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화내빈, 예술의전당 교향악축제 정체성을 잃었다
외화내빈, 예술의전당 교향악축제 정체성을 잃었다
  • 탁계석 평론가
  • 승인 2017.03.21 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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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작곡가의 창작 곡 딸랑 3곡 푸대접 여전

탁계석 평론가의 SCO 뉴 문화정책 1번지를 가다 (1)

오는 4월 1일부터 23일까지 교향악축제가 펼쳐진다. 올해로 29회째이고 내년이면 30돌을 맞는다. 두말할 것도 없이 교향악축제는 예술의전당이 기획한 대표적인 성공 프로젝트다. 한국 클래식의 성장 동력을 키워온 핵심 역량이란 평가도 있다. 지역 오케스트라가 중앙 무대에서 존재감을 드러냈고, 능력을 평가받기 위해 단원과 지휘자가 혼연일체가 되어 땀을 흘려온 결실이어서 우리 오케스트라 발전에 큰 보탬이 되었다.

때문에 전국 오케스트라 실력이 평준화되어 가고 있고, 단원 처우 개선도 이뤄졌다. 무엇보다 음악회장 접근이 용이하지 않던 자치 단체장과 지도층 인사들이 향우회까지 버스 동원을 한 풍속은 지구촌 어디에도 없는 한국 오케스트라만의 문화다. 애초부터 이 축제가 음악인과 오케스트라만의 축제가 아닌 것이다.

▲ 2017 예술의전당 교향악축제 (사진제공=예술의전당)

이처럼 참여 관객의 특성을 음악과 사회적 관계로 풀어갔다면 분명 창작이 중요한 포인트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의지를 가지고 관철시켰더라면 아마 지금쯤은 몇 곡의 명곡이라도 탄생하지 않았을까 싶다. 만시지탄 내년 30주년을 앞둔 시점에서 바라는 것은 축제가 ‘우리 얼과 혼’을 담는 큰그릇이 되어 달라는 것이다. 축제의 중심에 ‘대한한국’을 두고 세계와 네트워크하는 열린 시각을 주문하는 것이다.

바야흐로 우리 아티스트들의 연주력이 눈부시게 성장했다. 세계 콩쿠르 석권이 이젠 뉴스가 되지 않을 정도로 빈번하다. 때문에 이제부터는‘어떻게 연주하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연주하느냐? 로 바뀌어야 한다. 유럽도 자기네들 전통에서 벗어나 새로운 것을 만들고 끌어 들이기 위해 오리엔탈 문화에 손을 내밀고 있지 않은가. 세상은 그야말로 봄이 왔는데 교향악 축제가 외투를 입고 있다면 우물 안 개구리 모습과 무엇이 다르랴?

우리 것을 가치 있게 만드는 노력이 공공의 제 1의 책무가 되어야

사실, 지휘자 입장에선 짧은 임기 동안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수많은 명곡 레퍼토리를 해보고 싶을 것이다. 또 오케스트라 역시 빛나는 역량을 위해서라 명작을 하는 것이 돋보일 수 있다.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 것을 병행하면서, 우리 것을 개발해야 하는 책무 또한 가볍지 않다. 적어도 문화 국가로서의 최소한의 자존심과 체면을 세워야 하지 않겠는가.

엊그제 한 방송에선 네팔에 음악을 심어주는 스토리가 방송을 탔다. 원조받던 나라에서 원조하는 나라가 비단 경제나 산업에서 뿐만 아니라 문화에 이어질 정도로 수위가 오른 것이다. 동호인 직장 오케스트라가 베토벤 교향곡 전곡을 연주하고 , 난해한 쇼스타코비치 교향곡까지 소화할 정도가 되었으니 참 많이 변했다.

또한 한류의 영향으로 무용, 연극, 미술 등 장르 가리지 않고 유럽 등 현지 극장에서 티켓이 매진되거나 극찬받는 시례도 늘고 있다. 그런데 교향악축제가 시대 변화를 얼마나 수용하고 있는가. 이제는 우리 작곡가, 우리 작품을 위해 시간과 공간과 열정을 할애해야 한다. 매년 되풀이 되는 레퍼토리의 식상감에서 벗어나 창작의 우수성을 드러내고 신선한 생태계를 조성해야 사회의 창의성도 살아나지 않겠는가.

때문에 교향악 축제는 4월의 단순한 연중행사가 아니다. 새로운 작품을 통해 봄의 환희를 소생시키는 봄의 제전을 만들어야 한다. 세상을 뒤엎고 전율하는 생명의 꿈틀거림을 토해내야 한다. 왜 우리는 창작에서 그런 기운을 뽑아내지 못하는가. 세계 명곡도 다 좋지만, 우리 것도 함께 끌어 올리는 노력을 게을리 한다면 공공성 오케스트라의 책무 방기(放棄)다.

▲ 예술의전당에서 아리랑 합창을 하는 오케스트라

이제 우리 문화는 수입구조에서 수출로 탈바꿈해야 할 때가왔다. 아티스트의 해외 진출이 늘고 이미 오페라단에 주역으로, 합창단원으로, 유명 오케스트라 단원과 수석을 하는 등 일자리가 만들어지고 있다. 일자리창출을 위해서라도 우리 작품을 시장에 내놓는 전략이 필요하다.

돌이켜 보면 교향악 축제가 처음 열리던 때를 ‘전국 체전’에 비유한다면 지금은 ‘ 국제경기’를 펼칠 때 가 아닌가 . 여느 세계의 축제를 보아도 개성과 주제의식을 가진 것이 축제의 기본인데 우리 교향악 축제에 외국인이 몇이나 오는가. 집안잔치라면 혁신이 필요하다.

거꾸로 미국의 일부 대학에선 한국 음악을 가르치는 곳도 생겨났다, 가야금, 해금 등 한국 악기로 현대음악을 만드는 세계의 작곡가들도 늘고 있다. 우리 국악 연주가들과 긴밀하게 교류하고 있는 것만 보아도 격세지감이 아닌가.

지난해 필자는 야닉(Yannick Nezet-Seguin) 지휘자의 로테르담필 연주를 들을 수 있었다. 이들은 모든 곡을 단 한번 연습하고 무대에 오른다고 했다. 창작도 예외가 아니었다. 물론 역사가 오래이니까 보유한 레퍼토리가 많은 탓도 있겠지만, 유럽 정상급 오케스트라들이 대부분 이런 규칙을 따르고 있다.

그런데 한국에선 축제를 위해 수 십 번, 오랜 연습으로 젖 먹던 힘까지 다한다면 이건 분명 후진성이다. 이런 관행과 습관이 오케스트라의 낙후성을 유지하는 원인이 될 수도 있다. 그러니까 교향악 축제에만 열정을 쏟고 나머지 연주는 지휘자가 화를 낼 정도로 단원들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축제가 걸림돌이 될 수 있다.

때문에 교향악축제가 컨셉을 바꾸지 않으면 더 발전적이기 힘들다는 한계다. 사실 한국 오케스트라처럼 방만한 운영 구조를 가진 악단은 세계에 없다. 노조가 빗장을 치고, 공무원의 안일과 비전문성에 발목이 걸려 낙제점인 단체들이 적지 않다. 관주도형이기 때문이다.

이제 점점 외국 지휘자들이 늘고 있다. 관객 입맛이 고급화되면서 한국 지휘자의 신인도가 상대적으로 낮아졌다. 오케스트라 좌표 설정에서 창작이 핵심을 잡지 않는다면 오리지널 오케스트라 수입에 밀릴 것이다.

우리가 입만 열면 세계적인 오케스트라 만든다는 허구나 환상을 말하기에 앞서 우리의 작품을 무기로 삼는 것이 더 중요할 수 있다. 그런데 올해 축제에서 창작은 고작 3곡이라니 정체성 위기라 할만하지 않은가.

자기 나라 것에 자신감 없어 하는 건 콤플렉스

필자는 몇 해 전 부산의 한 민간오케스트라에서 중국 작곡가 리체이(Lee Che-Yi) 에게 위촉한 자갈치 시장을 배경으로 부산 풍물을 담은 ‘부산 환상곡- Busan Fantasy’이란 곡을 들었다, 작품성이 좋은 곡이었다. 작곡가가 6 개월을 부산에 체류하면서 만든 작품이라고 했다. 지휘자가 지역 작곡가 몇 분에게 위촉했지만 작품이 나오지 않자 중국 작곡가에게 부탁했다는 것.

이 작품을 헝가리 등의 무대에도 올렸는데 제목은 ‘부산’인데 중국 작곡가라?, 기분이 묘했다. 그러나 이를 통해 세계의 작곡가들이 한국에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될 것이란 생각에 다소 위안이 되었다.

▲ 스페인에서 한국음악을 전파하는 현지의 밀레니엄 합창단. 한복을 입은 모습이 이채롭다

창작은 끊임없이 뛸 수 있는 운동장이 필요하다. 백번 넘어지다가 한번을 이겨서 명작을 탄생시키는 것이 창작의 생리다. 지원도 부족하고, 운동장도 내주지 않으면서 모차르트처럼 하룻밤사이에 명작 탄생을 요구하는 것은 곤란하다. 사실 우리나라 오케스트라가, 우리나라 지휘자가, 우리나라 작곡가의 작품을, 우리 관객에게 들려주는 것이 그토록 어색하고 이상한 일일까?

작곡가가 창작을 위해 불면의 밤을 지새우는데, 작품으론 생계비도 벌수 없는 척박한 환경에서 오케스트라가 곡을 연주하는 것이 공공 오케스트라가 하지 않으면 누가 한다는 말인가. 생존에 시달리는 민간오케스트라가 창작을 하기엔 쉽지 않다.

때문에 교향악축제가 작곡가의 작품을 연주하고 실험할 수 있도록 충분한 기회를 지속적으로 주어야 한다. 작곡가들 역시 당당하게 요구를 하고 권리를 찾아 나서야 한다.

명곡 따라 하기 풍토에서 연구 않는 게으름도 문제

물론 모든 게 극장이나 오케스트라의 책임만은 아니다. 그 일차적 책임은 창작계에도 있다. 창작 곡 트라우마를 겪은 상처와 경험이 잔존하고 있다. 사실 나라를 빼앗기고 비탄에 빠졌을 때, 우리 창작 기술력은 단층집을 지을 수준이 전부였다. 그게 가곡이었고, 그 가곡으로 울분을 달래고 가요와 함께 가슴을 달랬다. 감상적 서정주의가 형성되었다. 수준 높은 가곡이라 하여 독일 가곡, 프랑스 , 이태리 가곡을 열심히 전도했지만 일상 관객을 흡수하는 메뉴가 되진 못했다.

설상가상 우리가곡은 대학에서 다루지 않아 침몰하는 상황이다. 만약 일제하에서 우리가 고층 아파트를 올릴 수 있는 관현악법 기술이 있었더라면 우리도 드보르작이나 차이코프스키를 충분히 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탄생시킨 것은 안익태의 ‘코리아 환타지’가 대중에겐 유일하다.

때문에 3.1절이나 광복절에 ‘핀란디아’나 베르디의‘히브리 노예들의 합창’ 을 빌려 쓴다. 유관순 , 안중근, 윤봉길 의사들은 당시 이런 나라 이름도 듣지 못했을 터인데 후손들이 기념곡 하나 못 만들어 남의 나라 축가나 애가를 빌려 쓰다니, 문화로 불쌍한 경제대국이 코리아란 말인가. 이 부끄러움을 어찌 필설(筆舌)로 다하겠는가!

늦었지만 우리 민족과 향토를 소재로 세계 작품 만들어야

19세기 국민음악은 향토색 짙은 민족어법을 통해 국민과 소통하면서 자연스럽게 세계의 명곡 반열에 정착되었고 각 나라의 문화 자산이 되었다. 그 당당한 자긍심과 위상으로 세계의 오케스트라들은 어느 나라를 가던 자신들의 레퍼토리를 자랑한다.

그런데 수많은 개인 콩쿠르, 종합 우승, 공산권마저 사라진 오케스트라를 국가가 관리를 하면서도 우리에게 작품이 없다? 유통되는 관현악 명곡 하나가 없어 북한 작곡가 최성환의 아리랑을 빌려 써야 한다? 핵보유 못지않게 심각한 문제가 아닌가.

실수는 작곡계에도 있다. 단층집을 짓다 유학파가 생기면서 아방가르드 현대음악을 도입한 것 까지는 좋았다. 신개척지를 옮겨 놓고 교수가 되었고, 학력만능 교수 지배 사회에서 현장은 눌려 기를 펴지 못했다. 실험과 이론 음악이 지배했고, 그 지배력은 절대권력이었다. 현대음악 도입은 필요했지만 멜로디 좋아하는 백성들 심성에 안착하지 못하고 자기들만의 리그에 그쳤다.

창작으론 살 수 없으니 대학 강사라도 하려면 '추종 서약'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세월이 너무 길었고 독점적이었다. 때문에 그 후유증으로 창작과 결별하고 서양 명곡에 함몰되는 현상을 겪고 있는 것인다.

이처럼 창작을 수용하지 않는 갈등과 다양성을 잃은 음악의 흐름은 창작을 변방으로 밀려나게 했다. 누가 어떤 작곡을 하는지, 무슨 곡이 있는지 찾지 않는 무관심이었다. 씨를 뿌린 선대 엘리트 작곡가들이 책무에서 자유롭지 않은데 문제는 지금도 S 대를 비롯해 대학에선 그 관성을 강요하고 있다는 것이다.

세상은 변하고 또 변한다. 현명한 작곡가들이 생각을 바꾸었다. 현대음악 존재에 대해 새로운 시각과 해석을 내리면서 돌파구를 만들어 가고 새살이 돋아나고 있다. 한 예로 국악을 존중하면서 서양기법을 이용해 연주가, 청중을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음악어법이 개발되고 있다. 때문에 교향악축제가 그간의 갈등과 오해를 풀고 마인드 개선을 해달라는 것이다.

지난해 경기도립국악단은 악기 개량으로 서양 레퍼토리를 연주 하는 등 유럽 현지에서 각광받았다. 국립극장 역시 한 때는 뮤지컬 외도(外道)란 비판을 받았지만 정체성을 찾아 가장 극장다운 극장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노력한 만큼 작품도 나오기 시작했다. 관객 개발, 레퍼토리 시즌제로 창조 극장, 글로벌 시장개척을 하는 모범 사례로 보인다.

환골탈퇴 교향악 축제 창작 쿼트제 받아 들여야

때문에 내년이면 30주년을 맞는 교향악 축제가 달라져야 한다. 또 하나의 문제는 KBS 교향악단(Yoel Levi) , 서울시향(Thierry Fische)r, 부산시향(리신차오:지난해 사임), 대구시향(Julian Kovachev)이 모두 외국인 지휘자다. 우리 창작이 기(氣)를 펴기에 상황적으로 불리한 여건이다. 부지휘자를 활용해서라도 창작에 불을 지피는 운동이 일어나야 한다.

KBS 요엘 레비의 경우 창작을 암보로 지휘하는 등 오히려 우리 지휘자 보다 작품을 진지하게 대하면서 외국인 지휘자라서 안된다는 것이 기우(杞憂)일 수도 있지만 그러나 본령은 아닌 것이다. 오래 전에 이강숙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이 KBS 예술감독을 맡았을 때 그래도 열심히 KBS가 창작을 한 경험이 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창작 관현악 지원책으로 상주 작곡가 제도를 도입했다. 아르코 창작이나 국악, 양악 관현악콘서트도 펼친다. 그런데 예술에서 재현 보다 중요한 것이 창작인데 인건비와 경상비가 95%를 차지하는 게 우리 공공예술단체의 현실이다. 원천적으로 창작비가 빠져있으니 새 것을 할 수 없는 구조다.

따라서 새 정부는 새로운 시각에서 예술단체 운영의 합리적 효율성을 재고해야 한다. 왜 공공 오케스트라에 창작을 의무화해야 하는가? 이런 질문이 우문(愚問)인 날이 하루 속히 와야한다. 그 첫 단추는 교향악축제 하루에 한 작품씩이라도 올리는 것부터 출발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박인석 ( 대전 메시야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지휘자)

     ▲ 박인석 대전 메시야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지휘자

우리는 오직 한국창작곡만을 고집하며 오케스트라 연주회를 20년간 지속해온 유일무이한 창작 전문 오케스트라다. 창작으로 관객을 확보했고 우리 곡이 정말 청중과 소통하는 최고의 정서라는데 의심의 여지가 없다. 많은 창작 레퍼토리와 작곡가들과 협업을 통해 창작이 세계무대에서 각광받을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있다, 그러나 공공 오케스트라를 보면 우리 것을 이토록 홀대할 수 있는가 하는 자괴감이 든다.

현 정부의 문화융성 정책이 실패한 것도 현장과 소통하지 않고 비선실세와만 접촉했기 때문이다. 교향악축제는 우리 콘텐츠를 담는 그릇을 마련해야 한다. 과거 창작에 대한 고정관념 때문에 세상의 흐름을 잃는다면 넌센스다. ‘창작이 살아야 문화가 산다’는 목표로 우리는 계속 전진할 것이다.

최상화 (경기도립국악단 예술감독)

 

우리 국악은 현대음악적 요소를 많이 내포 하고 있다. 때문에 우리 음악에 관심을 갖는 외국인 작곡가들도 늘고 있다. 지난해 우리는 악기개량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그 가능성을 충분히 발견했고 베를린과 스톡홀름에서 놀랄 만큼 환대를 받았다. 올해를 원년으로 경기도에서 국악관현악 축제도 펼치면서 한국음악의 지평을 세계로 넓혀 갈 것이다. 정부의 지원이 뭘 할 것인가에 깊은 고찰이 필요하지 않을까, 이제 자신감을 가지고 한국이 문화로 우뚝서는 상황을 만들어가야 한다. 우리 전통의 소중한 가치를 국악과 양악이 만나면서 그 위상을 높여 갔으면 한다. .

이복남( 한국작곡가협회 이사장)

▲ 이복남 한국작곡가협회 이사장

내년이면 한국작곡가협회 40주년을 맞는다. 그간 해외 교류를 통해 우리 창작의 우수성을 충분히 확인했다. 현지 반응도 뜨거웠다. 단지 창작에 지원이 계속되고 있 긴하지만 턱없이 미미하다. 창작자의 자존감을 실현하기 위해선 작곡가들은 열심히 하고 있지만 협회의 독자적인 힘만으론 흐름을 쫒기엔 역부족이다, 기금신청에 의존할 것이 아니라 특별 지원책이 새 정부에선 마련되었으면 한다.

이영조( 작곡가)

▲ 이영조 작곡가

국내 음악계에는 허리에 해당하는 부분이 없다. 어깨, 가슴에서 허리 없이 엉덩이로 가는 것 같다. 즉, 바그너, 말러, 브루크너, 슈트라우스, 드뷔시, 라벨처럼 조성이 넓어지는, 중심 조성이 없어지는 시대의 음악이 없다는 뜻이다. 이 작품들을 알아야 우리가 20세기 작품을 이해하기 쉬운 것인데, 갑자기 쇤베르크, 윤이상 같은 현대음악이 작곡계의 주류가 되다 보니 대중에게는 가까이 둘 수 없는 음악이 된 것이다.

그래서 실험주의 작품보다는 조성과 비조성이 섞여있는 한국적인 작품을 만들고자 노력해 왔다. 오늘날 우리는 혼합주의, 융합의 시대에 살고 있다. 의식주 등 모든 부분에서 우리 것과 외국의 것이 혼재한다. 교향악축제가 이 갈라진 틈을 메우는 역할을 해주는 것이 축제를 위해서도 좋은 일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