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리뷰]존재의 순간을 응시하는 ‘한상진의 드로잉, 스침’전
[전시리뷰]존재의 순간을 응시하는 ‘한상진의 드로잉, 스침’전
  • 정영신 기자
  • 승인 2017.03.23 0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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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물로 그린 작가의 일상이 담겨있는 시린 풍경의 순환

먹을 입히고 또 입혀 거기에 쌓이는 깊은 여운을 주는 ‘한상진의 드로잉, 스침’전이 인사동 나무화랑에서 열리고 있다. 겨울에 그린 그림이라서 ‘시리다’는 그는 오래 응시하면서 시린모습을 까슬까슬한 먹의 농담으로 표현했다.

그는 자연의 모습을 꾸밈없이 관조하면서 버려진 화분과 나무를 스케치하면서,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신하고 있는 사물덩어리를 사유의 공간으로 끌어 들였다. 소소한 공간에서 만날 수 있는 사물에게 따뜻한 인간미를 부여하면서 익숙한 사물이 깔깔한 먹물을 입어 낯선 이미지로 변한 것이다.

▲ ‘한상진의 드로잉, 스침’전의 한상진작가

그의 드로잉에는 간신히 버티고 있는 나뭇가지와 돌멩이, 버려진 화분과 쭈글거리는 모과, 그리고 겨울 숲의 시린 풍경을 중심으로 마음의 여유와 여백을 찾게 한다.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뜨면 경계가 무너져 순간적으로 그림속사물이 나를 관찰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의 작가노트를 보자. “나의 그림들은 조그마한 종이위에 검은 먹으로 그려진다. 바람에 흔들리는 겨울 초지의 마른 풀들, 겨울 산에 스미는 빛의 여명과 일몰의 순간이 그려내는 찰라와 그 속에 자리한 삶과 죽음의 숙명이 고요히 자리에 내려 않는다. 적묵법과 감필법으로 그려진 갈필의 스침은 생성하고 소멸하는 빛나는 존재의 순간을 응시한다. 바람결 같은 숲의 세월이 그려내는 인상은 지시적인 절대성으로부터 변화하고 순환하는 비와, 바람과, 안개, 그리고 거처를 잃은 낮과 밤의 순환 속에 헤맨다.

사물과 나, 풍경과 나, 사이에 틈입한 알 수 없는 토로가 그 사이에 존재하며...“

▲ ‘한상진의 드로잉, 스침’전 작품1

필선을 최소한으로 줄여 대상의 핵심만을 활달하게 묘사하는 감필법(减筆法)과 먹을 엷게 찍어 그림의 윤곽을 만들고 다시 또 엷게 그 위에 먹을 칠하는 적묵법(積墨法)을 이용한 그의 드로잉작품은 유화 같은 깊이와 음영의 맛을 느끼게 하고, 먹색을 차례차례 입혀 색이 깊어져 사물의 형상이 매우 세밀하게 표현되었다.

그는 절대적인 고요 속에서 시시각각 생성하고 소멸하는 자연의 흐름 속에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사물의 실체에 접근했다. 그리고 그의 드로잉을 꿰뚫어보면 자연을 예찬한 괴테의 시와 만난다.

▲ ‘한상진의 드로잉, 스침’전의 작품

‘자연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자기에 대해서 말해 주지만 인간은 자연의 비밀을 알지 못한다. 인간은 자연의 품안에 살면서도 자연의 이방인이다’ 작가 한상진은 생각을 통해 경험에서 발견한 것을 자기 삶에 비추어 발견을 넘어 성찰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시시때때로 변하는 혼돈의 세계에 살고 있다. 그가 먹으로 그린 풍경과 정물은 생명의 온기가 시리도록 담백하다. 덧칠하고 덧칠함으로써 변하지 않는 고정된 실체를 박제화하려는 그의 마음이 사물 속에서 꿈틀댄다.

‘한상진의 드로잉, 스침’전은 오는 27일까지 나무화랑(02-722-7760)에서 열린다.