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 "투표 잘해야죠" 박근형 연출가의 담담한 목소리
[기자의 눈] "투표 잘해야죠" 박근형 연출가의 담담한 목소리
  • 임동현 기자
  • 승인 2017.02.09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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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단체장들 "'문체부 지시' 따라야했다" 인정, 사실이 된 '검열'

"투표를 잘해야죠. 투표를 잘했다면, 개표가 공정했다면 이런 일은 없었겠죠. 불이익을 안 받으려면 주권을 잘 행사해야한다고 봐요".

지난 7일 남산예술센터 드라마센터에서 열린 '2017 시즌 프로그램' 기자간담회장. 오는 5월 <모든 군인은 불쌍하다> 재공연을 하게 된 박근형 연출가는 이 말을 담담하게 전했다.

▲ 박근형 연출가 (사진제공=서울문화재단)

바로 이날 오전, 김해숙 국립국악원장은 기자간담회에서 지난 2015년 박근형 연출가가 참여한 '소월산천' 공연 취소 사태에 대해 "문화체육관광부 소속기관이기에 (공연 취소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면서 '블랙리스트 검열'이 있었음을 인정했다.

질의응답을 통해 이 사실을 들은 박 연출가의 표정과 목소리는 그저 담담했다. 다 알고 있는 이야기라는 눈치였다.

박근혜 정부의 '검열 논란'을 이야기하자면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박근형 연출가다. 2013년 국립극단에서 공연한 <개구리>에서 박정희-박근혜 부녀를 풍자한 내용을 선보인 이후부터 그의 시련이 계속됐다.

그의 작품 <모든 군인은 불쌍하다>는 정부의 창작산실 우수작품제작지원 선정 과정에서 갑자기 탈락했고 앙상블 시나위와 함께 만든 '소월산천'은 공연 2주 전 갑작스럽게 국립국악원으로부터 공연 취소 명령을 받았다. 그저 단순히 '연출자의 실력이 없어서'라고 단정짓기에는 기묘한 우연의 연속이었다.

얼마 전 광화문 천막극장에서 공연됐고 지난해 대학로에서 공연된 <검열 언어의 정치학:두 개의 국민>에서는 박근형 연출가가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부당한 압력을 받고 결국 다른 극단을 살리기 위해 스스로 선정을 포기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에 대해 국회의원들이 김종덕 당시 문체부 장관과 박명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을 추궁한 2015년 국정감사 속기록 내용을 배우들이 직접 연기하면서 모르는 척했던 이들이 사실 은연중에 검열을 시인했음을 밝히고 교묘한 질문으로 검열의 정당함을 주장하는 새누리당 의원들을 비판한다.

▲ 연극 <검열언어의 정치학> 출연진 일동 (사진 제공= 드림플레이)

검열, 그리고 블랙리스트. 이제 이것은 사실이 됐다. 지난달 박정자 한국연극인복지재단 이사장은 2015년 7월 연극인 일자리 지원사업 최종심사를 앞두고 문체부로부터 '특정 단체에 대한 자격 없음 통지'를 받고 확인 절차 없이 심사 후 탈락시킨 것에 대해 사과했고 이번에 김해숙 원장도 공연 취소에 문체부의 지시가 있었음을 자인했다. 더 이상 검열과 블랙리스트는 '의혹'이 아니다.

예술인이 정치에 휘말리고 정치 논리에 따라 좌지우지되는 이 상황을 만든 이들이 과연 누구일까? '지원'을 볼모로 무조건 정부 방침에 복종하도록 만든 이들이 과연 누구일까? 이들이 아직도 문화계를 농락하는 현실에서 과연 '예술인들이 왜 정치 이야기를 하나?'라는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이날 남산예술센터가 공개한 10편의 프로그램 대부분은 한국 사회의 문제를 날카롭게 비판하는 내용의 극으로 구성됐다. 프로그램이 제대로 진행될 수 있을지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올 만 하다. 그러나 이 걱정을 받은 주철환 서울문화재단 대표의 말은 이것이었다. "전 낙관주의자입니다. 잘 될 겁니다".

그의 낙관론이 현실이 되려면, 아니 그의 낙관론이 이 대한민국 전체를 아우르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박근형 연출가의 말이 답이 될 수 있을까?

허나 지금 이름이 오르내리는 주자들 중 문화에 대한 명확한 비전을 제시한 이들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여전히 숨어있는 우리 내부의 '보수성'이 정권이 바뀐다고 완전히 없어질 것이라고 보여지지도 않는다.

그래도 박근형 연출가의 말이 답이라고 생각해야겠다. 적어도 투표를 잘한다면 문화계가 완전히 정치에 농락당하고 예술인들이 고통을 받는 일이 줄어들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