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중강의 뮤지컬레터] 뮤지컬 ‘청춘, 18대1’ 서재형 연출께
[윤중강의 뮤지컬레터] 뮤지컬 ‘청춘, 18대1’ 서재형 연출께
  • 윤중강 평론가/ 연출가
  • 승인 2017.01.23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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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중강 평론가/ 연출가

자전거 벨소리가 오래도록 가슴에 파고들었던 연극이었습니다. 그 남자는 자전거를 타고 무대에 등장을 했었죠. 무대를 둥글게 또 둥글게 돌다가, 한마디 툭 하고 내뱉던 그 남자의 그 말이 기억납니다. 그 말도 내 머릿속에서 그렇게 둥글게 맴돌곤 했었죠. 그런 연극이었습니다. 

여운이 긴 연극이었습니다. 볼 때도 그랬고, 보고나서도 그랬습니다. 그 시대를 살았던 청춘들이 참 아련하면서도 아릿했습니다. 연극 '청춘, 18대1'이 그랬습니다. 한아름(극작)-서재형(연출) 콤비의 대표작으로 꼽기에 주저함이 없는 작품이었습니다. 

뮤지컬 ‘청춘, 18대 1’을 보았습니다. 힘들었습니다. 많은 장면이 연극의 그것과 같았습니다. 말하자면 거기에 ‘노래’가 더할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왜일까요? 그 때 보았던 연극과 장면은 같은데, 이 뮤지컬에는 그런 여운을 느끼기 어려웠습니다. 아련함을 느끼게 어렵고, 아릿함은 거의 사라졌습니다.

연극으로 볼 땐 그렸죠. ‘춤(사교댄스)을 추는 모습이 이렇게 절절한 슬픔으로 느껴질 수도 있구나!’ 하지만 뮤지컬에서의 그런 장면은, 그저 대학로에서 익숙한 뮤지컬의 한 장면과 별반 다를 바 없었습니다. 관객을 더욱 코믹에 빠져들게 했으나, 이른바 ‘페이소스’는 느끼게 어려웠습니다. 연민은 실종되었고, 사건만이 거기에 덩그러니 존재했습니다. 

한 마디로 이 작품은 내게 이랬습니다. “특별한 연극이, 평범한 뮤지컬로” 변해버린 느낌입니다. 아쉽습니다. 안타깝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연출로서의 의도가 궁금합니다. 

연극을 미리 봤던 탓일까요? 연극이 강하게 뇌리에 박혀있는 탓일까요? 작품을 만든 사람으로선, 매우 심하고, 대단히 섭섭하게 들릴겁니다.

내 생각에, 이 작품은 뮤지컬을 만들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이 뮤지컬 속의 대사와 연기, 이 뮤지컬 속의 노래와 동작, 이 둘이 물과 기름처럼 겉도는 느낌입니다. 

한 예를 들어볼까요? 이 뮤지컬의 배경은 해방되기 전, 1945년의 동경입니다. 배우들이 서툴게 조선말을 사용합니다. 일본말도 아주 잘 합니다. 거기서 생활했던 사람으로서, 배우들에게 큰 박수를 보냅니다. 재일교포가 하는 우리말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도, 이 배우들의 연기의 리얼리티에 반하게 될 겁니다.

그런데, 이 배우가 노래를 합니다. 그 노래는, 그간의 이 배우의 입장과 정서를 희석시킵니다. 이른바 ‘교포적’인 말투로 연기를 잘 하다가, ‘일반적’인 발음으로 평범하게 노래를 하는 배우의 모습에 감정이입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건 배우 탓할까요? 그건 노래탓일까요? 노래를 할 때도, 어눌한 한국어로 노래를 했어야 할까요? 아닙니다. 그럴 순 없습니다. 배우도, 작곡도, 모두 잘못이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노래를 부른다는 자체가 문제입니다. 뮤지컬로 만든 자체가 애초에 무리한 생각입니다. 

이런 일본인으로 분한 배우의 한국어 노래만을 확대해석헤서,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건 아닙니다. 이 뮤지컬이 태생적으로 갖고 있는 문제를 얘기하는 겁니다. 연극으로 출발을 했기에 노래는 참으로 ‘보조적’이란 생각을 합니다. 가슴에 파고드는 뮤지컬 넘버가 아쉽습니다. 

작곡의 탓은 절대 아닙니다. 연극으로 익숙한 작품을 뮤지컬로 만들면서, 작곡자도 무척 고심했을 겁니다. 결과적으로 작곡가는 작가와 연출을 아주 잘 알았고, 그 연극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 것을 고려해서 만든 노래는, 작곡가로서는 “최악의 상황에서, 최선의 노래를” 뽑아냈다고 생각이 됩니다. 작곡가가 경험이 많기에, 일본적인 정서를 잘 느끼게도 해주었던 건 사실입니다. 

뮤지컬에서 노래는 어떤 역할을 할까요? 이 뮤지컬은 애초 연극이기 때문에, 노래는 결국 보조적인 수단에 머물고 갑니다. 작품의 상황이나 감정의 ‘주석’이나 ‘덧붙임’처럼 다가옵니다. 

서재형 연출에서의 배우의 발성은 독특합니다. 나는 그것 자체가 음악이고 노래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음고(音高, pitch)와 다를 뿐이지요. 그리고 ‘죽도록 달린다’는 단체의 이름처럼, 서재형 연출의 배우들에는 몸짓에서 나오는 독특한 리듬이 존재합니다.

나는 이것 자체가 선율이고 리듬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하기에, 이런 ‘일반적인’ 혹은 ‘뮤지컬적인’ 노래는 불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때론 방해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아시다시피 일본의 전통예술 노(能, Noh가 그렇습니다. 이것에 익숙해지면, 노 배우의 발음과 동작이, 독특한 선율과 리듬으로서 큰 감동을 줍니다. 이건 ‘일반적인’ 노래와 춤에서는 도저히 표현해낼 수 없는 겁니다. 어쩌면 서재형 연출의 ‘연극’에도 이미 이런 요소가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최종적으로 이 작품이 뮤지컬로서의 한계를 결정적으로 말하겠습니다. 서재형 연출의 작품에서의 배우는 거의 ‘통성’으로 질러내는 발성으로 대사를 내뱉습니다. 좋습니다. 그것만의 매력이 충분합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노래’에 적용했을 때는 문제를 야기합니다. 이번 연극에서도 배우들의 노래(가창)을 들으면, 대사를 할 때처럼 통성으로 ‘거침없이’ 내지르는 것과 아니고, 그렇다고 일반적인 뮤지컬처럼 ‘우아하게’ 노래를 하는 것도 아닙니다. 매우 어정쩡합니다. 이 뮤지컬의 결정적인 한계의 하납니다. 
 
그런데, 이건 철저하게 나만의 생각일지 모릅니다. 연극을 뮤지컬로 만들고자 했던 연출의 의도가 있었겠지요? 오직 뮤지컬을 경험한 관객은 낄낄거리면서 웃고 박수치면서 관극하고 있기도 했습니다. 춤을 소재로 한 연극이기에, 음악과 노래는 당연히 더 깊이 들어갈 수 있을까요?

나는 오히려 그 반대라고 생각하는 입장입니다. 뮤지컬을 다시 보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연극 ‘청춘, 18대 1’이 다시 무대에 오른다면, 꼭 다시 보고 싶습니다. 그걸 더욱더 내 머리와 마음에 각인하고 싶습니다. 
 
* 뮤지컬 '청춘, 18대1'(2017. 1. 17. ~ 2. 5. 대학로 아트원씨어터 1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