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와 문학의 순기능(2)
윤동주와 문학의 순기능(2)
  • 김우종(전 덕성여대교수·문학평론가)
  • 승인 2009.08.27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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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尹東柱의 십자가와 휴머니즘

여기서 순기능은 한자어로 順機能 또는 純機能 두 가지를 다 써도 좋다.

順機能이란 본래의 목적에 잘 순종하는 기능이다. 문학은 처음부터 어느 누가 목적을 정해 놓은 바는 없지만 고려가요인 <청산별곡>이나 월명사의 향가 <제망매가>나 황진이의 시조 <청산리 벽계수>나 끓는 쇳물 속에 던져진 아이가 운다는 에밀레종의 전설이나 남원땅에서 변학도에게 맞아 죽은 춘향의 설화처럼 그것은 우리들의 감정을 순화시키고 우리들에게 진실을 속삭이고 무지와 몽매에서 각성시키며 우리 모두의 행복을 위한 휴먼 메신저로 발달해 온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다.

그러므로 이에 맞는 문학은 順機能을 지닌 문학이다.

그리고 이런 문학은 순수하며 다른 목적이 불순하게 섞이지 않았기 때문에 순수할 순자의 純機能을 지녔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본래적 목적 또는 순수한 목적을 배반하는 사이비문학 또는 이단문학(異端文學)이 우리 문학 유산 속에는 적지 않다. 그것은 아주 더럽고 싸가지 없는 인간들이개인적 이익을 위해서 남을 해치는 문학이며 그러면서도 곱게 분바르고 연지 찍고 곤지 찍고 위장하며 문학 본래의 목적에 반역하고 있기 때문에 역기능(逆機能)의 문학이다.

2.尹東柱의 십자가와 휴머니즘

가장 올바른 목적과 기법과 자신의 행동으로 문학의 순기능을 보여 준 대표적인 문인은 윤
동주다. 그리고 가장 추악한 목적과 교활한 기법과 자신의 행동으로 문학의 역기능을 보여준 대표적인 문인은 서정주다.

이 두 사람은 두 살 차이 밖에 안 되는 20대의 젊은이로서 일제말기의 가장 암울하던 시기를 보냈었다. 그런데 두 사람은 전연 상반되는 길을 걸어 갔다. 윤동주는 우리 민족과 더 나가서 온 인류를 죽음의 고통으로부터 구하기 위해 문학을 하고 자신을 제단 위에 바친 사람이며,이와 반대로 서정주는 자기만의 안일를 위해서 온 민족을 죽음의 제단 위로 내 모는 살인 도구로 써 먹은 사람이다.

순기능의 문학은 사회성 역사성을 떠나서 보더라도 우리들의 일상적 개인적인 삶에 대하여 항상 잔잔한 호숫가의 물결처럼 소리없이 행복을 가져다 준다. 좋은 음악과 미술과 영화나
연극등이 그렇듯이 문학은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 그 예술적 기능을 통해서 우리들의 삶을
좀더 풍요롭게 해 주고 위안을 주고 삶의 기쁨을 조금씩 더해 준다. 마치 고향처럼 또는
행복한 가정 속의 삶처럼.

그런데 그 기능이 좀더 힘을 지니고 확충 되면 온 민족을 억압으로부터 해방시키고 온 인
류를 구원하는 사회적 역사적 큰 기능으로 발전한다. 윤동주의 문학은 그런 기능을 발휘한
대표적인 문학이다. 그는 우리민족이 가장 절망적이었던 일제 말기에 그 고통을 혼자서라도 짊어지고 가겠다는 사명시를 남기고 그 길을 따라 감으로써 죽음을 마지했다.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이 시 <십자가>는 연희 전문시절인 1941년 5월31에 탈고되었으며, 그로부터 약 반년 후인 12월 8일에 일제는 마침내 영국과 미국을 향해서 선전포고를 하며 진주만을 기습 공격했다. 한국 다음에 만주를 삼키고 다시 난징 대학살을 저지르며 중국 전역을 피로 물들이던 그들은 그 침략전쟁을 아시아 태평양 전역으로 확대해 나가기 시작했다.

37년 12월 17일부터 40일간 계속된 30만 민간인과 포로들에 대한 난징 대학살의 참극은 이에 직접 참가했던 일본인의 수기 <미나고로시 모노가다리(皆殺 物語)>에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일본은 우리 젊은이들로 하여금 이런 인류 학살의 무대에 동원되도록 몰아친 것이다.

태평양전쟁 발발 반년 전에 이 시가 쓰인 것을 보면 윤동주는 이미 이같은 비극의 절정을 예감하고 사명시(使命詩)로서 <십자가>를 쓴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