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년 '노미호와 주리혜'로 데뷔, 영원한 현역 작가
만화와 5월. 어린이들이 특히 좋아하는 것들이다. 그런데 정작 그 만화를 그리는 만화가들은 5월을 싫어한다. ‘어린이날’이 5월에 들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 이야기가 아니고 옛날 이야기다.
70년대 만화가들에게 5월은 아주 죽을 맛이었다. 3대 악(惡)이다, 5대 악이다 하면서 언론에서 추방 성토를 하는 대상에 불량 식품과 불량 만화가 꼭 끼었고 만화 화형식까지 했을 정도였던 것이다.
당시에는 출판물, 특히 만화는 사전에 심의를 받아야 했고 무척 엄격했다. 열 살도 안 된 사내아이가 누나하고 한 방을 쓰는 것이 비윤리적이라며 수정 지시를 내렸고, 권투 장면이 폭력적이라면서 규제가 심했다.
끼니 거리를 걱정할 정도로 가난한 집이어도 남녀 사이라면 반드시 각방을 쓰도록 그려야 했고, 권투든 뭐든 주먹질이 나와서는 안 된다는 인식에 사로잡혀 있던 시대였다.
그래서 당시의 만화가들은 소위 ‘명랑 만화’로 돌파구를 찾았다. 꺼벙이(길창덕), 두심이('두심이 표류기'ㆍ윤승운), 칠떡이('5학년5반 삼총사'ㆍ박수동), 혁이('도깨비감투'ㆍ신문수), 강가딘(김삼) 등이 그 시절을 풍미했던 우리들의 주인공이었다.
이에 비해 이상무는 ‘극화 만화’로 승부를 걸었다.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독고탁’이 등장했다. 그런데 ‘독고탁’은 다른 주인공들과는 사뭇 달랐다. 명랑 만화에서는 말썽꾸러기 주인공이 곧잘 등장하기도 했지만, 극화 만화에서는 ‘멋진 주인공’이 반드시 등장해야 하는 때였다.
그는 이름부터 시작하여 성격, 생김새까지 ‘멋진 주인공’에서 벗어난 캐릭터들을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이름은 희성인 ‘독고’씨 성에 뭔가 강한 것 같은 느낌을 주는 ‘탁’을 붙여 ‘독고탁’이라고 정했다.
결코 예쁘지도 않고 또 얌전하지도 않으면서 개구쟁이인 데다 좀 사고뭉치에 까까머리까지 해서 반항적인 요소가 있는 주인공을 만들어냈다. 주인공답지 않은 주인공을 내세웠다는 것은 당대 극화 만화의 풍토에서는 혁명적인 변화였다.
1971년 '주근깨'에 첫 출연한 ‘독고탁’을 보고 독자들은 그 독특한 이름에, 골치 아프고 말썽 잘 부리며 반항적이고, 예쁘지는 않지만 귀여운 캐릭터에 빨려들어갔다. 독고탁의 모습이 70~80년대를 살고 있는 독자들 자신의 모습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의 데뷔작은 사실 '주근깨'가 아니라 『여학생』이라는 창간 잡지에 발표한 2쪽짜리 명랑 만화 '노미호와 주리혜'였다.
이상무 화백의 본명은 ‘박노철’. 1946년 8월 15일 경북 김천에서 태어난 박노철은 김천 중앙고등학교 3학년 때 대구 『영남일보사』 토요일판에 명랑 만화를 발표한다.
고교 졸업 후 당시 최고의 인기 작가였던 박기정 선생의 문하에 들어가, 1965년 ‘이상무’라는 필명으로 '노미호와 주리혜'를 발표하며 데뷔하게 된다.
본명보다 더 어울리는 필명을 얻게 만든 이 작품은 이후 엄청난 인기를 누리며 무려 20년 동안 연재되는 대기록을 세우기도 한다.
1971년에는 ‘독고탁’을 최초로 등장시킨 '주근깨'를 발표한 후 '비둘기 합창', '현해탄 너머', '울지않는 소년', '내 이름은 독고탁', '다시찾은 마운드', '아홉 개의 빨간 모자', '달려라 꼴찌' 등의 작품을 발표했다.
70~80년대를 추억할 때 빠질 수 없는 작가가 이상무 화백이다. 그리고 한국 만화사를 풍미한 다섯손가락에 꼽을 수 있는 캐릭터 중의 하나가 ‘독고탁’이다. 이상무 화백의 만화는 70년대부터 90년대에 이르기까지 독자와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독고탁’에서 시작되는 깔끔한 그림체가 그랬고, 소재 또한 독자들에게 친근감을 주었다.
그가 다룬 만화 소재는 크게 나누어 ‘가족’과 ‘스포츠’로 분류된다. 가족이 등장하는 이 화백의 대표작은 1978년 도서잡지윤리위원회의 우수만화상을 수상한 '비둘기 합창'이다. 가장의 실직, 생계를 위한 6남매의 고생과 희망, 그리고 절망이 얽혀 독자들에게 감동을 준다.
당시의 인기 스포츠였던 야구, 축구, 권투 등을 소재로 사용한 만화들도 독자들에게 인기를 끌었고 감동을 주었다. 청소년들에게 꿈과 희망과 용기를 불러일으키는 것이 만화의 가치라고 봤을 때, 이 화백은 거기에 가장 부합되는 작품을 많이 창작해 냈다.
그는 만화가로는 일찍 성공했다. 당시 순정 만화를 주로 그리는 엄희자라는 인기 작가가 있었는데, "엄희자는 여자만 울리지만 이상무는 남자와 여자를 모두 울린다"는 이야기를 들을 정도로 인기가 대단했다. 하지만 당시 만화가의 생활은 어려웠다.
이 화백처럼 수입이 괜찮던 경우에도 한 달 고료를 받아 하숙비 내고 나면 주머니가 비니 밤낮없이 일해야 겨우 먹고살 수 있었다.
만화가로서 바쁘게 살아오던 어느 날 너무 피곤해서 붓 들 힘조차 없을 정도로 건강이 악화되었다. 간질환이었는데 다행히 큰병은 아니었다.
그 이후 만화가로서 쫓기며 살던 생활을 청산하고 가급적 여유있게 살기로 마음먹었다.
작고한 고우영 선생과 동료 만화가 허영만 화백의 권유에 못 이겨 1988년 골프에 입문했다. 세 번째 라운드에서 100타를 깬 뒤 6개월 만에 다시 90타를 깨 주변을 놀라게 했고, 1년 만에 싱글에 들었다.
1990년 『스포츠조선』이 창간하면서 골프레슨 만화에 대한 청탁이 들어와 연재를 하다 보니 5년 동안이나 하게 되었다. 이어 SBS-TV에 같은 이름의 프로그램이 생겨 진행자로 참여하게 되었고, 골프레슨 만화를 엮어 만든 '싱글로 가는 길'은 아직도 매년 1만 부가 팔려 나가는 스테디셀러가 되어 골프에 관한 전문작가로 대접받고 있다.
이 화백은 그 사이에 ‘너무나 그리고 싶었던 만화’를 조용히 그렸고 2006년 단행본 만화 '감또깨이 입에 물고'를 내놓았다.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결국 승리하는 ‘독고탁’을 그린 작가가 과연 어떤 어린 시절을 보냈을까 궁금한 독자는 자서전적인 이 책을 보면 그 의문을 풀 수 있다.
‘감또깨이’는 ‘감꽃’의 사투리인데, 전쟁 직후 어렵고 힘들었던 시절 유년기를 보낸 작가의 경험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이 책은 그 시절을 함께한 모든 이들에게 보내는 우정 가득한 고백이다.
구슬치기ㆍ딱지치기에 해 지는 줄 모르는 아이들, 여름에는 멱을 감고 겨울 얼어붙은 강에서 썰매를 타고 어울려 다니던 그때 그 시절, 달콤하면서도 씁쓰레한 그 시절 아련한 추억을 떠올리게 한다.
이 화백은 지금 마포의 작업실에서 '감또깨이 입에 물고' 후편을 그려내고 있다. 어언 44년. 이전과 달리 컴퓨터로 만화 작업을 하고 있는 그는 여전히 열정적이고 힘이 넘쳐보였다. 앞으로 기회가 닿으면 인터넷 만화판에도 진출해보고 싶다는 그에게 진심 어린 존경과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
서울문화투데이 김준현 기자 jhk@sctoda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