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무덤에 묻힌 임이시여!"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무덤에 묻힌 임이시여!"
  • 한명섭 소설가/문학박사
  • 승인 2009.08.27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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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ㆍ언론인, 광복절 맞아 용정 '윤동주 생가'를 다녀와서


윤동주문학사상선양회는 지난 8월 14일부터 17일까지 3박 4일간 중국 용정(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내)에 있는 윤동주 묘소와 생가 등을 방문해 윤동주 시인이 남기고간 발자취를 더듬었다. 10여년 동안 매년 광복절 즈음하여 방문, 허물어져 가는 윤동주 생가를 돌봐온 선양회는 이번 방문단을 총 12명으로 꾸렸다. 방문단은 연변대학 김관웅 교수를 비롯, 윤동주선양회일본본부 이성사 회장, 한양대 유성호 교수 등이 참석한 가운데 문학심포지엄을 개최하는 등 윤동주정신을 기리기 위한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특히 이번 방문은 간도가 중국에 완전히 넘어가는 상황이어서 더욱더 그 의미가 깊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방문기는 소설가이자 경원대에서 강의를 맡고 있는 한명섭 박사가 정리했다.

 

윤동주문학사상선양회(대표:박영우)가 주최하는 제14회 윤동주국제문학심포지엄 참가와 윤동무 묘지 참배를 위해 광복절을 하루 앞둔 8월 14일 인천공항을 출발한 12명의 일행은 옌지공항에 도착했다.

▲ 좌로부터 박영우 윤동주문학사상선양회 대표, 허용석 연변작가협회 주석, 김관웅 연변대 교수, 유성호 한양대 교수(평론가), 이성사 윤동주문학사상선양회 일본회장

정오가 가까워 오는 시간인데도 아직 안개가 걷히지 않아 뿌연 하늘 속에서 ‘연길’이라고 적힌 큰 한글 간판이  인상적으로 보였다. 현지 이동을 도와주는 여행사의 가이드가 문화단체를 모시게 되어 영광이라고 했듯이 우리 일행은 제4회 윤동주문학상 수상자인 공광규 시인을 비롯한 시인, 평론가, 소설가,언론인 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뿌르하퉁하 강변을 지나 호텔로 향하는 길가에는 한글로 적힌 간판이 가득했다. 심포지엄이 시작되기 전에 둘러본 연변대학교 교정에는 중국 대학신입생들이 무더운 날씨에 군복을 입고 군사훈련이 한창이었는데 학창시절의 교련시간을 떠올린 우리 일행의 눈길을 잡았다. 

4시30분부터 시작된 심포지엄에서 한양대 유성호 교수의 강연을 시작으로 길림대 권성률 교수, 연변대 김호웅 교수의 발표가 이어졌다. 유성호 교수는 저항주의와 민족주의로 대표되는 공적인 기억으로서의 윤동주를 넘어서 있는 사적인 기억으로서의 윤동주에 대한 강연을 했다.

◆ 윤동주ㆍ박정희ㆍ케네디의 삶의 차이

▲ 도문강(두망간) 관광부두 건너가 북한 땅이다.
1917년 12월 30일에 태어난 세 인물 윤동주, 박정희, 케네디의 삶의 차이에 대해서 또 27년 1달 보름 즈음을 살다가 세상을 떠난 윤동주의 삶과 문학에 대한 강연에 좌중들은 숙연해졌다.

심포지엄이 끝난 후 윤동주문학사상선양회 장학금 전달과 함께 연변대에서 조선어문을 전공하는 학생들의 윤동주 시낭송으로 분위기는 점점 고조되었다.

올해로 서거 64주년이 지난 윤동주의 시가 이렇게 우리의 마음을 적시는 것에서 문학의 힘을 다시 느낄 수 있었다. 조금은 낯설게 들리는 억양이지만 비장한 음성으로 윤동주 시인의 시를 읽어 내려가는 연변 젊은이들의 모습은 특히나 인상적이었다.  

둘째 날 아침 일찍부터 두만강을 보기 위해 찾은 도문. 도문에 들어서자 낡은 아파트벽을 장식하고 있는 한복을 입고 장구춤을 추는 벽화가 눈에 들어왔다. 노인절을 맞아 곱게 한복을 차려입고 길을 걷고 있는 노인들의 모습도 낯설지가 않았다.

우산나무라고 부른다는 벤자민과의 가로수가 인상적인 이 곳에서 노젓는 뱃사공이 과연 어떻게 뗏목을 띄웠을까 싶은 폭 좁은 두만강 너머 북한땅을 볼 수 있었다. 강 너머 북녘의 산에는 나무가 없었다. 지금은 그나마 푸른 빛을 하고는 있었는데 수년 전에는 아예 붉은 흙빛 그대로였다고 한다.

두만강 위를 한번 돌고 오는 보트를 타는 곳에는 한창 넓은 광장을 조성하는 중이었는데 중국 정부 입장에서는 쏠쏠한 관광자원이 될 수도 있겠다.

용정으로 향하는 도로를 따라 버스가 달리며 강 저쪽 북녘의 집이며 사람이며 기차역을 볼 수 있었다. 북한의 경제가 호황이던 70년대에 밀무역을 하느라 두만강을 넘나들다가 세상을 떠났다는 조선족 이야기를 들으며 격세지감을 느꼈다. 

백두산 관광을 주목적으로 하는 한국의 관광객의 여정에 꼭 들어있다는 대성중학교(현 룡정중학)와 일송정 방문을 잠시 미뤄두고 우리 일행은 먼저 윤동주 묘지로 향했다. 우리 일행의 이번 중국방문 목적의 최우선 순위가 윤동주 묘지를 찾아 참배하는 것이었다.

▲ 윤동주 시인의 묘소에서 벌초를 끝낸 후 예를 표하고 있는 방문단

동행한 가이드조차 지금까지 윤동주 묘소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고 할 만큼 관광객들이 쉽게 찾는 곳은 아니었다. 윤동주문학사상선양회는 매년 윤동주의 묘지를 찾아 참배하는 뜻 깊은 일을 하고 있다. 버스는 올라갈 수 없는 산 속에 위치한 윤동주의 묘지를 향해 택시 네 대에 나누어 타고 좁은 길을 올랐다.

우리를 태운 택시 기사들도 모두 조선족 동포들이었다. 흙먼지 날리는 비포장로를 오르기 얼마 지나자 작은 이정표 팻말에 윤동주 묘지 가는 길이라고 써 있었다. 이 표지는 작년 묘지 참배에 윤동주문학사상선양회가 설치한 것이었다.

공동묘지 가운데 훤히 펼쳐진 전망을 앞에 두고 자리한 윤동주의 묘지 앞에 섰다. 뜨거운 햇살에 흐르는 땀과 대조되게 너무도 메마른 무덤가에는 풀이 잘 자라 있지 않았다. 시인은 풀 한 포기 없는 길을 걷다가 풀 한 포기 제대로 자라지 않는 묘지에 묻혔던 것일까.

▲ 아직은 초라하게 운영되고 있는 윤동주전시관

잡초들을 낫으로 잘 정리하고 생수통의 적은 양의 물이나마 무덤 위에 뿌려 갈증을 덜게 한 후에 우리 일행은 윤동주의 묘비 앞에 서서 그를 다시 떠올리며 추모했다. 그의 시를 큰 소리로 외워가며 가끔은 고개 숙여 그를 추억했다.

무덤 하나 건너 옆에 나란히 위치한 청년문사 송몽규의 묘지에도 절과 술을 올렸다. 하오의 뜨거운 태양아래에서도 우리는 발길을 옮길 수 없었다. 구름 한 점 없이 푸른 하늘이 쓸쓸했다. ‘돌담을 더듬어 눈물짓다 / 쳐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푸릅니다.’라고 노래했던 시인이 바라보던 하늘이 혹여 이런 하늘이 아니었을까?

올해는 윤동주 서거 64주기이기도 하지만 간도와 따로 생각할 수 없는 안중근 의사 서거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안중근 의사는 윤동주의 고향인 명동촌에 머물면서 거사를 준비하기도 했었다.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 늙어 갔어도

광복절에 윤동주의 묘지를 참배하기 위해 찾은 독립운동의 숨결이 여전히 살아 숨쉬는 이곳 용정에 머물고 있다는 감회가 온몸을 전율케 했다.

▲ 가곡 '선구자'의 배경인 일송정에 올라가면 '한 줄기 해란강'이 보인다.
선구자의 가사에 나오는 일송정은 해란강이 굽어보이는 높은 언덕에 위치했다고 한다. 일제에 의해 고사 되었다는 옛날의 일송정은 아니지만 새로 심은 작은 소나무 한그루가 자라고 있는 언덕에는 한국의 관광객들이 많이 찾고 있는 곳이다.

소나무가 있던 정자에 다다르니 한 무리의 한국인 관광객들이 뒤이어 도착했다. 초등학생부터 대학생쯤으로 보이는 젊은 학생들과 무리를 이루어 해란강을 내려다보았다.

용정의 노래라는 부제로 적혀 있는 선구자의 가사를 입에서 읊조리며 다시 용정 시내로 들어서 대성중학교를 방문하고 이 날의 마지막 목적지인 명동촌으로 향했다.

명동교회를 둘러보고 윤동주 생가로 발길을 옮기니 명동촌에 살고 계시는 어르신들이 우리 일행을 맞이하기 위해 분주히 준비를 하고 계셨다. 우리가 잔치 준비가 마치기를 기다리면서 생가를 둘러보는 동안에도 한국인 관람객들은 끊이지 않고 계속 찾아왔다가 떠났다. 우리 민족의 마음에 짧은 생을 살다 간 윤동주 시인이 그렇게 살아 있었다.

윤동주 생가 앞은 키가 큰 옥수수가 빼곡했다. 내 고향인 강원도 옥수수 밭 여기저기 있는 것과 꼭 같은 풍경에 낯설지가 않았다. 잘 익은 삶은 감자와 찰진 옥수수, 배추김치와 총각김치, 설탕뿌린 수박, 고사리 나물, 고추장. 입맛이야말로 민족의 동질성을 확인하게 해주는 가장 빠른 지표일 것이다.

▲ 명동촌 윤동주 생가 마을에서 일행들과 마을분들이 함께 윤동주 시낭송회를 열고 윤동주를 기렸다. 마을 부녀회장님이 방문단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있다
그날 밤 만난 명동촌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그냥 우리의 시골 할아버지 할머니와 마찬가지로 푸근했다. 조선족 가이드의 말로는 젊은 사람들끼리는 평소에는 우리말과 중국말을 섞어서 말하지만 어른들 앞에서 중국말을 하면 건방지다고 생각한다고 한다.

또 담배를 피울 때도 어른 앞에서는 조심 하는 것이며, 한족과 다르게 덥다고 하더라도 윗옷을 훌렁훌렁 벗고 다니는 법이 없다는 것이 조선족과 한족이 다른 점이라고 한다. 어두워지기 전에 시작한 잔치 자리는 어느덧 어둠 속에 들었다.

생가 마당 앞에는 한바탕 춤판이 벌어졌다. 어깨춤의 DNA는 민족 특유의 것인지 정겨운 춤사위와 노래가 밤과 명동촌을 채워갔다. 내일의 여정을 위해 아쉽게도 그 자리가 끝나게 되었지만 잔치가 끝나고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양손에 가득 쥐어주신 삶은 계란, 감자, 옥수수 등에 다시 한번 깊은 정을 느낄 수 있었다.

다음날 새벽 5시에 호텔을 나선 버스는 4시간여를 달려 장백산 아래에 도착했다. 장백산이라는 한자가 크게 써 있는 산문 앞에는 벌써 꽤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고 있었다. 환경버스라는 버스를 타고 10분여를 들어가서 다시 선 줄은 우리에게 한 시간이 넘는 지루한 기다림을 선사했다.

▲ 용정 명동촌 윤동주 생가 마을분들이 방문단을 위해 고맙게도 음식을 대접해 주었다.

▲ 생가 한쪽에 걸려 있는 찰판. 칠판에 쓰여진 글이 재미있다.

 

 

 

 

 

 

 

일요일이라서 유난히 많았다던 중국인 관광객 틈에 줄을 서서 따가운 햇살과 중국인의 무질서함을 불평하고 있는데 중국인들 사이에서도 똑같은 불평과 질책이 나오는 걸 보니 그저 사람사는 곳에서 벌어지는 일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인파에 밀리고 밀려 일행은 뿔뿔이 흩어져 홀로 짚차에 오르게 되었다. 시스레나무 군락이 있는 해발 2000m지역을 지나면서 뒷자석에서 반가운 우리말이 들린다. 줄을 설 때부터 손을 꼭 잡고 있던 여학생들이었는데 알고보니 조선족이었다.

끽끽 소리를 내며 아슬아슬한 드리프트를 즐기는 짚차 기사의 운전에 번번히 질러대는 비명에 웃음을 짓고 있을 무렵 짚차는 나무는 더 이상 보이지 않고 짧은 풀만이 자라는 고지대를 달리고 있다.

◆ '백두산' 팻말 앞에서 사진 찍고 싶었건만

15분여를 달려 도착한 곳은 천지 아래의 휴게소. 앞에 보이는 사람들이 빙 둘러선  언덕 위에 오르면 민족의 영지 천지가 나타난다.

설렘을 안고 서둘러 언덕을 올라섰다. 너무나 쾌청한 날씨에 깨끗이 펼쳐 진 천지를 눈 앞에 대하는 순간 앞 선 설렘이 갑자기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  수많은 중국인 들 사이에 서서 천지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도 그랬고, 천지의 물을 직접 만져보겠다는 생각을 실현하기에 천지는 너무 멀리 있었다.

버라이어티 프로그램 1박 2일의 일행이 올랐던 장백폭포를 거쳐 오르는 등산로는 안전을 이유로 막혀 있어 그 길로 오를 수 없었다. 아쉬웠다. 장군봉이 바라다보이는 이 곳은 중국 땅. 한국인 관광객이 많이 찾는다고는 하지만 많은 관광객들의 대부분은 중국인들이었다.

▲ '장백산'이라고 표기된 우리의 '백두산' 입구. 간도를 돌려받으면 당당히 '백두산'으로 표기될 텐데... 몹시 아쉬웠다.
고지에 올라서인지 먹먹한 귀만큼이나 가슴도 답답했다. 지금은 여러 상황이 허락되진 않지만 중국 쪽 천지 저쪽 편으로 올랐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은 나 혼자만의 아쉬움을 아니었을 것이다. 천지를 내려와서 장백폭포로 발을 옮겼다.

나무 계단 옆에는 엉겅퀴가 예쁘게 피어 있었고 많은 야생초 군락이 아름다웠다. 한발한발 오르면서 숨이 가빠왔지만 경치는 매혹적이었다. 북한 쪽에서 오르는 등산로가 중국 쪽의 그것보다 몇 배나 더 아름답다는 말을 들었는데 그 아름다움이 채 상상이 되지 않는다.

더욱 아쉬움이 남았다. 버스를 타고 다시 입장했던 곳으로 나오면서 중국인 관광객들이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을 해 온다. 장백산 산문 배경으로 환히 웃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백두산이라고 우리 글로 쓰인 산문을 배경으로 사진 한 장이 찍고 싶었다. 장백산 산문 앞에서 굳이 사진을 찍을 생각은 없었다. 돌아오는 비행기의 제일 뒷좌석에 앉아 나는 윤동주의 시 ‘길’의 시행을 떠올렸다.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글/ 한명섭 (소설가/문학박사)  press@sctoday.co.kr
사진/ 이은영 기자, 김지유 시인 young@sctoda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