, 2014년 박원순 당시 서울시장 후보 지지를 선언한 예술인들이 포함되었다.

이 소식을 단독 보도했던 매체는 관계자의 말을 통해 "2014년 여름부터 2015년 1월까지 조윤선 당시 청와대 정무수석과 정무수석실 산하 정관주 당시 국민소통비서관이 지원하지 말아야할 문화예술계 인사와 단체들의 명단을 협의해 작성했으며, 이 명단을 청와대 교육문화수석실을 경유해 문체부와 문예위로 내려보내 지원사업 선정에 반영하도록 했다"고 밝혔다.

물론 조 장관은 "블랙리스트는 업무 소관이 아니었다"며 자신의 행위가 아니라고 항변했지만 이미 사람들은 '아니 땐 굴뚝에 연기날 리 없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설사 조 장관이 한 것이 아니라고 해도 일단 블랙리스트가 존재한다는 것이 알려진 이상 책임을 면하기는 어렵다. 결국 '블랙리스트 작성 덕에 문화부 장관이 됐다'는 논리가 성립될 뿐이다. 

이뿐만 아니라 김종덕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지난해 급작스럽게 국립극장에 무용공연 <향연>을 올리면서 문체부 산하기관 민간 지원 예산 6억원을 전용했다는 의혹이 제기됐고 이 배후에 차은택 감독이 있다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다. 

문제는 이들이 문화계를 자기들 멋대로 좌지우지하는 동안 문화인들이 설 자리를 잃었다는 것이다. 이미 블랙리스트에 오른 이들은 각종 사업에서 배제되거나 지원이 거부됐고 심지어 관련 사업들을 없애는 일까지 벌어졌다.

서울연극제가 아르코예술극장에서 쫓겨난 일, 국립국악원의 검열 등이 모두 이 문제들과 관련이 있다는 진술이 나오고 있고 인사 개입 문제가 전면에 오르면서 각 문화 단체장들이 '차은택 라인'으로 몰리는 일이 벌어지는 게 현실이다.

최근 모 단체의 경우 현 사장 선임 당시 미르재단과 연관이 있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큰 곤욕을 치른 바 있다. 이에 사장은 적극적인 해명으로 사장 선임이 특혜가 아니라는 입장을 밝히기는 했지만 이미 문화계가 그들에 의해 장악된 상황에서 사장에 오른다는 것 자체가 '낙하산', '라인'이라는 선입견을 가지기에 충분한 상황이라는 점에서 안타까움을 느끼게 한다.

결국 지난 16일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는 문화체육관광부의 내년도 예산 중 '최순

▲ 김종덕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사진제공=문화체육관광부)

실 게이트' 관련 예산 1천7487억원을 삭감했다. 삭감된 예산은 국가이미지 통합사업 예산, '위풍당당 코리아' 사업 예산, 가상현실 콘텐츠 육성사업 예산, 재외 한국문화원 관련 예산 등으로 모두 최순실과 차은택에 연루된 사업 예산들이다.

예산안이 의결되자 조윤선 장관은 "단지 (의혹 사업과) 이름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예산을 삭감한다면 정책사업 추진이 어려워진다. 가상현실 콘텐츠 지원사업 삭감으로 신시장 대응전략이 훼손되고 위풍당당 코리아 사업 역시 문화와 스포츠 산업의 중요한 예산"이라고 항의했다.

그러나 더불어민주당 간사인 도종환 의원은 "가상현실콘텐츠 사업의 경우 심사 과정에서 심사위원 명단도 공개하지 않고, 공모작 중 어떤 작품이 당선됐는지도 밝히지 않았다. 결국 차은택 사업으로 드러났고, 문제가 되니까 국회가 삭감했다"면서 "문체부 때문에 나라 전체의 운영이 어려워졌다. 왜 예산을 삭감할 수 밖에 없는지 생각해보라"고 맞받아쳤다.

‘최순실 게이트’ 의혹이 제기된 사업의 예산 삭감은 당연한 조치이다. 문체부의 그동안의 행적을 보면 이런 ‘징벌적 조치’는 충분히 취할 수 있다. 물론 사업에 대한 재검토 없이 예산만 삭감하는 것은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일부의 주장도 일리가 있다. 자칫 의혹과 관련없는 문화 행사나 정책마저 ‘삭감 후유증’을 겪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모든 책임은 결국 문체부에 있고 이로 인한 문화인들의 시련도 전적으로 문체부와 정부에 책임이 있다. ‘국정농단’으로 문화계가 얼룩진 상황에서 이들은 아무런 대책을 마련하지 않고 있다. 어쩌면 그들의 농단 사례는 아직도 많이 남아있을 지도 모르며 지금 밝혀진 것도 고작 ‘빙산의 일각’일지도 모른다.

이래저래 ‘문화융성’은 그야말로 먼 나라 이야기가 됐다. 문화융성은 커녕 농단으로 만신창이가 되고 엉망이 된 한국 문화정책의 민낯이 제대로 드러났다. 현 문화정책으로는 누구도 살아남을 수 없다. 정부를 반대하는 이들은 물론이거니와 현 정부와 발을 맞췄던 이들도 활동을 영위하기가 쉽지는 않을 것이다. ‘부역자’라는 주홍글씨를 달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역사는 어쩌면 박근혜 정부 5년을 ‘문화예술인들이 가장 고통스러웠던 때’로 기록할 지도 모른다. 단 몇 사람이 문화계를 농락한 이 엄청난 상황을 후세인들은 어떻게 이해를 할 수 있을까? 문화계는 다시는 이런 일이 없어야한다는 문화인들이 단합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과연 폐허가 되어버린 우리 문화계를 어떻게 일으켜세울지, 그들의 새로운 모습을 지켜봐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