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ople&people]광화문광장에 철공소 차린 환경미술가 최병수
[People&people]광화문광장에 철공소 차린 환경미술가 최병수
  • 조문호 기자/사진가
  • 승인 2017.02.20 1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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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열이를 살려내라" 이한열 첫 대형 걸개그림 제작 전시로 세상에 알려져

촛불의 전진기지 ‘광화문광장’에 무허가 철공소가 들어섰다. 박근혜 잡을 무기 공장이 아니라 촛불시민들에게 예술적 결기를 다지게 하는 환경미술가 최병수의 현장 작업실이다. 이제 광화문광장은 부패 정치를 예술로 치유하는 블랙리스트 작가들의 창작공간이 된 것이다.

▲'광화문광장'에서 조형물 작업을 위해 용접하고 있는 최병수씨

최병수는 이한열 열사의 대형걸개 그림으로 잘 알려진 작가이다. 그는 작가이기 이전에 안 해 본 일이 없는 잡기에 능한 사람이다. 노동판의 잡부에서 선반공, 용접공, 보일러공, 목수 등 다양한 직업으로 기능을 닦아왔는데, 그 장인적인 기질을 무기로 그림, 판화, 조각, 설치미술 등 다양한 예술 영역으로 확장시켜, 사회 실천적 창작활동에 두각을 드러내었다.

그가 작가의 길을 걷게 된 동기도 재미있다. 학력이라고는 중학교 2학년 중퇴가 전부다. 우연히 미술과 연결된 것은 80년대 중반에 있었던 신촌 벽화사건이었다. 홍대생들이 그리는 진달래꽃 벽화작업(상생도)에 쓸 작업받침대 짜러 갔다가 북한의 국화인 진달래 꽃 작업을 돕게 된 것이 이적성 표현물 작성의 죄목으로 경찰에 붙들려 간 것이다.

그는 목수로 참여했지만, 경찰이 그의 직업을 화가로 붙여주어 또 하나의 새로운 직업을 갖게 된 것이다. 좌우지간 그의 예술적 재능은 타고 난 것 같았다.

▲ 자신의 촛불 조형물을 프레임으로 찍은 최병수씨

어릴 때부터 항상 칼을 갖고 다니며 무엇이던 만드는데 재미를 가졌고, 반항아적인 기질 또한 강했다고 한다. 학교 선생 뿐 아니라 그 누구의 말도 사리에 맞지 않으면 듣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니 학교에서는 물론 집안에서도 내침을 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는 옳다고 믿으면 자기 몸까지 던지는 정직하고 강한 사람으로, 직설적인 다혈질에다 단순하기까지 했다. 심지어 목공소나 철공소의 기능공으로 일 할 때는 자신의 창의성이 주인의 장사 속에 밀리면 그 자리에서 그만 두었다고 한다.

▲광화문광장에 세워진 최병수씨의 조형물

이한열 열사가 생전에 활동했던 동아리 ‘만화사랑’과의 인연으로 발표한 그의 첫 대형걸개그림 “한열이를 살려내라”로 세상에 알려졌는데, '노동해방도' '장산곶매' 등으로 진보 운동 판에서도 유명세를 떨쳤다. 그러나 그런 작가의 유명세나 재능보다 초지일관 지켜온 예술의 사회 실천적 헌신이 그에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최병수 씨는 작가였지만, 환경운동가로 더 유명하다.

해창 갯벌이나 북한산, 고봉산, 새만금, 사패산, 강정마을, 평택 대추리, 팽목항에서 부터 노동현장까지 생명평화의 외침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달려갔다. 지구온난화, 빈곤, 전쟁 등 생명과 평화가 파괴되는 곳에는 늘 그가 있었다.

▲ 광화문 광장 잔디밭으로 옮겨놓은 최병수씨의 조형물

나약한 생명들이 짓밟히는 현실 폭로성 작품 만드는 것만으로 모자라, 작품을 가지고 현장에 달려가 싸워야 했다. 전쟁터의 대포대신 예술적 조형물로 생명파괴자들의 정신을 깨우치는 투사로 살아 온 셈이다.

반문명과 싸워 온 환경운동의 뿌리에는 삶의 근거가 되는 노동이 어김없이 자리 잡고 있었다. 사람이 먼저 라는 근본을 외면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환경운동과 노동운동을 오래 동안 해오며 동지들의 인간적 배신에 실의를 느낀 적도 많았다고 한다. 모순과 불의를 참지 못하는 그의 성격이 더 힘들게 했을 것으로 본다.

그렇게 돈 안 되는 짓거리만 해왔으니 사는 꼴은 보나마나다. 13년 전에는 위암 3기 판정을 받아 위를 3분의2나 잘라 내면서도 하던 일을 멈추지 않은 악바리였다. 다행스럽게도 5년 전 교사를 아내로 맞으면서 입에 풀칠하는 데는 지장 없게 되었지만, 대형 조형물을 만드는 작업비를 충당하기는 어림없었다.

▲ 자신이 만든 블랙리스트 면도날을 얼굴에 대는 최병수씨

그런데, 세월호와 연관되어 박근혜 국정농단이 터지면서 또 한 번 사단이 나고 말았다. 블랙리스트 사건까지 겹치면서, 지난 12월 중순경 광화문광장으로 공구들을 싸들고 올라와 철공소를 차려버린 것이다. 여수 배개도 촌사람이 서울 중앙에 있는 광화문광장에 텐트 집이라도 마련하였으니, 출세했다면 출세한 셈이다.

허구한 날 여수에서 실어 온 철재들을 잘라 붙여 광장 곳곳에 조형물을 세우므로 자연스럽게 광장은 야외 조각 미술관이 되어버렸다. 블랙리스트 예술가들의 상징처럼 돼 버린 도루코 면도날도 그가 만든 작품이다.

▲광화문광장에 세워진 최병수씨의 조형물. 하늘에 별이된 세월호 아이들을 상징하는 조형물.

탄핵, 퇴진, 민주, 꽃 등, 낱말의 조형미를 철판으로 잘라 광화문 공중에 우뚝 세웠는데, 다양한 글자체와 갖가지 형상물의 조화는 황량하기 그지없는 광장에 숨통을 턴 것이다. 물론, 캠핑촌예술행동위원회, 비주류예술가, ‘광화문미술행동’에서 활동하는 많은 작가들의 예술행동이 광화문광장을 예술광장으로 변신시켰지만, 설치미술을 이용해 역동감 있는 현장분위기로 이끈 최병수의 도드라진 예술행동이 일조했다는 것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젠 숙소로 사용하던 텐트마저 틈틈이 가져 온 각종 공구들로 가득 차버려, 주변에 있는 찜질방으로 전전하며 노숙 아닌 노숙자신세로 전락하였다. 아직도 그가 광장에 조형물을 얼마나 더 만들지는 아무도 모른다. 아마 박근혜가 물러나는 날까지 이어질 것 같다.

▲ 최병수 씨가 상품으로 개발한 블랙리스트 악세서리

설치작품 제작비를 마련하려 시작했다는 그가 만든 악세사리 용품도 잘 팔릴 것 같았다. 블랙리스트라는 글귀가 새겨진 면도날 목걸이에서부터 뺏지, 그리고 꿈을 조형화한 열쇠고리 등, 매사에 본질을 꿰뚫어 보는 그의 통찰력은 소비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장사 속에서도 그대로 드러나고 있었다.

촛불광장에서 예술광장으로 이끈 현장예술가들의 피와 땀이 베인 힘겨운 투쟁사는 새로운 역사의 현장으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박근혜는 하루빨리 퇴진하여 모든 작가들이 제자리에서 정상적인 창작활동을 할 수 있도록 하라. 더 이상 가난한 예술가들을 힘들게 하지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