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중강의 뮤지컬레터] 창극 ‘나운규, 아리랑을 보고, 춘사 나운규(1902~1937)에게
[윤중강의 뮤지컬레터] 창극 ‘나운규, 아리랑을 보고, 춘사 나운규(1902~1937)에게
  • 윤중강 평론가/ 연출가
  • 승인 2017.03.09 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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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중강 평론가/ 연출가

국립민속국악원의 창극 ‘나운규, 아리랑’을 보았습니다.(2. 23~25. 국립국악원 예악당) 우선 말씀드려야겠습니다. 공연의 주인공이, 나운규입니다. 그렇지만 춘사(春史) 나운규는 아닙니다. 당신과 동명의 창극배우를 주인공으로 내세웁니다. 이른바, ‘평행이론’과 ‘도플갱어’를 의식한 작품입니다. 

영화 ‘아리랑’이 현재 남아있지 않은 상태에서, 창극을 통해서 ‘아리랑’으로 보여준다는 것에 의미를 둘 수 있습니다. 창극의 변사를 맡은 나운규(김대일, 정민영)를 통해서. 작품(인물)의 시공이 오고 갑니다. 분장실과 창극무대를 오가면서 펼쳐지는 방식이지요. 분장실에선 나운규를 통해서, 현실과 ‘예술적 고뇌’를, 무대장면에선 ‘아리랑’을 통해서, 역사와 ‘시대적 울분’을 담아내려 합니다.

이런 좋은 아이디어에 출발을 했다지만, 실제 이분법적인 도식이 작품의 깊이있게 침투하진 못했습니다. 아이디어는 있되, 프로세스는 부족하고, 배우들은 존재하되, 캐릭터가 모두 피상적입니다. 

이런 한계를 극복이라도 하듯이, 연출(정갑균)은 무척 친절하고 많이 채우려했지만, 그게 오히려 보는 사람의 마음이 개입할 것을 오히려 적게 만들었습니다. 일제강점기로 시간이 돌아갈 땐, 어김없이 재깍이는 시계소리와 거꾸로 도는 시계바늘을 보게 되는데, 무대 위의 바튼에 매달린 시계가 내려왔다 올라가는 것을 반복합니다. 이렇게 너무도 ‘친절한’ 방식이 극에 몰입하는데 어떤 도움이 되었을까요? 

창극배우의 나운규의 분장실도 마찬가집니다. 무대 하수 쪽 계단을 설치해 놓았는데, 나운규와 관련 인물들이 무대 상수에서 등장을 해서 무대 중앙을 거쳐서 무대 2층까지 올라가는  동선(動線)은, 암만 생각해도 효율적이라는 생각되진 않았습니다. 

대본(최현묵)이 복잡하지만, 아쉽게도 깊진 못했습니다. 이 작품은 나운규를 통해, 예술가의 고뇌와 슬픔, 희망과 좌절을 보여주려합니다. 이렇게 접근하는 작품은 그간 너무도 많습니다. 또한 이런 것을 잘 보여주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아주 중요한 것은, 이걸 왜 ‘나운규’라는 인물을 통해서 보여주는 것에 대한 설득력이 있어야 합니다. 내 눈에 비친 ‘나운규, 아리랑’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나운규란 인물을, 연애와 가족애 속에 놓고 있습니다. 이것, 좋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어떻게 ‘시대’와 ‘예술’에 연결시키느냐가 관건일겁니다. 이런 것과 관련해서 설명은 있어도, 감흥은 많이 부족합니다. 

이 작품은 시종일관 ‘설명’해주려고만 합니다. 따라서 공연 속의 상황을 ‘현실’처럼 느끼기가 무척 어렵습니다. 무대도, 대사도, 음악도, 뭔가 비워있는 곳이 있어야 거기에 관객들이 마음을 채울 수 있는데, 너무도 채우려고 듭니다. 

창극‘ 나운규, 아리랑’을 보면서, 당신(나운규)에게 참 미안했습니다. 극 속의 이 창극 속의 주인공은 당신이 아니겠지만, 당신의 이름과 당신의 영화 작품을 가져온 창극입니다. 그렇다면 이것들을 통해서, ‘아리랑’과 ‘나운규’의 중요성(의미)을 밝혀내야 했을 겁니다. 그렇지 못했습니다. 

영화 ‘아리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사’와 ‘시대’, ‘민중’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전재한 아리랑에선, 이런 것들이 거의 의미를 잃고 있습니다. 과연 이런 것을 부각시키지 않으려면, 왜 ‘나운규’와 ‘아리랑’을 가져왔을까요? 작가에게 꼭 질문하고 싶습니다. 

움악(황호준)도 작곡가의 명성에 비하면 아쉽습니다. 가야금, 대금, 해금, 피리 등 악기의 솔로로 연주할 때의 감동은 전달됩니다.  황호준 작곡가의 음악적 설계도와 관현악법, 부분적인 기악적 탁월함을 인정하지만, 창극의 본령(本領)인 ‘노래’가 아쉽습니다. ‘국악가요’를 연결한 음악극과 같습니다. 판소리의 어떤 특성을 어떻게 살려냈는가? 작곡가에게 묻습니다. 

창극 ‘아리랑’이 동명이인, 평행이론, 도플갱어라는 ‘깊지 못한’ 장치는 있었으되, 정작 아리랑의 깊은 의미를 깨달게 하지 못한 것 아닐까요? 복판으론 가지 못하고 ‘변죽만 울린’ 형상이라면 가혹할까요? 이 작품은, 나운규의 동명이인을 내세우기 이전에, ‘나운규’라는 인물에 대해 더 깊은 탐구가 필요했습니다. ‘영화’ 아리랑을 ‘창극’으로 만드는 과정을 통해서, ‘아리랑’이 갖는 ‘시대적 이해’와 ‘현재적 의미’가 무척 아쉽습니다.

창극 ‘나운규, 아리랑’은, 춘사 나운규에게 다소 미안한 작품입니다. 나운규가 이 작품을 보면 뭐라 했을까요? 당신(나운규)의 얘기가 궁금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