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남동생 ‘독고탁’아시죠?”
“국민남동생 ‘독고탁’아시죠?”
  • 김준현 기자
  • 승인 2009.08.27 14: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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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냄새 나는 만화로 독자 울리고 웃기기 44년 이상무화백
65년 '노미호와 주리혜'로 데뷔, 영원한 현역 작가

만화와 5월. 어린이들이 특히 좋아하는 것들이다. 그런데 정작 그 만화를 그리는 만화가들은 5월을 싫어한다. ‘어린이날’이 5월에 들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 이야기가 아니고 옛날 이야기다.

70년대 만화가들에게 5월은 아주 죽을 맛이었다. 3대 악(惡)이다, 5대 악이다 하면서 언론에서 추방 성토를 하는 대상에 불량 식품과 불량 만화가 꼭 끼었고 만화 화형식까지 했을 정도였던 것이다.

당시에는 출판물, 특히 만화는 사전에 심의를 받아야 했고 무척 엄격했다. 열 살도 안 된 사내아이가 누나하고 한 방을 쓰는 것이 비윤리적이라며 수정 지시를 내렸고, 권투 장면이 폭력적이라면서 규제가 심했다.

끼니 거리를 걱정할 정도로 가난한 집이어도 남녀 사이라면 반드시 각방을 쓰도록 그려야 했고, 권투든 뭐든 주먹질이 나와서는 안 된다는 인식에 사로잡혀 있던 시대였다.

그래서 당시의 만화가들은 소위 ‘명랑 만화’로 돌파구를 찾았다. 꺼벙이(길창덕), 두심이('두심이 표류기'ㆍ윤승운), 칠떡이('5학년5반 삼총사'ㆍ박수동), 혁이('도깨비감투'ㆍ신문수), 강가딘(김삼) 등이 그 시절을 풍미했던 우리들의 주인공이었다.

이에 비해 이상무는 ‘극화 만화’로 승부를 걸었다.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독고탁’이 등장했다. 그런데 ‘독고탁’은 다른 주인공들과는 사뭇 달랐다. 명랑 만화에서는 말썽꾸러기 주인공이 곧잘 등장하기도 했지만, 극화 만화에서는 ‘멋진 주인공’이 반드시 등장해야 하는 때였다.

그는 이름부터 시작하여 성격, 생김새까지 ‘멋진 주인공’에서 벗어난 캐릭터들을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이름은 희성인 ‘독고’씨 성에 뭔가 강한 것 같은 느낌을 주는 ‘탁’을 붙여 ‘독고탁’이라고 정했다.

결코 예쁘지도 않고 또 얌전하지도 않으면서 개구쟁이인 데다 좀 사고뭉치에 까까머리까지 해서 반항적인 요소가 있는 주인공을 만들어냈다. 주인공답지 않은 주인공을 내세웠다는 것은 당대 극화 만화의 풍토에서는 혁명적인 변화였다.

1971년 '주근깨'에 첫 출연한 ‘독고탁’을 보고 독자들은 그 독특한 이름에, 골치 아프고 말썽 잘 부리며 반항적이고, 예쁘지는 않지만 귀여운 캐릭터에 빨려들어갔다. 독고탁의 모습이 70~80년대를 살고 있는 독자들 자신의 모습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의 데뷔작은 사실 '주근깨'가 아니라 『여학생』이라는 창간 잡지에 발표한 2쪽짜리 명랑 만화 '노미호와 주리혜'였다.

이상무 화백의 본명은 ‘박노철’. 1946년 8월 15일 경북 김천에서 태어난 박노철은 김천 중앙고등학교 3학년 때 대구 『영남일보사』 토요일판에 명랑 만화를 발표한다.

고교 졸업 후 당시 최고의 인기 작가였던 박기정 선생의 문하에 들어가, 1965년 ‘이상무’라는 필명으로 '노미호와 주리혜'를 발표하며 데뷔하게 된다.

본명보다 더 어울리는 필명을 얻게 만든 이 작품은 이후 엄청난 인기를 누리며 무려 20년 동안 연재되는 대기록을 세우기도 한다.

1971년에는 ‘독고탁’을 최초로 등장시킨 '주근깨'를 발표한 후 '비둘기 합창', '현해탄 너머', '울지않는 소년', '내 이름은 독고탁', '다시찾은 마운드', '아홉 개의 빨간 모자', '달려라 꼴찌' 등의 작품을 발표했다.

70~80년대를 추억할 때 빠질 수 없는 작가가 이상무 화백이다. 그리고 한국 만화사를 풍미한 다섯손가락에 꼽을 수 있는 캐릭터 중의 하나가 ‘독고탁’이다. 이상무 화백의 만화는 70년대부터 90년대에 이르기까지 독자와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독고탁’에서 시작되는 깔끔한 그림체가 그랬고, 소재 또한 독자들에게 친근감을 주었다.

그가 다룬 만화 소재는 크게 나누어 ‘가족’과 ‘스포츠’로 분류된다. 가족이 등장하는 이 화백의 대표작은 1978년 도서잡지윤리위원회의 우수만화상을 수상한 '비둘기 합창'이다. 가장의 실직, 생계를 위한 6남매의 고생과 희망, 그리고 절망이 얽혀 독자들에게 감동을 준다.

당시의 인기 스포츠였던 야구, 축구, 권투 등을 소재로 사용한 만화들도 독자들에게 인기를 끌었고 감동을 주었다. 청소년들에게 꿈과 희망과 용기를 불러일으키는 것이 만화의 가치라고 봤을 때, 이 화백은 거기에 가장 부합되는 작품을 많이 창작해 냈다.

그는 만화가로는 일찍 성공했다. 당시 순정 만화를 주로 그리는 엄희자라는 인기 작가가 있었는데, "엄희자는 여자만 울리지만 이상무는 남자와 여자를 모두 울린다"는 이야기를 들을 정도로 인기가 대단했다. 하지만 당시 만화가의 생활은 어려웠다.

이 화백처럼 수입이 괜찮던 경우에도 한 달 고료를 받아 하숙비 내고 나면 주머니가 비니 밤낮없이 일해야 겨우 먹고살 수 있었다.

만화가로서 바쁘게 살아오던 어느 날 너무 피곤해서 붓 들 힘조차 없을 정도로 건강이 악화되었다. 간질환이었는데 다행히 큰병은 아니었다.

그 이후 만화가로서 쫓기며 살던 생활을 청산하고 가급적 여유있게 살기로 마음먹었다.

작고한 고우영 선생과 동료 만화가 허영만 화백의 권유에 못 이겨 1988년 골프에 입문했다. 세 번째 라운드에서 100타를 깬 뒤 6개월 만에 다시 90타를 깨 주변을 놀라게 했고, 1년 만에 싱글에 들었다.

1990년 『스포츠조선』이 창간하면서 골프레슨 만화에 대한 청탁이 들어와 연재를 하다 보니 5년 동안이나 하게 되었다. 이어 SBS-TV에 같은 이름의 프로그램이 생겨 진행자로 참여하게 되었고, 골프레슨 만화를 엮어 만든 '싱글로 가는 길'은 아직도 매년 1만 부가 팔려 나가는 스테디셀러가 되어 골프에 관한 전문작가로 대접받고 있다.

이 화백은 그 사이에 ‘너무나 그리고 싶었던 만화’를 조용히 그렸고 2006년 단행본 만화 '감또깨이 입에 물고'를 내놓았다.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결국 승리하는 ‘독고탁’을 그린 작가가 과연 어떤 어린 시절을 보냈을까 궁금한 독자는 자서전적인 이 책을 보면 그 의문을 풀 수 있다.

‘감또깨이’는 ‘감꽃’의 사투리인데, 전쟁 직후 어렵고 힘들었던 시절 유년기를 보낸 작가의 경험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이 책은 그 시절을 함께한 모든 이들에게 보내는 우정 가득한 고백이다.

구슬치기ㆍ딱지치기에 해 지는 줄 모르는 아이들, 여름에는 멱을 감고 겨울 얼어붙은 강에서 썰매를 타고 어울려 다니던 그때 그 시절, 달콤하면서도 씁쓰레한 그 시절 아련한 추억을 떠올리게 한다.

이 화백은 지금 마포의 작업실에서 '감또깨이 입에 물고' 후편을 그려내고 있다. 어언 44년. 이전과 달리 컴퓨터로 만화 작업을 하고 있는 그는 여전히 열정적이고 힘이 넘쳐보였다. 앞으로 기회가 닿으면 인터넷 만화판에도 진출해보고 싶다는 그에게 진심 어린 존경과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이상무 화백 인터뷰

-44년의 만화 인생 중 안타까웠거나 아쉽던 순간이 있었다면 언제, 왜 그랬는지 궁금하다.
만화는 혼자서 하기 힘든 작업이다. 서로 도와가면서 해야 하는데 난 그렇지 못했다. 이현세 씨나 허영만 씨에겐 그들에게 잘 어울리는 걸출한 스토리 작가가 있었다. 좋은 스토리작가를 만나지 못한 것이 아쉽다.

-문하생으로 있다가 군대에 갔을 때, 훈련소에서도 만화를 그려 『여학생』의 '노미호와 주리혜' 시리즈를 연재했다고 들었다. 그때 당시 군에서도 작품 활동이 가능했나?
당시 제대를 앞둔 기간병들이 추억록이란 걸 만드는 게 유행했다. 그걸 주로 그림 같은 거 그려서 만드니까, 그림 잘 그리는 훈련병이나 병사를 동원해서 노트 한 권을 만들어 가지고 제대한다. 내무반장이 그때 제대를 앞두고 있었는데 추억록 그림을 그려달라 해서 부탁을 했다. 내가 이러저러해서 한 달에 한 번은 그림을 그려 보내야 한다니까 불침번 초번을 세워주었다. 다른 훈련병들 다 취침하는데 한쪽 구석에서 불 간신히 켜놓고 그려서 연재를 했다.

-그때 당시 인기와 견주어 봤을 때 요즘 같았으면 캐릭터 사업을 했어도, 흔히들 말하는 대박이 났을 것 같은데 그 당시 캐릭터 사업에 대한 시각은 어땠나?
당시 산업구조에선 상품화라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다. 캐릭터 산업이라는 개념조차 서 있지 않았을 때였다. 그래도 빠이롯트 볼펜, 학용품, 도자기 인형 등 꽤 많은 작품들이 출시되었고, 한때는 이상무 볼펜도 있었다.

-프로야구가 출범하면서 야구 만화가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는데, 야구 만화를 그리게 된 동기는?
원래 구기 운동을 잘하고 좋아했다. 중학교 때는 축구를 잘해서 감독선생이 축구부에 들어오라고 했는데 워낙 체격이 작으니 겁이 나서 못 끼었다. 어쨌든 만화가는 자기가 잘하고 잘 아는 걸 그리게 되니 야구 만화를 그리기 시작한 것 같다.

-작품 속 주인공들은 가난한 주인공 아니면 고아들이어서 한때는 독자들로부터 고아 출신이 아니냐는 오해를 받았다는 에피소드가 있던데, 이 화백의 어린 시절 경험을 살린 작품들인지 궁금하다.
어린 시절, 전쟁 직후여서 고아들이 많았고, 고아원도 가까운 곳에 여러 곳 있었다.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가까운 고아원에 자주 놀러가서 그곳의 아이들과 어울리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고아들의 모습들도 가까이서 보게 되었고, 그런 것들이 작품 속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나게 되었다.

-골프레슨 만화를 쓰게 된 계기가 있었나?
시작이 좀 떨떠름했는데, 1990년 『스포츠조선』이 창간하면서 골프레슨 만화에 대해 그려 달라고 했다. 내가 무슨 골프레슨을 하느냐고 하니, 자료가 다 있으니까 그걸 만화로 만들기만 하면 된다고 해서 그리기 시작했다. 자료를 50회 분량쯤 주어서 매일 연재를 했는데 그 다음부터는 자료가 없다는 거다. 그래서 내가 자료를 찾고 연구를 해서 계속 그려 나갔다.

-과거와 비교해 지금도 청소년들에게 만화가 유해하다는 상황은 어느 정도 여전하다. 어떤가?
작품에 따라서 다른 문제이지만, 그래도 지금 부모들은 그때 당시 만화를 읽지 않고 자란 세대는 거의 없다고 생각한다. 요즘은 부모들이 많이 이해하고 그래서 달라졌다. 사회 전반적으로, 그리고 정부에서도 콘텐츠 측면에서 많이 육성해 주려고 하는 게 사실이다. 옛날에 비하면 격세지감이다. 참 좋은 시절 만났다는 생각에 요즘 후배들이 부럽기까지 하다.

-팬들과 만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작품을 앞으로도 계속해서 잊혀지지 않는 만화가로 남고 싶지만, 과연 그 꿈이 이루어질지는 모르겠다. 컴퓨터로 만화를 그린 지 10년이 넘었는데, 기회가 닿는다면 인터넷 만화도 그려보고 싶다. 끝으로, 만화에 대한 애정을 계속 가져달라고 부탁드리고 싶을 뿐이다.

서울문화투데이 김준현 기자 jhk@sctoda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