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정의 발레인사이트]희망의 다른 이름 -불새(The Fire Bird)
[김순정의 발레인사이트]희망의 다른 이름 -불새(The Fire Bird)
  • 김순정 성신여대 교수/한국예술교육학회장
  • 승인 2017.02.16 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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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순정 성신여대 교수/한국예술교육학회장

붉은 닭의 해가 시작되어 어느덧 입춘과 대보름도 지났다. 탄핵, 문화계 블랙리스트 등 우울한 상황과 뉴스들이 이어지다가 전준혁이 로열발레단에 입단하게 되었다는 기쁜 소식을 들었다. 로열발레단에는 재일교포 발레리나 최유희가 한국인 최초로 2003년 입단하여 여성 제1 솔리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최고의 무대에서 활약할 한국인 무용수를 보며 떠오른 작품이 있었다. 올해의 상징인 닭은 날개가 있음에도 지상에서만 생활한다. 반면 발레무용수는 날개가 없으면서도 언제나 새처럼 날아오르는 희망을 품고 노력하는 아름답고도 모순적인 존재다. 

100여 년 전 파리 오페라극장에서 초연된 발레 <불새>의 이미지가 머릿속을 헤집고 들어온다. 사전에 의하면 불새는 슬라브 민담에 나오는 빛나는 새로, 잡는 사람에게 축복과 파멸을 모두 가져다준다. 그렇기에 불새는 제 역할을 다한 후에 머무르지 않고 반드시 떠나야만 한다.

작품에 등장하는 불새 역시 악마를 쫒아버리고 왕자와 공주를 재회하게 하며 마법에 걸린 이들을 다시 인간으로 돌아오게 하는 등 많은 이에게 행복을 나누어주고 인간세상을 떠나 훌쩍 어디론가 날아가 버리는 신비로운 존재다. 발레 초연이 성공하는 예는 극히 드문데 <불새>는 예외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한국에서는 아직껏 포킨의 <불새>가 공연된 적은 없다.

발레륏스에 의해 1910년 6월 25일 탄생한 불새의 이미지는 고전발레가 보여주곤 하는 의인화한 새가 아니었다. 그야말로 야성이 살아 있는 날 것,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은 자연의 존재를 실감나게 보여주고 있어 지금도 관객을 불편하게 하는 경우가 많다.

이반 왕자와 아름다운 공주, 마법사 카스체이를 피해 황금사과를 주우며 밤에만 자유로울 수 있는 길고 흰 옷을 입은 처녀들 그리고 갑자기 나타난 신비로운 불새. 불새는 할 일을 다하고는 빠른 회전의 춤을 추어 사람들에게 행복을 나누어 준 후 커다란 날개를 치며 어디론가 날아 가버린다. 축복 속에 파멸의 원인이 깃들기 전에 서둘러 가버리는 현인과 같이 말이다. 

▲ 불새(1911,파리)미하일 포킨-이반왕자 역, 불새역-타마라 카르사비나

당시 스트라빈스키의 비범한 재능을 단번에 간파한 디아길레프의 작곡 의뢰에 의해 <불새>는 탄생되었다. 원시주의와 민족주의적 낭만주의 음악경향을 지닌 스트라빈스키는 디아길레프의 작곡제안을 받고는 바로 수락을 했다. 그 이유는 포킨의 새로운 안무가 주는 예술적 도취감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다. 발레작품을 만드는 내내 음악과 발레의 두 천재는 모든 것을 의논해가며 이어갔다고 한다.

반면 러시아 황실발레음악에 익숙해있던 무용수들은 스트라빈스키가 만든 리듬의 어려움에 적잖이 당황하였고 안무가 포킨의 낯선 조형적 움직임에도 거부감을 느꼈다. 그리고 불새 역을 맡은 발레리나만이 토슈즈를 신고 나머지 배역들은 맨발이거나 부츠를 신고 나온다. 음악의 난해함으로 불새 배역을 거절한 유명 발레리나 안나 파블로바 대신에 무명이었던 타마라 카르사비나는 포킨과 함께 초연무대에 올라 성공적으로 배역을 해냄으로써 일약 스타덤에 오른다. 

타마라 카르사비나(1885-1978)는 니진스키와의 파트너로서, 포킨의 연인으로서, 당대 최고의 무용가로 명성을 날렸다. 재미있는 일화도 있다. 1912년 생인 전설적인 피겨스케이팅 스타 소냐 헤니는 공식경기에서 한 번도 엉덩방아를 찧은 적이 없는 완벽한 선수로 기억되는데, 어린 시절 카르사비나를 개인 코치로 두고 있었다고 한다.

거침없는 표현력과 기량을 지닌 소냐 헤니의 1945년 영상을 보면 가히 놀랄만한 하고, 그것을 통해 마린스키발레단의 프리마 발레리나였던 카르사비나의 역량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한국의 피겨스타 김연아도 한때 캐나다의 전설적 발레리나 이블린 하트에게 코치를 받았다는 사실도 생각해보자. 발레는 모든 움직임에 안정감과 미감을 선사해 주는 기본이 아닐까.

▲ 카르사비나-불새역,볼름-이반왕자역

카르사비나와 포킨의 사진을 보면 고전주의 발레와 사뭇 다른 포즈와 분위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수직적 이미지가 아니라 수평적인 몸의 놓임은 일견 동양적인 분위기를 풍기며 기존의 미학과는 다른 디아길레프 사단이 이루고자 하는 융합예술 나름의 지향점을 보여주고 있다. 

이렇듯 많은 것이 새로웠던 <불새>의 초연 성공은 스트라빈스키, 포킨 외에도 의상의 골로빈, 박스트, 지휘자 피에르네를 결집시킨 디아길레프의 예지력 있는 기획 덕분이라고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